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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1862 - 1918, 오스트리아 )

 

 

 

 

 

 

 

성녀에서 악녀로 - 유디트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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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83), 올랭피아 - 마네는 전통적인 여인 도상의 구도를 따르는 듯이 보이지만 이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우선 그림 속의 여인은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도발적으로 관객을 쏘아본다. 이 순간 관객은 이 이름없는 익명의 여인(창부)를 찾아온 손님이 된다. 우리는 그녀의 육체를 훔쳐보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보여주는 육체를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육체는 전혀 이상화되어 있지않다. 그녀는 비너스가 아니라 창녀이다. 짧고 세련되지 않은 체구에 목은 굵고 얼굴은 무표정하며 때묻은 침대 위에 닳아빠진 신발을 신고 앉아있다. 이것은 그녀가 비너스가 아니라 인간이며, 원래부터 나신이 아니라 벌거벗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녀의 뒤편에는 흑인 시녀가 간밤의 고객 또는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고객이 보내온 꽃다발을 들고 있다.(실제로도 당시 창녀들의 하녀들은 대개 흑인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발밑에는 부부 생활의 충실을 상징하는 개대신 성적 방종을 상징하는 검은 고양이가 꼬리를 곧추세우고 있다. 발기된 성기의 상징이다. 마네는 전통적인 누드화를 토대로 신화 속 여인이나 도덕률이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의 도덕적 겉치레를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그녀들은 더이상 고객의 얄팍한 위선과 희롱의 베일에 가려져 있지 않고, 당당하게 정면을 쏘아보는 비너스인 것이다.

 

 

 

 

비잔틴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막시미안 주교와 사제들Justinian with Bishop Maximian, clergy, courtiers, and soldiers. Mosaic. S. Vitale, Ravenna. - 구스타프 클림트의 황금으로 치장한 장식화들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확대)

 

 

 

 

라벤나의 성 비탈 성당의 북쪽 벽을 장식하고 있는 비잔틴 양식의 모자이크 벽화 S. Vitale, Ravenna. North presbytery wall mosaics.

 

 

 

 

 

구스타프 클림트


1862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근처 바움가르텐에서 에른스트 클림트의 일곱 자녀 중 둘째로 출생.

1876년 '비엔나 장식 미술학교' 입학

1879년 동생 에른스트, 동급생 프란츠 마츠와 함께 공동작업 시작. 라우프베르거의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1883년 '비엔나 장식 미술학교' 졸업. 에른스트, 마츠와 <쿤스틀러 콤파니> 설립.

1885년 부쿠레슈티 국립 극장. 유고슬라비아의 리예카 국립극장 장식 작업.

1886년 시의회로부터 의뢰받은 구() 국립극장의 실내장식작업 완료. '금심자공로상'받음.

1888년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계단 장식 작업. <황제대상> 수상.

1890년 비엔나 미술가 협회(쿤스틀러 하우스)에 가입.

1892년 동생 에른스트, 부친 뇌일혈로 사망.

1893년 헝가리 여행. 토타스 극장 장식 작업.

1894년 문교부로터 비엔나 대학 강당의 천장화 의뢰받음.

1897년 요셉 마리아 울브리히, 요셉 호프만 등과 함께 '비엔나 분리파' 회원으로 가입.

1902년 벽화 <베토멘 프리체>, <황금물고기>, <에밀리에 플뢰게의 초상> 완성.

1904년 브뤼셀의 스토클레 저택의 벽화 작업 시작.

1905년 '비엔나 분리파' 탈퇴. 베를린 여행. '빌라 로마나' 상 수상. <여자의 세 시기> 완성.

1906년 브뤼셀, 런던, 피렌체 여행.

1907년 <해바라기> 완성.

1908년 대표작 <키스>,<다나에>,<희망2> 완성.

1910년 <베니스 비엔날레> 초대.

1911년 <여자의 세 시기>로 '로마 국제 미술전'에서 금상 수상.

1912년 '오스트리아 예술가 협회' 회장으로 추대됨. 비엔나 서쪽 농촌 지역인 히칭으로 작업실 이전.

1913년 뮌헨, 부다페스트, 만하임에서 작품 전시. <처녀>,<가르데 호수 주위의 말세진느> 완성.

1916년 <삶과 죽음>,<프리데리케 마리아 베어 부인의 추상>,<아터 호수 근처의 운터아크 교회> 완성.

