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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쟁이가 말로 먹고 살기 시작하면 망하는 이유는 뭘까?
글은 피드백이 거의 없거나 매우 적은 분야다. 그에 비해 청중의 피드백은 즉각적이며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열렬하기까지 하다. 예술가들의 습작기가 유난히 고통스럽고 외로운 까닭 중 하나는 팬(수용자)이 없기 때문이다.
문예창작과를 다니면서 연극과 친구들이 기말 작품 발표회를 열 때마다 관객으로 구경을 하노라면 부럽고 서글펐다. 일단 서울예대 연극과 학생들의 수준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보통 4년제 대학 연극동아리의 학예회 수준 연극과는 격이 다르다) 비평가적 입장으로 바라보더라도 일단 어느 정도 동의할 수준급이다. 같은 과 학생들은 그렇다쳐도 타과에서 구경온 이들도 함께 열렬히 환호하게 된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 잘해야 기말작품집에 묶일 소설 한 편, 시 세 편 정도 제출하고 돌아서면 독자의 평가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는 문예창작과의 기말작품집은 우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어쩌랴. 글이란 것이 본래 그런 것인데... 책 한두 권 내본 경험과 그걸 통해 몇 차례 강연과 강의를 해본 경험, 비록 공중파 라디오 프로그램은 아니었지만 라디오 프로그램의 고게(고정게스트) 6개월 해본 경험으로 말하자면 강연은 글쓰기 보다 훨씬 재미있고, 글쓰기에 들어가는 에너지에 비해 보수도 매우 후하다. 그러니 청중이 있는 강연을 비롯해 '말로 먹고 살기'에 한번 맛이 들리기 시작하면 '글'은 곧 시큰둥해지거나 강연할 기회를 만들기 위한 이벤트용 책으로 쓰여지기도 한다.
2.
글이 시큰둥해진다고 해서 나쁠 거야 있겠나. 애초에 자기 적성에 더 맞는 일을 찾아냈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나쁜 것 중 하나는 '글 쓰는 자아'에서 '말하는 자아'로의 변화다.
말하는 자아에는 묘한 중독성이 있어서 누군가 내 이야기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을 참기 어려워진다. 목사나 교수 같은 직업군은 의식, 무의식 중에 권위적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다수의 청중 앞에서 단독으로 발화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권위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발화자의 말을 의도적으로 끊는 버릇이 있다. 발화자의 말을 끊어보면 그 사람의 성격, 지적인 정도, 권위에 대한 자의식의 수준을 감지할 수 있다.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말이 끊기는 것을 못 참는 사람일수록 권위적이다. 강연을 많이 하다보면 어느 부분에서 청중이 웃게 되는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것은 강의 전달의 스킬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발화자가 중독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글은 독자와의 거리가 상당히 먼 매체인데도 불구하고, 글도 자주, 오래 쓰다보면 독자가 기대하는 내용과 수위를 스스로 알게 된다. 이 때 종종 독자에게 아부하거나 아첨하고 싶어진다. 말이 좋아서 좀더 쉽게 쓴다는 것이지 사실은 내용은 새로울 것도, 보잘 것 없는데 돌아오는 연재 차례라 어쩔 수 없이, 때로는 요즘 이슈가 되는 내용이 그것이기 때문에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대해 아는 체 하며 의견을 덧대는 일이 생기고, 그 빈약한 내용을 채우기 위해 말의 강도나 수위를 높이게 된다. 이럴 때 글쟁이도 망한다. 그런데 강연은 이보다 그 강도가 더 높다.
'말로 먹고 살기'는 일종의 엔터테인먼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딘가에 액센트를 집어넣게 되고, 웃음의 포인트를 찾게 된다. 한 마디로 강연자가 청중에게 아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청중의 열렬한 환호는 좀더 즉흥적일 수밖에 없고, 강도도 더욱 세진다. 발화자가 그것에 중독되어 그 지점을 넘어서게 되면 드디어 목사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객관적 청중이 신도로서 일종의 팬덤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프로페셔널'한 글쟁이라는 말에 대해 그것이 가능한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3.
