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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고사라는 함정
십여 명의 교사들이 줄줄이 해직되고, 파면당하는 사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또 한 차례의 전국적인 일제고사가 치러졌습니다. 사실 제 또래에서는 일제고사보다 일제고사를 거부하는 풍경이 도리어 낯선 풍경입니다. 시험을 거부하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고 생각하는 편에 가깝다고 해야겠지요. 제 생각에도 일제고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국민 대다수가 아니라 소수일 듯 합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관심하거나 심드렁한 편이겠지요. 시시때때로 바뀌지만 바뀔 때마다 상황이 더 나빠지기만 하는 교육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말하는 것이 참 피곤한 일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 ‘88만원 세대’란 말이 인구에 회자되었는데, 지금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정부정책에 빗대어 ‘인턴 세대’란 신조어가 출현했습니다. 이런 신조어까지 나오게 된 이유는 비록 88만원 세대는 임금도 적고, 비정규직이지만 그나마 1년여 정도는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던데 반해 인턴 세대는 임금이 적은 비정규직이란 점뿐만 아니라 근무 기간조차 6개월 남짓하게 더 짧아졌기 때문이랍니다. 정부가 기업체에 인턴 채용을 강요하는 바람에 그나마 있던 정규직 일자리마저 인턴 채용으로 줄어들어 올해는 기업의 신규직 채용 공고마저 품귀 현상을 빚을 만큼 급격하게 줄고 있는 실정이라 하지요.
이처럼 직장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상황에서 뛰어난 학업 성취만이 앞으로 살 길이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할 겁니다. 거기에 더해 영어만이라도 잘 하도록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지 않을리 없겠지요. 솔직히 이 나라가 지긋지긋해서 자식이라도 해외 이민을 보내고 싶은 심정인데, 해외이민이라도 보내려면 영어만이라도 원어민 못지않게 잘 할 수 있게 해주고 싶겠지요. 영어라도 잘한다면 그 힘들다는 이민 생활도 좀 낫지 않을까 싶은 거겠지요. 그것이 부모된 사람의 당연한 인정이니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아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에 품은 심정은 다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일제고사가 다소 무리하게 추진되고 있고, 이외의 다른 일도 탐탁치는 않아도 그렇다고 공부하는 학생이, 가르치는 교사가 일제고사를 거부할 것까지야 뭐 있을까 정도의 막연한 생각들, 나도 예전에 그런 것 다 치르고 살았는데 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래서 일제고사를 하긴 하되 합리적으로 잘 해보자, 평가 자체를 거부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냔 생각, 무조건 거부부터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바로 거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널 서울부터 줄 세우면 어디쯤 있을 것 같니?
과연 일제고사는 정부나 교육당국이 말하는 것처럼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평가하는 정당한 평가 방법일까요? 여러분들도 모두 어려서부터 전국적으로 일제히 치러지는 시험을 이렇게 자주 봤나요? 지나간 과거는 미화하는 버릇이 있다지만 우리 솔직해집시다. 제가 초등학교 때는 일제고사 같은 거 본 기억이 없습니다. 제가 일제고사를 본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모의고사를 본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것도 국가가 주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가 시기별로 여러 모의고사 출제 회사들이 만든 시험지를 구입해서 치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고교평준화가 개별 학생들의 특성을 무시한 마구잡이 평등교육이며 이건 보수세력들이 말하는 것처럼 잃어버린 10년의 결과물, 문제 있는 좌빨들의 정책이었다고요? 아닙니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과거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 입학할 때도 시험을 치르던 시절이 있기는 했습니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폐지한 사람은 김대중도, 노무현 대통령도 아닌 박정희 대통령이었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를 펼쳐보면 교실의 초등학생들이 시험지옥에서 벗어났다고 환호하는 광경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일제고사는 일제고사를 추진하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교육의 정당한 평가가 될 수 있을까요? 일제고사를 통해 개별 학생들에게 맞춤교육이 가능해질까요? 모의고사를 치르고 성적표가 나온 날이면 어른들은 절 불러다 훈계하면서 이렇게 말씀하곤 했습니다. "서울부터 성적순으로 나란히 줄을 세워 경부고속도로에 세우면 넌 어디쯤 서 있을 거 같니?"라고요. 일제고사에서 말하는 평가란 사람의 가치를 이렇게 평가하는 걸 의미합니다.
일제고사를 평가라고 부르는 이면엔 교육이란 시험만 잘 치르면 되는 것이란 생각, 아이들의 점수가 곧 그 아이의 가치라는 발상이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일제고사 점수로 평가되는 당신의 아이들이 지닌 가치는 단순히 서울부터 부산까지 아이들을 일렬로 줄 세워 보는 평가밖에 될 수가 없습니다. 나 이외의 모든 아이들이 이른바 '엄친아(엄마친구아들)'가 되는 것이죠.