1917년 '뮌헨 예술 아카데미','비엔나 예술 아카데미' 명예회원으로 선출됨.

1918년 비엔나의 자택에서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 미완성 유작으로 <유람>,<신부>,<아담과 이브>를 남김.


주인이 떠나 버린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업실
 

 

 

 

관련 사이트 & 참고 도서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오다』/ 박명욱 지음/ 박가서장/ 1998년 - '마이너 아티스트 17명의 초상'이란 부제가 과연 이 책과 어울리는가 지금 그렇게 물을 수 있자면 그건 이 책의 미덕이다. 2003년과 1998년의 차이는 불과 얼마 안 되는 기간이지만 그 사이에 우리는 한 차례 평전 붐을 맞았고, 이 책은 불행히도 절판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예술가를 한데 묶어 책을 묶는 기획은 지금은 비교적 흔하지만 당시로서는 국내에서 그렇게 흔히 볼 수 없는 일이었고, 그런 점만 놓고 보더라도 이 책은 소중하다.

『은밀한 사전』/ 가타 두벡 지음/ 남문희 옮김/ 청년사/ 2001년 - '전기에 나오지 않는 세계 유명인의 성과 사랑'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가타 두벡의 이 책은 그만큼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어당긴다. 비록 말 그대로 단편적인 성과 사랑의 이야기들을 호기심 차원에서 엮어 놓기는 했지만 그래도 재미있다.

『미술로 보는 20세기』/ 이주헌 지음/ 학고재/ 2001년 - 미술로 보는 20세기란 것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하나는 미술이 20세기의 역사를 증명하는 매개로서 다른 하나는 20세기의 미술이 어떠했는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이 책은 그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한 드문 책이다. 만약 영화 20자 평처럼 별 숫자로 점수를 준다면 별 다섯 개 만점에 별 다섯 개.

 『에곤 실레』 /프랭크 화이트포드 지음/ 김미정 옮김/ 시공아트 012/1999년

『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 』/ 알렉상드라 라피에르 지음/ 함정임 옮김/ 민음사/ 2001년 - 영화 <시티 오브 조이>를 쓴 도미니크 라피에르의 딸인 알렉상드라 라피에르가 쓴 17세기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의 이야기이다. 여성의 창작활동이 극히 제한되었던 근대이전 바로크 시대의 화가 아르테미시아의 삶과 작품 세계가 담겨 있다.

『위험한 그림의 미술사 - 바로크에서 현대까지 미술사를 바꾼 명화의 스캔들』/ 조이한 지음/ 웅진닷컴/ 2002년 - 카라바조, 프리드리히, 마네, 뭉크, 뒤샹에 이르는, 바로크에서 현대에 이르는 미술사는 어찌보면 파격이 정격이 되는 스캔들의 역사였다는 것이 작자 조이한의 시각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그의 말이 얼마나 맞는 말인지 잘 느낄 수 있다.

 『Klimt』/ Gustav Klimt/ Taschen/ 1993/ Germany
  
- 구스타프 클림트 화집이다. 독일의 타셴 출판사에서 나온 염가판 화집 시리즈 중 구스타프 클림트 편이다. 소장해둘 만하다.(영문)

비잔틴미술 -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비잔틴양식의 여러 에술 작품들을 잘 정리해두고 있는 사이트이다.(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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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림트의 작품 <유디트Judith>와 그의 남겨진 유작 <아담과 이브>를 보자. 유디트는 성서 속에서 앗시리아의 침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여인이지만 동시에 '홀로페레느스Holofernes'라는 앗시리아 '남성' 장군의 목을 베는 여인이기도 하다. 유디트는 서양 미술에서는 오래된 고전의 주제 중 하나였다.  주로 패덕과 욕망을 단죄하는 겸손과 순결, 믿음의 승리를 드러내기 위한 기독교적인 미덕의 소재로 다루어지다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거치면서 살인과 폭력의 흥분되는 순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소재로 다루어지는 변화를 보인다. 그럼, 역사적으로 등장하는 유디트를 살펴보도록 하자(그림을 클릭하면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다).

  시간 연대 순으로 배치해 보았는데 이탈리아 플로렌스 출신의 화가. 보티첼리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디트는 이미 적장의 목을 베어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한 손엔 적장 홀로페레느스의 목을 베었을 칼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나뭇가지를 들고 있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하녀가 이고 있는 것은 적장의 목이고, 그녀가 손에는 적장을 취하게 만들었을 술병이 들려 있다. 유디트가 돌아가는 발 아래로 장군의 죽음에 놀란 앗시리아 병사들이 허둥지둥 패퇴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살인의 장면은 드러나지 않는다. 역시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 티치아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유디트를 보자.

