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와 관련한 역사적인 명연설은 모두 추도식 연설에서 등장했다. 기원전 431년 페리클레스의 전몰자 추도연설과 1863년 11월 19일 남북전몰자가 묻힌 게티즈버그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행한 게티즈버그 연설이 그것이다.
먼저 페리클레스의 연설 내용 중 핵심적인 부분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정치체제는 이웃나라의 관행과 전혀 다릅니다. 남의 것을 본뜬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남들이 우리의 체제를 본뜹니다. 몇몇 사람이 통치의 책임을 맡는 게 아니라 모두 골고루 나누어 맡으므로, 이를 데모크라티아(민주주의)라고 부릅니다. 개인끼리 다툼이 있으면 모두에게 평등한 법으로 해결하며, 출신을 따지지 않고 오직 능력에 따라 공직자를 선출합니다. 이 나라에 뭔가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서 인생을 헛되이 살고 끝나는 일이 없습니다.(…)실로 우리는 전 헬라스의 모범입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소크라테스는 명연설로 손꼽히는 페리클레스의 연설에 대해 매우 냉소적인 비판을 보냈다. 그 내용과 이유에 대해서는 『메넥세노스』에 엿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페리클레스가 이 연설 속에 내비추고 있는 아테네와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을 경계했다. 페리클레스는 민주주의자였을지는 몰라도 아테네 패권주의자이기도 했다. 페리클레스의 아테네에 대한 자부심은 너무 지나쳤고, 그리스에 대한 아테네의 패권의식을 숨기지 않았기에 스파르타를 자극해 결국 그리스는 같은 민족(헬라스)끼리 피가 피를 부르는 27년간의 잔혹한 내전[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BC 431∼BC 404년)]을 치러야만 했다.
그리스‧페르시아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결성되었던 델로스동맹(아테네)과 펠로폰네소스동맹(스파르타)은 27년의 내전 기간 동안 점령한 폴리스 내의 도시 남성들에 대한 학살, 포로 학대(포로로 잡힌 이들의 팔을 자르거나 굶겨 죽이거나 익사시키는 등), 영유아 살해, 도시 전체의 황무지화, 도시 내 파벌간의 학살 등으로 그리스 민주주의를 크게 훼손시켰고, 결국 테베에게 굴복당한 뒤 다시 북방에서 일어난 마케도니아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아테네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졌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게티즈버그 국립묘지는 노예해방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공화당의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노예제도를 지지한 미국 남부의 7개주가 독립을 선언하였고, 연방분리파와 미합중국 연방정부 사이에 치러진 5년여의 내전(1861~1865)이었다. 남북전쟁 이전만 하더라도 미합중국은 견고한 국가의 틀을 구축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전쟁의 초기만 하더라도 이 전쟁은 백인 시민만의 전쟁이었다가 전쟁이 교착되고, 장기화되면서 북군(연방정부)가 흑인 노예들까지 전쟁에 참여시키면서 전쟁의 양상이 변화하게 되었다.
그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전투가 펜실베이니아 주 게티즈버그(Gettysburg)에서 벌어진 게티즈버그 전투였다. 남북 양측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한 혈전으로 치러진 이 전투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전사자들은 그들이 죽은 땅에 곧바로 묻혀야 했다. 1863년 11월 19일, 링컨 대통령은 불과 266개의 단어로 된 2분간의 짧은 연설을 했다. 당시 누구도 이 연설이 민주주의를 기리는 명연설로 오랫동안 기억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잘 알려진 바대로 링컨은 변호사였지만, 눌변이었다.
“우리는 오늘 정부군과 남부군이 내전으로 인해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구하려다가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마지막 안식처로서 그 전쟁터의 일부를 바치고자 이 자리에 왔습니다.