예전에 학교에 입학하고 반배정고사가 끝난 뒤, 키 순서대로 복도에 줄을 섰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과 같은 반 급우들에게 조금이라도 키가 커 보이고 싶어서 슬그머니 까치발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키 순서대로 줄을 세우는 건 칠판이 잘 보이도록 하려는 목적이라도 명확하니 차라리 수긍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아이들을 줄 세우기 위해선 그 기준이 키크기처럼 객관적으로 수치화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고사 결과를 통해 아이들을 수치화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나올 수 있는 시험 문제의 유형은 뻔합니다. 일등과 꼴등을 구분하기 위해선 객관식 문제, 그것도 수많은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니 변별력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선 시험 문제의 난이도가 조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사교육에 나서면 아이들 등위가 오를까?
변별력을 강화하면 까치발을 해서라도 뒤에 서고 싶은 아이들처럼 일제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선 사교육 시장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것은 필연이지요. 좀더 냉정하게 말해 일제고사에서 평가당하는 것이 아이들만은 아닙니다. 일제고사를 통해 평가당하는 것은 학부모들의 경제력, 즉 사교육을 견뎌낼 수 있는가를 측정하는 내구도 평가인 것이죠.
예전에 꽤 많은 사람들이 읽었던 책 중에 『세계가 만일 100명이 사는 마을이라면』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환경학자인 도넬라 메도스(Donella Medows) 박사가 신문에 연재하던 칼럼 <지구 마을>의 일부를 책으로 엮은 것이죠. <지구 마을>에 거주하는 인류를 100명이라고 했을 때 "마을에 사는 사람들 100명 중 20명은 영양실조이고, 1명은 굶어죽기 직전이지만 15명은 비만입니다. 이 마을의 모든 부 가운데 59%를 6명의 사람이 독차지했고, 그들은 모두 미국 사람입니다. 74명이 39%를, 20명이 겨우 2%만 나눠가졌습니다. 이 마을의 모든 에너지 중 80%를 20명이 사용하고 있고, 나머지 80명이 20%를 나누어 쓰고 있습니다."란 내용이었지요.
만약 대한민국이란 마을에 거주하는 국민들을 100명이라 하고 똑같은 조건에 처해 있다고 가정하여 일제고사를 통해 성적이 떨어진 아이들의 성적을 높이기 위해 100명 모두가 똑같이 사교육을 택한다면 1등 아이는 여전히 1등을 할 테고, 100등 아이는 여전히 100등을 할 겁니다. 당연히 우리는 모두 같은 조건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육에 좀더 많은 돈을 투자한 부모의 아이들이 사교육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겁니다. 좀 과장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것이 대한민국 교육의 현실이란 걸 부인할 순 없을 겁니다. 등수란 상대적인 것이고, 이를 통해 올라간 학업성취도란 결국 입시기계의 그것일 뿐 온전한 배움이 될 수 없겠지요.
글로벌한 경쟁에서 글로벌한 인재를 육성한다는 건, 다른 말로 하자면 세계시민의 자질을 키우는 일이기도 할 겁니다. 한국에서 뛰어난 학생들이 외국에서 교육받을 때 가장 많이 지적받는 부분은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탁월하지만 스스로 문제를 찾아 그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다시 말해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입식 교육, 입시 위주의 교육에 치중한 결과입니다. 어떤 이는 한국의 과학자가 노벨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이처럼 스스로에게 문제를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입시에 특화된 학생으로 키워진다는 말입니다.
학생들의 학업을 증진시키기 위해 일제고사를 치른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주로 정부와 교육당국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지요. 여기서 우리 다시 한 번 냉정해져 봅시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당장 우리들 자신의 체험과 기억을 되살려 보면 알 일입니다. 학교에서 언제 한 번이라도 성적 나쁜 아이, 가정환경이 좋지 않은 아이, 부모가 학업에 신경 쓸 수 없는 아이에게 다정했던 적이 있었나요? 성적이 좋지 않은 아이들이 언제는 시험을 적게 보았기 때문에 성적이 나오지 않던가요? 일제고사는 사교육비만 늘릴 뿐입니다. 평가하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특목고, 자사고 아이들에게 가산점 주려고 없던 제도도 만들고, 있던 규칙도 무시하는 것이 현재 대학 당국의 행태입니다.