  원래 성서에 의하면 유디트의 하녀 아브라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받아 곡식자루에 넣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티치아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디트는 마치 세례자 요한의 목을 쟁반에 받아든 살로메의 구도로 보인다. 얼핏 보아서 드러나지 않은 적장의 목은 마치 유디트의 연인이 편안히 누워 쉬고 있는 듯이 보인다. 유디트의 하녀 역시 매우 어린 소녀로 나타나고 있으며 유디트는 적장의 목을 벤 당찬 여걸이라기 보다는 부끄러움에 살며시 고개를 숙인 순결한 처녀의 형상에 가깝다.

  그런데 이것이 카라바조에 이르면 모양새가 많이 달라진다. 드디어 적장의 목을 베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홀로페르네스는 편안히 잠들어 있다가 유디트의 불의의 일격을 당하여 눈을 치켜뜨지만 이미 목은 절반을 잘려 나갔고, 피는 분수처럼 침대를 적시며 빠져나가는 그의 생명처럼 보인다. 그런데 적장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의 손을 보자. 적장의 머리털을 움켜쥐고 있는 그녀는 더러운 듯 한껏 몸을 뒤로 젖히고 있으며 칼을 쥔 손은 파리 한 마리로 잡아보지 않은 듯 보인다. 그녀를 뒤따라온 하녀 역시 매우 늙은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아무 하는 일없이 떨어지는 목을 냉큼 주워 담으려는 듯 포대를 들고 있다.

  17세기에 이르러 우리는 여성의 시각으로 그려진 유디트를 볼 수 있게 되는데,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Artemisia Gentileschi, 1593~1652)의 작품이다. 아르테미시아는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듯한 구도를 보이고 있지만 그 생생함은 카라바조와 비교할 수도 없다. 유디트는 매우 건강한 팔뚝을 지닌 여인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카라바지오의 유디트처럼 양미간을 찌푸리고 있지도 않다. 그녀는 매우 결연한 표정으로 홀로페르네스의 머리털을 힘센 팔뚝으로 움겨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칼을 단단히 틀어잡고 있다. 성서에는 밖에서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된 하녀 역시 저항하는 적장의 양팔을 내리누른다.

Sandro Botticelli(1445- 1510), The Return of Judith to Bethulia, 1472, Oil on panel, 31 x 24 c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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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cellio Tiziano, (1490-1576), Judith with the Head of Holofernes, 1515, Oil on canvas, 89,5 x 73 cm, Galleria Doria-Pamphili, 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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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avaggio (1573-1610), Judith Beheading Holofernes, 1598, Oil on canvas, Galleria Nazionale dell'Arte Antica, 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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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dith” by Artemisia Gentileschi(1593~1652) , Capodimonte Museum

 

  보티첼리, 티치아노, 카라바지오와 아르테미시아의 차이는 단 하나 아르테미시아가 여성 화가였다는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술에 있어 여성의 대상은 그야말로 꽃의 역할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관음증의 대상이었거나 아니면 남성을 위한 뮤즈가 되어 자신들의창조적 재능을 소진하는 것만으로 그 역할이 한정되어 있었다. 아르테미시아는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재발견된 화가였다. 그녀는 여성에게 제한된 역할을 뛰어넘은 최초의 화가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디트는 위험천만한 적진 한 가운데에서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의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다. 여기에는 아르테미시아의 뼈아픈 과거가 숨어 있다.

  그녀는 19세 때 아버지의 친구이자 동료화가였던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강간 당하고 그 일로 인해 법정에 섰던 경험이 있다. 그러나 7개월이나 계속된 재판에서 상대 남자인 타시는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면서 오히려 아르메시아를 음란한 여자로 매도한다. 결국 아르테미시아는 법정에서 자신의 순결을 증명할 것을 요구받았고, 고문까지 받아야 했다. 그녀가 살았던 시대 아르테미시아가 맘껏 주체적인 여성, 자신을 강간한 남자에 대한 복수심을 발현시킬 수 있는 소재는 유디트였던 것이다.

