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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드와노의 장난기인지 피카소의 발상인지는 모르겠으나 식탁에 올려논 손가락 모양의 빵으로 잠깐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위트있는 사진이다.

 

 

 

 

파블로 피카소 ( Pablo Picasso, 1881-1973, 스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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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뽈 엘뤼아르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폴 세잔느

 

  20세기 최고의 화가 혹은 20세기의 미술사를 말하고자 한다면 그 누구도 이 사람의 이름을 피하고서는 단 한 줄의 글도 써 내려갈 수 없다. 그만큼 피카소에 대한 수없이 많은 글과 책들이 범람하고 있고, 그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지금 소개하고 있는 것들은 그것들 중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

"피카소는 천재다, 그는 미치광이다. 피카소의 그림은 난센스다, 어린애도 그보다 잘 그릴 수 있다. 피카소는 공산주의자다."

여기에 몇 가지 말들을 덧붙이자면 그는 호색한이기도 했고, 동시에 휴머니스트, 무정부주의자였다. 오죽했으면 그의 그런 편력에 기댄 SF소설까지 나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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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ragedy, 1903, Chester Dale Collection - 피카소가 청색시대에 그린 <비극>이란 작품이다. 그는 마드리드 시절부터 가난한 이들과 곡예사, 거리의 악사들을 즐겨 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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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lequin Family (1905), ink and gouache on cardboard, 11-3/8 x 8-1/2"

 


 두 살 때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리다.

  피카소는 1881년 스페인 남부 말라가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는 결코 어린아이처럼 데생한 적이 없다. 열두 살 때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렸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대해 천재성을 보여주었다. 그의 그런 천재성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가 나이 제한에도 불구하고 마르셀로나 미술학교 시험에 당당하게 합격했으며 스페인의 미술전통을 소화해 열다섯 살 때에는 풍속화, 초상화를 능란하게 그려냈다는 것이다. 마드리드 전람회 입상을 게기로 마드리드에 유학하게 된 피카소는 화실을 가진 '진짜 화가'가 됐으며 열여덟 살 때에는 스페인 대표로 <마지막 순간>이란 작품을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회고전에 출품했다. 바람구두의 대학시절 은사인 시인. 오규원 선생의 연구실, 선생님의 책상 위에 덮어 논 유리 밑에는 피카소의 흥미로운 그림이 들어 있었다. 그 그림은 피카소가  추상적으로 그린 황소 그림이 어떤 순서로 그려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일종의 연속 그림이었다. 처음에는 아주 세밀하게 그려진 황소 데생이 있고, 점차로 선이 생략되고 추상화되어 가는 황소의 모습이 매우 흥미진진하게 그려져 있었다. 오규원 선생은 그 그림을 예로 들며 시()라는 것도 역시 이런 과정을 거쳐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다는 가르침을 주곤 했었다. 피카소의 추상화들은 대개가 이런 그의 치밀한 데생들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계산된 것들이었다. 따라서 그의 회화가 어설픈 그림이거나 미치광이의 그림이라는 식의 비판은 피카소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말들이다.(물론 이런 견해에 반기를 든 사람들도 있어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라는 책까지 나와있으니 참고하심도 좋을 듯하다.)

나폴레옹이 피레네산맥 이남은 유럽이 아니다라고 할 만큼 피카소가 살았던 당시의 스페인(이베리아 반도)지역은 문명의 첨단을 달리던 유럽의 변두리였다. 스페인 회화의 오랜 전통은 프란시스코 델 고야 이후 그 맥이 끊겨 19세기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파리의 미술계는 들라크로와와 마네의 영향으로 20세기의 혁명적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일찌감치 자신이 라파엘로보다 낫다는 자부심으로 충만해 있던 피카소에게 파리는 '꿈과 빛의 도시'일 수밖에 없었다.