특목고, 자사고에 아이들을 진학시키기 위해 필요한 건 뭡니까? 아이들의 성적이요? 성적은 무엇으로 올릴 수 있을까요? 사교육? 사교육을 하려면 뭐가 필요한가요? 바로 ‘돈'입니다. 지난 2007년 초등학생들의 학업성취도 평가 뒤 초등학생들을 심정을 묻는 설문조사가 있었습니다. '죽고 싶다'고 응답한 아이가 13.2%, '한심하다'고 응답한 아이가 34.9%, '아무 상관없다'고 응답한 아이가 27.0%, '자랑스럽다'고 응답한 아이가 24.9%였다고 합니다. 지금 일제고사의 트랙 위에 올라선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고, 아이들을 스스로 죽고 싶다, 한심하게 여겨지도록 만드는 것도 바로 당신입니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통해 본 우리 교육의 현실
우리 교육 현실에 대한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얼마 전 우리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아깝게 세계 2위를 했습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비롯한 국제대회가 끝날 때마다 입을 맞춘 듯 빈번하게 나오는 이야기가 '우리 스포츠의 저변이 너무 얕다. 엘리트 중심의 스포츠'란 지적입니다. 한 편으론 우리 야구가 단기전 승부에선 세계 2위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한 ․ 미 ․ 일 범국가 대항 프로리그를 개최해도 현재의 순위를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해선 의문이란 지적도 있습니다. 인생이 그러하듯 국가 간 서열도 단기전 승부로 판가름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그 이유로 한국 야구의 뿌리이자 젖줄인 고교야구팀 수가 나날이 줄고 있어 이제 50여개 남짓한 현실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우리에 비해 일본의 고교야구팀 수는 4,000여개가 넘는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단순히 수치만 비교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그런 이야기들을 듣노라면 솔직히 그래서 뭐 어쩌잔 말이냐고 되묻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적은 숫자의 야구팀으로도 이렇게 좋은 성적이 나왔다면 비용 대 효과 면에서 선전한 것이고, 그 자체로 대견하다고 해야할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고교야구팀이 나날이 줄어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원인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학교 운동부가 스포츠맨십을 배우고 스포츠를 즐기는 곳이 아니라 일종의 직업교육소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비록 학교 차원에서 만들어진 운동부이긴 하지만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거의 전적으로 학교 동문들로 구성된 후원회와 학부모들의 사비를 통해서만 팀이 꾸려지고 있기 때문이죠. 그들에게 운동장은 이미 직장이고, 매순간 임하는 경기는 적자생존의 법칙으로 얼룩진 치열한 전쟁터입니다. 토너먼트 식으로 진행되는 대회에서 4강에 들지 못한다면 대학 진학에도 차질을 빚게 되고, 프로팀에 진출하기도 어렵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학교 운동부는 의대에 진학한 모든 학생이 의사를 꿈꾸듯, 운동을 시작한 학생은 축구나 야구 같은 운동으로 인생의 승부를 걸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구조입니다. 과연 한 명의 어린이가 의사되는 것이 힘들까요? 프로축구선수 되는 일이 힘들까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간단한 확률게임입니다. 현재의 학원스포츠는 우리 교육이 그러하듯 아이들을 어려서부터 경쟁하는 기계, 운동하는 기계, 시험 치르는 기계를 키우는 시스템입니다. 그 좁은 경쟁의 문을 뚫고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해마다 각종 대회가 심판 판정과 코치의 가혹행위, 금품수수 같은 사건들로 물의를 빚곤 합니다.
어떤 이는 우리나라 고교야구부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 대안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저변 확대가 필요하다는 이유이겠지요. 하지만 저변만 늘어난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모두가 대학에 갈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나요? 그게 대안일 수 없는 이유는 현재의 현실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곡된 학원스포츠, 왜곡된 학교교육
선진국일수록 우리처럼 왜곡된 학원스포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클럽이나 사회체육시설을 통해 스포츠를 즐기고, 그 가운데 두각을 나타내는 이들이 국가대표가 됩니다. 물론 이들은 대학을 나오지 않고도 직장을 얻을 수 있고, 또 나름대로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기도 합니다. 우리처럼 학창 시절에 운동부였다고 해서 미리부터 ‘돌대가리’ 취급받으며 무시당하는 일도 없겠지요. 처음부터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대학졸업장이 없으면 직장을 구하기 힘들고, 요즘은 대학졸업장이 있어도 일자리를 얻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오로지 운동만 했기 때문에 운동 이외에 다른 것은 아는 바도 없고, 취업시장에서 신체 능력 이외에 경쟁력이 갖기도 어렵습니다.
모두가 경쟁을 향해, 당장의 성과물을 향해 치닫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운동과 학업 두 가지 모두를 병행하기란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지요. 1년에 서너 차례씩 치러지는 고교대항 야구시합이 있고, 이 시합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야만 좋은 대학, 좋은 팀으로 진출할 수 있는 현실 속에서 학업까지 병행할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좋은 대학, 좋은 팀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나머지 운동선수들은 더 이상 운동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더이상 운동을 할 수 있는 길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생은 아직 길게 남아있습니다. 그런 이들이라면 당연히 학교운동장에서 땀 흘리고 고생했던 과거가 후회스럽지 않을까요.
