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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No.240> 대통령의 휴가와 독서
대통령이 되고나면 그가 이전에 어떤 일에 종사했든지 간에 국가공무원 신분이 된다. 공무원 즉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대통령 역시 국가공무원 복무규정 제15조에 따라 적정한 휴가일수를 보장받게 되어있다. 다만, 인사혁신처장이 정하는 공무원 경력 이외의 유사경력이 있는 경우에는 2년 미만의 재직기간별 연가 일수에 각각 2일을 더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다시 말해 대통령이 된 이후의 근무일수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유사경력’까지 포함시켜 휴가일수를 더해준다는 의미이다. '유사경력'을 포함한 재직 기간에 따라 최소 3개월 이상 6개월 미만 3일부터 최대 6년 이상으로 21일까지가 대통령 휴가의 최대치이다. 이 기간은 군 복무 기간도 포함해준다. 다시 말해 대통령도 연차가 있다.
16년간 독일과 유럽을 이끌었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전 총리는 휴가를 철저하게 챙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한 번은 총리로 재임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느냐고 묻자, “하루 한 번 웃고 휴가를 절대 뺏기지 않는 것.”이라고 답했다. 외국 정상들은 대체로 업무는 업무, 휴가는 휴가로 분리되어 장기간 휴가를 즐기는 편이지만,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휴가를 제대로 쉰 경우가 많지 않다. 이른바 ‘휴가징크스’란 말까지 있을 정도다. 이것은 대통령이란 직업이 그 정도로 ‘극한직업’이란 의미이다.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들도 대부분 ‘7말8초’ 기간에 휴가를 갔는데, 문제는 휴가 때마다 대형사건·사고 등 악재가 터지는 바람에 간신히 얻은 휴가마저 취소하거나 관저에서 책을 읽는 다소 어정쩡한 모습의 휴가를 보내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국정 상황과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사실, 대통령의 여름휴가는 향후 국정 운영의 구상 기간이기도 했다. 이처럼 대통령의 여름휴가가 국정 운영을 위한 구상 기간처럼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 때부터의 일이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청남대에서 여름휴가를 보낸 직후 돌아와 ‘금융실명제법’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이것이 이른바 ‘청남대 구상’이란 말로 알려지면서 여름휴가 이후 대통령 발 청와대의 발표가 중요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정 초반의 인기가 무색하게 김영삼 대통령은 이후 여러 악재와 실정이 겹쳐지면서 여름휴가를 제대로 쉬지 못하게 되었다. 1996년 7월 청남대 휴가 중 경기도 파주·연천의 집중호우 같은 사건들로 당시 휴가 하루 만에 청와대로 복귀해야만 했다.
그러나 역대 대통령들 중 휴가 복이 가장 없었던 사람들은 공교롭게도 민주당 출신 대통령들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취임 초기엔 IMF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임기 말에는 자식들의 비리 문제로 휴가를 반납해야만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제대로 쉬지 못한 대통령이었다. 2004년엔 탄핵 정국으로, 2006년엔 북한 미사일 발사 위기로, 2007년엔 한국인 피랍사건으로 임기 5년 동안 휴가를 단 두 번밖에 가지 못한 대통령이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2017년엔 휴가 가기 하루 전에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실험을 실시했기 때문에 가지 못했고, 2019년엔 일본의 수출규제 문제로, 2020년엔 폭우 때문에, 2021년엔 코로나19 펜데믹으로 휴가를 보류해야만 했다. 물론,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도 금융위기, 메르스, 세월호 사건 등으로 휴가를 떠나지 못한 적이 있다.
유난히 휴가 복이 없었던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어렵사리 얻은 휴가 기간 동안에도 항상 독서를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소문난 다독가였던 세 명의 전임 대통령들은 휴가 때마다 읽은 책들을 추천 도서 형태로 소개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자신의 국정철학과 정치적 메시지를 독서한 책에 담아 우회적으로 전달했기 때문에 이를 ‘독서 정치’라 불렀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은 소문난 다독가답게 휴가 때마다 책을 바리바리 싸가는 것으로 유명했다. 1999년 여름휴가 때 피터 드러커가 쓴 『지식자본주의혁명』(21세기북스), 『미래와의 대화』, 허세욱 교수가 중국고전산문 83편을 강독한 『배는 그만두고 뗏목을 타자』(학고재) 등을 읽었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소문난 다독가이지만, 동시에 한 권의 책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는 독서법으로 유명했다. 그는 50년간의 현대 한국 정치의 보수적 기원과 과제를 담은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후마니타스), IBM을 회생시킨 미국 기업인 루이스 거스너의 경험담을 담은 『코끼리를 춤추게 하라』(북앳북스), 『주5일 트렌드』(21세기북스) 등을 추천했다.
주5일 근무제는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의 공약 사항이었고, 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지난 2003년부터 많은 논란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순차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 『주5일 트렌드』는 2003년에 출간되었으니 노무현 대통령은 독서 이전부터 주5일제 실시에 대한 신념이 있었던 것이지만, 책을 통해 자신의 철학과 정책을 대중에게 알리려 했던 것이다. 그는 정치인으로는 특이하게도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승산) 등 과학과 기술 분야에 걸친 다양한 방면의 책을 읽었는데, 그 시절 ‘황우석 신드롬’ 등으로 잘못 전개된 측면이 있긴 하지만, 역대 대통령들 중 이 방면에 대한 관심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던 대통령이 아니었을까 싶다. 2004년 국회탄핵소추로 직무가 정지되었을 당시엔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으며 탄핵 심판 결과를 기다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KBS 시사교양 프로그램 제작진이 집필한 『명견만리(明見萬理)』, 소설가 한강이 쓴 『소년이 온다』 등을 권했는데,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9년 청와대 참모진들에게 리처드 탈러의 베스트셀러 『넛지』(리더스북)를 추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이즈베리)를 e북에 담아간 것으로 보도되면서 불법복제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당시엔 이 책이 전자책으로 출간되지 않았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재임 당시 독서목록이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어서 대통령이 뭘 읽고 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2015년 여름휴가 때는 임마누엘 패스트라이쉬(이만열) 교수의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21세기북스)이란 책을 청와대 참모들에게 추천했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심판을 기다리던 중에는 관저에서 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혁명』(메가스터디북스)을 읽었다고 한다.
19세기 영국의 빼어난 정치인이자 네 차례에 걸쳐 총리를 지낸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나는 뜻밖에 생긴 1분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언제나 작은 책을 주머니에 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유명한 독서광이었고,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해마다 자신이 여름휴가 때 읽었던 독서리스트를 발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퇴임 이후에도 여전히 해마다 자신의 SNS에 여름 독서리스트를 발표해오고 있다.
아시는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집권 후 독서리스트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다만, 지난 2023년 2월 한 참모회의에서 권석준 교수의 『반도체 삼국지』를 언급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같은 해 3월 <오마이뉴스>가 대통령비서실을 상대로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제출받은 답변서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이후 10개월(2023년 3월 현재까지) 단 한 권의 책도 구입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후에는 구입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무더운 여름날, 회사에 밀린 일들을 하기 위해 나오면서 수많은 정치인과 언론인의 통화 내역을 검찰이 사찰했다는 뉴스에 분개하면서도 소심하게 대통령이 어떤 책을 읽고 살고 있는지가 궁금한 내가 한심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