  1900년 피카소의 나이 열아홉 살 때 그는 오랫동안 고대해 오던 파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불어라고는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던 그에게 낯선 파리에서의 생활은 고달프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답답한 스페인에서 벗어난 그에게 당시의 파리는 거리 전체가 거대한 미술학교였다. 파리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찾아 나선 그는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 넋을 잃었고, 드가, 로트렉, 고흐, 고갱 등의 그림에 대한 정열적인 연구에 빠져들게 했다. 원래 태생이 스페인인데다가 열정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질 것이 없었던 피카소였음으로 이 당시 그의 연구가 얼마나 정열적이었는 지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의 파리 생활은 살을 에이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가 세 차례의 귀향 끝에 몽마르트에 완전히 정착한 것이 1904년이었던 것만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그가 정착한 몽마르트의 아틀리에는 '바토라부아르(세탁선)'이라고 부르는 건물이었는데, 그런 이름이 붙게 된 데에는 보기 흉한 몰골과 쓰러질 듯 흔들리는 모양이 마치 세탁부들이 빨래터로 쓰는 강변의 낡은 배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30개의 아틀리에에 수도꼭지가 단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피카소의 여성 편력과 화풍의 변화

  그와 비슷한 시기의 스페인 출신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가 친구였던 시인. 뽈 엘뤼아르의 아내 갈라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 아버지와 결별하면서까지 평생 한 여자에 충실한 편이었다면 피카소는 숱한 여성편력을 남겼다. 한 남자가 평생 한 여자만을 혹을 한 여자가 평생 한 남자만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지극히 인간적인 일인지 아니면 지극히 적합하지 않은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피카소 개인의 경우로 국한해 놓고 본다면 아마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이 글을 쓰고 있는 본인의 경우를 말하라고 한다면 귀찮아서 혹은 게을러서 그런 사랑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절대 마누라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 이런 강한 부정은 역시 강한 긍정이던가?)

  어쨌든 피카소의 화풍을 일컬어 말하는 '청색시대, 분홍시대' 등등의 구분은 모두 그와 관련된 사람들과의 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의 절친한 친구 카사게마스의 자살이 그의 화면에 청색 단색조의 차가운 색조에 침잠케 했다면(이 시기를 일컬어 '청색시대' 1901-1904년에 이르는 시기), 그가 첫 여자 피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면서는 그 짙은 우울에서 벗어나 분홍시대를 열게 만든다.(1905년) 이 당시 그는 파리에서 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을 만들게 되는 데 이 시기에 피카소 주변의 인물들은 시인 막스 자콥과 아폴리네르, 미국인 화상 스타인 남매, 독일인 화상 칸 바일러, 화가 마티스, 모딜리아니 등이었다.

 참고사이트 & 참고 도서

 『피카소 - 시공디스커버리총서 18』/ 마리 로르 베르나다크 지음 / 시공사 / 1995년 - 전두환 옹의 아들인 전재국 씨가 하는 시공사. 그러나 어쩌겠는가? 책이 좋으면 살밖에 디스커버리 총서. 좀 비싸다는 감도 있지만 워낙 디스커버리 시리즈의 탄탄한 기획력에다 얇은 문고본에 좋은 지질은 전권을 사다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시공 아트 시리즈> 역시 외국의 좋은 기획물을 사다 출판하는 것이다. 그게 단점이긴 하지만...다 좋다. 다만 번역의 오류가 가끔 보이는 것과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가끔 출판계 흔들기에 나선다는 것 말고.

 『피카소의 게르니카 - 열화당미술문고 202』/ 장루이페리에 / 열화당 / 1979년  - 열화당. 이 출판사에 대해서는 항상 애증이 교차한다. 미술전문 출판사란 좋은 느낌과 함께 박봉에 그야말로 노동 착취에 시달리는 후배 녀석을 생각해보면. 음, 이 책 역시 이제는 절판되었다는 아쉬운 소식을 듣는다.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에프라임 키숀 지음, 반성완 옮김 / 디자인하우스 / 1996년   - 이런 류의 책들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한 가지는 반짝이는 상업적 기획력, 다른 한 가지는 정말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구나 하는 기발함. 한 권 사서 읽어볼 만한 책이다. 예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소비엔트 연방의 리얼리즘 예술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 CIA에서 잭슨 폴록과 같은 추상파 화가들을 지원했단 얘기. 이것도 컨스피러시인가? 어쨌든 의심이 가는 일이다.