우리가 하려는 이 일은 너무나 적절하고 타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더 크고, 엄밀한 의미에서 살펴보면 우리는 이 땅을 봉헌할 수도 없고, 우리가 신성하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싸운 용감한 사람들, 전사자, 생존자들이 이 땅을 이미 신성한 곳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중략>…… 우리는 명예롭게 죽어 간 분들이 마지막 신명을 다해 이루고자 했던 대의에 더욱 더 헌신할 수 있는 커다란 힘을 그분들로부터 얻고, 그분들의 죽음을 결코 헛되이 하지 않겠다고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함으로써, 우리 앞에 미완으로 남아 있는 위대한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헌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처럼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일 때, 신(神)의 가호 속에서 이 나라는 새롭게 보장된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는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첫째, 그는 승리의 전환점이 된 곳에서 승리에 들뜨거나 도취하지 않았다. 둘째, 그는 정부군뿐만 아니라 반란군이라 할 수 있는 남부군 병사의 영혼에 대해서도 구분 없이 함께 슬픔을 표시했다. 셋째, 그 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아 완성하지 못한 민주국가를 이룩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이 묘지를 바라보며 그 뜻을 언제나 새롭게 다짐해야 한다는 거룩한 맹세였다.
페리클레스의 연설과 비교하자면 링컨의 연설이 훨씬 더 보편타당한 민주주의 국가의 참모습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전쟁을 혐오하고, 생명을 존중하며, 평화를 지향하는 민주주의 국가의 이상이기도 하다. 물론 페리클레스의 연설도 기원전 431년에 행한 민주주의에 대한 연설이란 점에서 충분히 훌륭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2천 6백여 년 전 노자가 저술했다는 유일한 책인 『도덕경』에 등장하는 노자의 전쟁관을 생각해보더라도 페리클레스는 다소 쫌생이이거나 패권론자의 모습임에 틀림없다고 여겨진다.
“전쟁은 사람을 많이 죽이는 것이기에 슬피 울어 애도해야 한다. 설혹 전쟁에서 승리했다해도 상례로서 처신해야 한다(殺人之衆, 以哀悲泣之, 戰勝以喪禮處之).”
노자의 말은 놀랍게도 링컨이 게티즈버그에서 행한 연설 내용과 놀랍도록 흡사하다. 오늘날 남북한은 한국전쟁 희생자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이 시점에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전쟁은 미소열강이 '제3차 세계대전'을 피하기 위해 한반도를 비롯해 제3세계 여러곳에서 벌인 전쟁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외세의 탓으로만 돌리지 말자. 5천년 역사만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 5천년간 한반도 일대에서 하나의 민족을 형성하고 살아왔던 남북한민족이 외세에 의해 원치 않는 분단상황을 맞이했고, 그 분단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타협에 실패한 결과가 내전이기도 했다.
누가 먼저 침공했는가? 물론 그것 역시 중요하기는 하지만, 남과 북,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란 방식의 이항대립적인 이분법을 넘어 새로운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이 전쟁의 성격과 희생자들에 대한 남북한 양측의 태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 역사는 북에 의한 남침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관계의 질적인 변화를 시작하여도 좋지 않을까.
오늘 우리는 드디어 역사에 기념할 만한 정치적 추도사를 획득했다. 대통령의 기념사가 기념될 만한 역사의 일부가 될 것이다. 물론 나는 그리되길 바란다. 그러나 역사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5.18추도사가 역사적인 기념물이 되기 위해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노력이 그만큼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논어(論語)』 「안연(顔淵)」편에 보면 “사민여승대제(使民如承大祭)”라는 말이 있다. “사람을 부릴 때는 큰 제사를 받드는 것처럼 하라.”는 내용이다.
대통령은 5.18유가족의 추모사 이후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예정에도 없던 포옹과 위로를 보냈다. "울지 마세요. 기념식 끝나고 아버지 묘소에 참배하러 같이 갑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위로와 약속은 지켜졌다. 그는 1980년 5.18을 2014년 4.16으로 연결해냈다. 대통령은 진도 팽목항의 어머니들에게 5.18의 어머니들이 보낸 메시지를 기념사를 통해 전했다.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 이것은 역사 속의 광주를 오늘의 광주로 소환하는 작업이며 오늘의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또한 그는 박관현, 표정두, 조성만, 박래전 열사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다.
이로써 5월광주의 정신은 '국민주권'의 정신이 되었고, 이 나라 민주주의의 절대정신이 되었다.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인임을 선언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의 뜻을 받드는 정부가 될 것임을 광주 영령들 앞에 천명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대한민국이 새로운 대한민국입니다."란 말은 앞으로 우리가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말이다. "상식과 정의 앞에서 손을 내미는 사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미래를 향해 진보하는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