19세기에 갇힌 여성, 유디트와 이브

  림트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몇몇 여인들의 삶을 살펴보는 것은 그의 그림과 직접적으로는 별상관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가 화폭에 담은 젠더(gender)로서의 여성들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될 것 같다. 앞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알마 말러(Alma Mahler, 1879 - 1964)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타고난 재능을 소유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지만 동시에 남성들의 꿈과 악몽을 동시에 구현하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넘치는 재능이 있었지만 구스타프 말러의 아내, 발터 그로피우스의 아내, 작가 프란츠 베르펠의 아내로 일생을 보냈다.

어떤 면에서 그녀는 그래도 비교적 행복한 편에 속했다. 마리아 레하라가(Maria Lejarraga, 1874 - 1974) 스페인에서 태어난 그녀는 20세기 초 유명한 극작가인 그레고리오 마르띠네스 씨에라의 아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명한 극작가인 그녀의 남편은 단 한 줄의 희곡도 쓴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훗날 그녀는 사회주의자가 되어 극작가, 수필가, 여성운동가, 사회주의 정당의 국회의원이 되어 망명생활을 하게 되고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다). 그리고 너무나 잘 알려진 오귀스트 로댕의 연인이었던 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l, 1864 - 1943) 있다.

  앞서 아놀드 하우저와 이주헌은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창부와 동일시함으로써 부르주아 사회를 향해 창부라고 절규했다지만, 단언컨대 이때 말하는 예술가들 속에 여성은 없었다. 클림트의 작품 속에 등장하고 있는 여인들의 시선은 몽환적인 아름다움과 마네의 작품 <올랭피아>(1865년)에 등장하는 창부의 직설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 그녀들은 다소곳한 자세로 시선을 내리깔지도 않았고, 틀림없이 남성들이 더 많았을 관객들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는다.

  19세기는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아직 페미니즘의 시기는 아니었다. 도리어 이 무렵의 여성들은 남성들에 대한 절대적(가부장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종속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는 또한 페미니즘이 그 탄생을 알리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 무렵의 여성들은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남성적인,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에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는 시기였음에도 이 무렵의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의 등장은 엄청난 공포이자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19세기에 여성이 하는 일은 그것이 어떤 것(말이나 행동 모두)이든 남성들에게는 공포가 되어 나타났다.

   옆의 작품을 보자 클림트의 <아담과 이브>에서 남성인 아담은 흑빛으로 질려 있고, 생기발랄한 이브 뒤에 숨어 있다. 아담이 마치 죽은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반면에 이브는 마치 볼테면 맘껏 보라는 듯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많은 평자들이 클림트의 작품을 비롯한 당대의 여러 예술작품들을 통해 당시 여성운동이 얼마나 커다란 공포를 불러 일으켰는지, 당시의 여성들이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본연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얼마나 체계적으로 노력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순간이나마 시간을 내서 자아를 주장하는 여성, 완전히 헌신하지 않는 여성은 이미 위험하고, 죄를 저지른 이브이다. 물론 당시 실제 생활 속의 남편들은 예술작품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보다는 확실히 적은 상처를 받아을 터이지만 말이다.

   공포는 바로 문학이나 미술과 같은 예술에도 반영되어 19세기의 문학 속에는 종종 경제적이던 문화적이던 허울만 남은 가정, 외도, 알콜 중독, 결핵, 온갖 사회악에 무풍지대로 노출된 가정을 등장시킨다. 그들은 바람 피우는 남편이나 알콜 중독에 걸린 남편, 결핵에 걸리거나 병약한 아이들을 수도 없이 쏟아냈다. 헨리크 입센은 '아내이고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살겠다'라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새로운 인간형을 탄생시키니 그가 바로 『인형의 집』(1879년)의 '노라'였다(물론 입센이 반드시 여성해방을 염두에 두었다고만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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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dith I, 1901, Oil on canvas, (153 x 133 cm), Osterreichische Galerie, V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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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dith II, 1909, Oil on canvas, 178 x 46 cm, Galleria d'Arte Moderne, Ven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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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av Klimt,
Adam & Eve