 『20세기의 사람들 - 상.하』/ 한겨레신문 문화부편/ 한겨레신문사/ 1995년  - 나는 20세기의 사람인가? 아니면 21세기의 사람인가? 20세기에 별로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한 나로서는 역시 21세기에 기대를 걸어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한 번 사놓고 읽어볼 만하다. 20세기의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21세기를 잘 살아보기 위해서. <한겨레 신문>에 연재되던 기사를 모아 만든 책이지만 탄탄하게 읽힌다. <바람구두> 홈페이지에 자주 등장할 책이다.(겹치는 인물들이 워낙 많으므로)

 『미술과 문학의 만남』/ 이가림 지음/(주)월간미술 / 2000년  -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의 시인이자 인하대 불문학과 교수인 이가림 선생이 <월간미술>에 연재하던 글을 모아 낸 책이다. 피카소와 엘뤼아르를, 모딜리아니와 장 콕토 등을 연결해서 재미있게 해설해 가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

 『20세기 미술사』/ 로즈메리 람버트 지음/ 이석우 옮김 / 열화당미술신58/ 1986년  - 화가 에드바르드 뭉크(1863~1944)의 20세기 표현주의를 비롯해서 키네틱 아트, 팝 아트 그리고 사실주의에 이르기까지를 서술하고 있다. 복잡해진 20세기 미술 변천을 역사적 맥락에서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다.

  매리 앤 설리번 디지털 이메이징 프로젝트 - 피카소의 조각품과 앙리 무어 등의 조각 작품을 디지털 이미지화 하고 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을 다루고 있으므로 알아두면 매우 좋은 사이트이다.(영문)

  러시아 상트페테르스부르크 허미티지 미술관  -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 30편을 볼 수 있다.(영문)

  워싱턴 국립미술관  - 피카소의 작품 7편의 이미지와 간략한 작품 소개(영문)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도서관  - 케테 콜비츠를 포함해서 대단히 많은 수의 작가들에 대한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는 사이트이다.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미술관련 사이트들 중 하나이다.(영문)

  팔라초 그라시 베니스  - 이탈리아 베니스에 있는 팔라초(음, 이 말은 뭐 이태리어로 궁전, 저택쯤 되는 말입니다. 원래는 로마시대의 팔라티움에서 나온 말로 에또, 잘난 척) 그라시의 웹 사이트, 피카소를 포함해서 많은 화가들에 대한 자료가 있다.(영문)

  * 이외에도 20세기 최고의 거장이란 칭호답게 너무나 많은 피카소에 대한 사이트들이 있습니다만, 바람구두의 힘이 부치는 관계로 이만 줄입니다. 더욱 많은 자료가 필요하신 분들은 알아서 잘 찾아보시거나 메일을 주세요.

 


새로운 미술의 태동과 피카소

  현대의 회화사에 있어 '사진의 등장'보다 충격적인 사건은 없었을 것이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별도의 글을 통해 다룰 예정이긴 하지만) 사진의 등장은 그 동안 자연의 모사에 치중했던 화가들에게 그리고 거의 유일하게 자연이란 대상을 시각화해낼 수 있는 특권적 권리를 누려왔던 화가들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이자 동시에 새로운 매체인 사진과 경쟁할 수 없음을 마음속으로 뼈저리게 느껴야 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물론 들라크로와 같은 이들은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미국의 사진가인 A. 스티글리츠가 미국 근대사진의 아버지라는 평을 듣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사진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기존의 예술이라는 제도권 안에 진입시킨 공로가 크기 때문이었다. 특히 보수적인 유럽의 예술계에서 사진이 예술이라는 체제 안으로 진입하게 된 결정적 사건은 1859년에 있었다. 프랑스사진협회의 노력으로 샹젤리에 궁에서 열렸던 '사진 살롱 개최'가 바로 그것인데, 사진의 예술성을 제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차원에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당시 유명한 시인이자 예술비평가로 활동하던 보들레르조차 '1859년 살롱비평'을 통해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강도높게 비판하였고, 1862년에는 앵그르를 비롯한 유명 미술가들이 사진의 예술편입에 반대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런 우여곡절 속에 예술에 편입된 사진은 그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예술의 한 갈래가 되었다.