나는 모든 글쟁이는 기본적으로 아마추어라고 생각한다.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지만, 나는 글을 학교에서 아카데미즘이나 기예의 방편으로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언제나 회의적이었다. 예를 들어 글쓰기가 '기예'라면 우리는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거의 항상 일정 수준의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그가 고도로 훈련된 첼리스트라면 어떤 자리에서, 어떤 곡이든 항상 일정한 수준의 연주를 할 수 있다. 그가 오랜 기간 동안 기예를 연마한 도예가라면 그가 만드는 그릇이 항상 일정한 모양으로 나올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글은 이와 맥락이 조금 다르다.
우리가 '문학과 예술'이란 식으로 문학을 보통의 예술, 그러니까 '기예'가 좀더 강조되는 여타 예술 장르와 구분하여 이야기하는 까닭은 문학이 일반적인 예술과는 조금 다른 차원에 놓이기 때문이다(그렇다고 내가 문학을 모든 예술 장르에 비해 우위에 놓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글은 기본적으로 '사상의 문제'이며, '삶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그렇지 않은 예술도 있는가라고 반문해도 어쩔 수 없다. 예를 들어 '첼로'를 연주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프로든, 아마추어든 첼로란 악기를 연주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마음을 먹어야 한다. 그러나 글은 사회구성원이라면 특별히 문맹이 아니라면 누구나 쓰게 된다. 특별한 문예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경우에 따라 사람을 울리는 글을 쓸 수 있다. 생활 수기나 수필 같은 장르뿐만 아니라 때로는 열악한 환경에 처한 노동자가 쓴 편지나 호소문도 사람을 격동시킨다.
특별한 글쓰기 교육을 받은 이들이라도 그가 겨냥하고 있는 대상이나 주장하는 바가 잘못되었을 때, 미문은 그 아름답고, 정교한 문장으로 인해 더 심한 조롱거리가 될 수 있다. 그 이유는 글이 기본적으로 다루는 것이 '사상'의 문제이자, '삶'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글이 품고 있는 미묘한 뉘앙스를 읽어낼 수 있는가, 정교한 논리 전개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선 문맹 수준을 넘어선, 해독과 해석의 능력을 훈련받아야 하고, 그런 글을 직업적으로 쓰기 위해선 각별한 훈련 과정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이 주는 감동'을 '기예가 주는 감동'으로 보기 어려운 까닭을 속담에 비유해 말하자면 '입은 삐뚫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는 말로 축약할 수 있다.
4.
얼마 전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의 글을 되밟아 읽을 필요가 있다. 내 글이지만 정말 잘 썼다 싶은 것도 있겠고, 어떤 글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겠지만, 진짜 중요한 건 시간이 흐르면 내 글이 나와 분리된 생명을 갖는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글쟁이의 책임감"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 말이 가진 뜻 가운데 하나는 '글'이란 사진의 현상, 정착, 인화와 같이 한 번 고정되고 나면 말과 달리 그 상태에서 천년을 살 수도 있다. 만약 그가 진지한 글쟁이라면 그가 염두에 두어야 할 독자는 당장 1~2년 내에 내 글을 읽을 독자만이 아니라 100년 뒤에 혹시라도 내 글을 찾아 읽을지 모를 독자까지 마음에 품고 생각하며 글을 써야 한다.
그렇기에 글쟁이는 항상 반론에 대해 열려있어야 하고, 글은 반론에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일방적인 발화에 가까운 강연은 그 가능성에 대해 닫혀있는 편이다. 일단 '말로 먹고 살기'는 연극과 같은 비슷한 일종의 유희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화자가 말하고 있는 동안엔 끊기가 어렵고, 지나간 뒤엔 재연하기가 어렵다. 기술이 발달해 녹화같은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때는 발화자가 이미 사라진 뒤이며 '말로 먹고 살기'는 즉흥적인 것이기 때문에 글과 다르다.
만약 누군가 정말 위대한 작가 또는 글쟁이를 꿈꾼다면, 100년 뒤 내가 이 세상에 없을 때, 내 글에 반론을 제기하거나 반문할지 모를 독자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자신이 없는 글은 쓰지 않게 될 것이다. 이건 나에게도 역시 해당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