여인들의 사랑을 한껏 받고 간 구스타프 클림트

  르누보 양식을 바탕으로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그 양식 때문이 아니라 그의 그림이 담고 있는 도발적인 내용 때문에 사회로부터 거부 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1900-1903년 사이에 제작된 비엔나 대학의 벽화가 격렬한 논쟁 끝에 거부당하고, (비엔나 대학 강당의 천장화 '철학', '의학', '법학'이 발표된 것도 바로 이 분리파 전시회를 통해서였다. 이미 서서히, 그리고 노골적이고 강렬한 에로티시즘을 누설하고 있던 클림트는, 앞의 두 작품에 대해 쏟아진 과도하고 병적으로 관능적이라는 비난은 그런 대로 받아넘겼으나, 1903년 발표된 '법학'에 대해 문교부와 비평가들은 물론이고 일반 여론까지 들고일어나 '춘화' 혹은 '변태성욕자의 무절제'라고 비난) 1902년 봄 분리파의 전시회에 출품된 <베토벤 프리즈> 또한 거부당하고 만다. 그는 점점 고립되어 갔고, 1905년에는 그의 후원자들과 요제프 엥겔하르트의 후원자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 상태로 인해 결국 분리파가 분열되기에 이른다. 클림트는 비엔나 분리파를 탈퇴하고 만다.

  그러나 클림트의 작품들이 자국에서는 그토록 천대받았지만 이미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에 접어든 프랑스 등에서는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해주었다. 1900년 개최된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는 그의 작품 "철학"에 금상을 안겨 주었고, 로댕은 벽화 "베토벤 프리즈"에 대해 "너무나 비극적이고 너무나 성스러운 작품"이라는 찬사를 던졌다. 1907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접한 비잔틴 예술의 영향을 받아 그는 금빛 물감과 금박이 등장하는 이른바 "황금 시대"를 시작한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클림트에게 있어서도 황금기였다. 그는 <다나에>, <세기의 세 여자>, <물뱀 1>, <물뱀 2>, <희망 2> 등을 잇따라 발표한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인 <키스>가 발표된 1908년을 기점으로 그는 황금시대를 종료한다. "장식은 이제 우리 문화와 아무런 유기적 관련을 맺지 못한다. 장식은 더 이상 진보할 수 없고, 그러므로 지진아적, 비정상적 현상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최후의 순간까지 관능성과 장식성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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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on Schiele. Gustav Klimt in His Blue Working Smock. Around 1912 Pencil, gouache, 52.5 X 28 cm.

 

  말년의 그는 1년을 둘로 나누어 살았다고 한다. 낮에는 아프리카풍의 스먹(Smock)을 입고 비엔나의 작업실에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작업에 몰두하고, 나머지 반은 동생의 처제인 의상 디자이너 에일리에 플뢰게와 함께 아터 호반에서 고요한 명상과 휴식을 즐겼다. 그는 이 무렵 수많은 풍경화들을 남겼는데 <자작나무가 있는 농가>, <언덕 위의 정원>, <스클로스 캄머 정원의 길>, <아터 호수 근처의 운터아크 교회> 같은 작품들이 이 무렵의 것들이다.

  그는 또한 초상화작업도 매우 열심이었다. 오스트리아의 많은 여인들이 그의 손으로 그려진 초상화를 원했고, 클림트 역시 기꺼이 이에 응했다. 그는 장식성을 진보할 수 없고, 지진아적이라고 말했지만 초상화에는 또 현란한 장식성과 색채를 통해 비엔나의 상류층 부녀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에게 초상화를 그려 받는 것이 당시 비엔나 상류층 여인들에게는 일종의 유행이었고, 금전적인 고민을 벗어나고 싶어 했던 클림트의 이해와도 잘 맞아 떨어졌다. 191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그는 구스타프 쿠르베, 오귀스트 르느와르와 더불어 그만의 개인 전시실을 갖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의 말년에 찾아든 명성은 그의 호반 생활과 더불어 분명 평화롭기 그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종료를 한 해 앞둔 1918년 전유럽을 강타해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은 바로 얼마전 뇌졸증으로 갑자기 쓰러져 신체 일부가 마비된 채 투병하던 클림트의 목숨을 거두어 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건축가 오토 바그너도, '비엔나 공방'의 창설자인 디자이너 콜로만 모저, 임종의 클림트를 스케치했던 28세의 청년 에곤 실레도 갔다.

  클림트는 살아 생전에 수많은 여인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 역시 여인들을 사랑했다. 오늘날 클림트의 작품은 구식처럼 보이기도 하고, 미술사적으로는 코코슈카나, 실레에 끼친 영향을 더욱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를 향한 여인들의 사랑은 지속되고 있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구스타프 클림트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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