  좀더 거칠게 말하자면 화가들이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있어서는 더이상 사진과 경쟁할 수 없음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회화와 사진은 경쟁자이자 동시에 동반자의 길을 가게 되었고, 미술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일은 사진에 맡기고, 스스로 독자적인 존재 이유를 확인하고자 시도하게 된다. 그것이 피카소가 등장하기 직전인 19세기의 일이었다.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이 행했던 것이 자신들의 인상, 시각과 시선을 그림에 개입시키며 사진과는 다른 회화만의 별도의 세계를 구축했다면 피카소는 이로부터 한걸음(아니, 몇 발짝은 더 앞서간 셈이다.) 더 나가 평면의 화면에 입체감과 깊이를 부여하는 방법을 찾아나서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조르주 브라크를 만나 구체적인 결실들을 맺어가는데, 1907년 일찌기 "자연은 원통, 원추, 원구로 처리될 수 있다"고 말했던 세잔의 대규모 회고전을 계기로 현실화시켜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함축된 기하하적 그림을 경쟁적으로 그려가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큐비즘(입체파) 운동의 시작이었다.

   그의 이런 혁명적 활동은 단순히 화풍(양식)의 변화로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일상의 진부한 재료를 변용한 파피에 콜레, 콜라주, 아상블라주(뭔지 묻지 마세요. 저도 잘 모르니까)의 작업을 통해 예술과 산업의 경계를 무너뜨렸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미술의 고귀함은 작품의 주제만의 문제도, 대상이나 방법에 기인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미술이란 미술가의 창조적 사고, 변형능력, 그리고 미술이 아닌 것에서 미술을 창조해내는 능력이 미술의 문제가 되었다. 이런 그의 사고는 예술이란 자연이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내세운 젊은 초현실주의자들과 그것과도 비슷하다. 물론 피카소는 초현실주의 운동의 여러 예술가들과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뽈 엘뤼아르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길고 풍요로운 생애와 거듭되는 홀로코스트

   파블로 피카소는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거의 한 세기에 이르는 기간을 살았다. 93세의 나이로 1973년 프랑스의 액상 프로방스 근처 무쟁의 저택에서 숨을 거둔 그에게 있어 살아 생전의 세계는 개인적으로 수많은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개인적으로는 무신론자로서 자신의 작품 이외에 남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서였는지 그림, 판화, 조각, 데생, 콜라주, 도자기 등 모두 4만 4천여 점의 방대한 양의 작품들을 남겼지만 그가 살아낸 시대는 그렇게 만만한 시기는 아니었다. 그가 겪어야 했던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란>을 비롯해서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등 인류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전쟁과 대학살이 자행된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이런 전쟁을 증오했고, 두려워했다. 그가 이런 전쟁과 대학살을 바라보며 남긴 그림들은 지금까지 우리 곁에 남아 전쟁과 홀로코스트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바로 <게르니카>(1937년), <납골당>(1945년), <한국에서의 학살>(1951년), <전쟁과 평화>(1954년) 등 대량학살과 폭력을 증오하는 대작들을 남긴 것이다.


<게르니카>(1937년)
 
 

  마드리드 시절부터 거리의 부랑아들과 빈민을 화폭에 그려내던 무정부주의자 피카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에 의해 파리가 해방된 직후 프랑스공산당에 입당한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에 입각한 프랑스 공산당의 예술관과 피카소의 예술관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으며 <한국에서의 학살>을 둘러싼 피카소와 프랑스 공산당의 충돌은 결국 피카소로 하여금 프랑스 공산당과 결별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피카소는 내면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양심의 목소리를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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