자, 이제 어째서 WBC야구를 통해 우리 교육의 현실을 엿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간단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야구’를 모두 ‘입시’로 바꿔 생각해보면 됩니다. 단순히 학교 당국이나 부모의 의지만으로 야구부가 유지될 수 있을까요? 지금처럼 평생 야구, 아니 입시만을 생각하고 입시에 특화된 교육을 받고, 입시 적응력을 높이기 위해 사교육으로 청소년기를 보낸 뒤 이미 서열이 결정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대학들의 순위에 따라 소수만이 원하는 명문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환경이 지속된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될까요? 최동원, 선동렬, 이승엽 같은 뛰어난 선수 뒤에는 지금 교육열에 불타는 학부모들을 뛰어넘는 부모의 헌신이 있었음을 여러 매체들을 통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대학서열로 줄을 세워 평생 단 한 번의 입시로 혹은 경기 입상 성적으로 평생의 순위가 매겨지는 시스템 속에서 더 이상 경기에 나설 수 없는 선수들은 어디로 가야하나요? 모두가 이승엽, 박태환, 김연아가 될 수 없다는 건 굳이 인생을 다 살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자명한 현실이지 않습니까. 자식을 가진 학부모는 물론 입을 가진 이들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경쟁 위주, 성적 위주의 학원 스포츠를 비판합니다. 당장 대학에 보내기 위해 눈앞의 성적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기본기를 갖추고, 응용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세계무대에서 한국 축구가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한국 축구의 고질적인 병폐인 문전 처리 미숙도 역시 기초를 다져야 할 시기에 당장의 승패와 성과에 연연한 결과라고들 하지요.
기본기가 부족하고, 상상력이 부족한 것은 학원스포츠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건 우리 교육 현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학원스포츠의 문제점과 원인에 대해서는 이처럼 일치된 의견을 보이면서도 학교 교육에 대해서는 여전히 입시경쟁력, 학업성취도만이 대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의 교육현실은 마을 앞에 개울이 흘러 외지(外地)로 통하기 어려우면 각자 자기 돈으로 알아서 다리를 놓고, 집 앞 도로가 비포장이면 자기 돈으로 신작로를 닦으라는 식입니다. 만약 이 같은 사업들이 전기나 수도처럼 국민의 편리와 복리증진을 위해 필수적인 사업이며 국가가 해줘야 마땅한 일이라면 또한 이것이 공공복리의 증진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교육 분야에서도 이루어져야 마땅한 정책이 아니겠습니까.
대한민국의 교육철학은 무엇인가?
대한민국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경제적 부의 원천이 교육에서 왔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도 대단히 높은 교육열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건국 이래 어쩌면 오래 전 '국민교육헌장' 같이 일제하 천황의 교육칙어를 본따 만든 국가주도의 교육철학이 수립되었던 경험 이후 한 번이라도 교육이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느냐는 고민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다못해 봉건전제왕정이었던 조선의 교육조차 먼저 인간, 사람이 되는 교육을 표방했습니다. 유교 경전 중 하나인 『대학(大學)』 첫 머리에 나오는 말이 그것입니다.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民하며, 在止於至善하니라.
큰 가르침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과 하나 되는 것에 있으며, 지극히 선한 상태에 머무르는 것에 있다.
"먹이기만 하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돼지로 사귀는 것이고, 사랑하기만 하고 공경하지 않는 것은 짐승으로 기르는 것(食而弗愛 豕交之也, 愛而不敬 獸畜之也)"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가”를 묻지 않는 교육이란 먹이기만 하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사랑만 하고 공경하지 않는 것은 짐승을 기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입니다.
교육의 목적 중 하나는 분명히 의식주를 마련할 수 있는 수단(지식과 기술)을 마련하도록 뒷받침하는 겁니다. 우리의 육체는 물질이며 다른 물질을 섭취해야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인간 사회는 제한된 먹이를 구하기 위하여 서로 투쟁하는 장소가 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인간을 인간이게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희구하는 존재들입니다. 만약 그와 같은 존엄에 대한 인간의 추구가 상실된 채 우리 사회가 단순히 약육강식의 원리로만 지배된다면 그것은 정글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도둑질, 살인, 방화 같은 범죄들이 사회가 법으로 죄라고 규정했다는 이유만으로 범죄가 된다면 검거되지 않은 범죄자들은 희희낙락할 것이며, 체포된 범죄자들은 단순히 운이 나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겠죠. '죄'라는 것은 남이 죄인이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죄'로 느끼는 것이고, 치욕이란 남이 손가락질하며 욕하기 전에 먼저 제 스스로가 욕보이는 법입니다.
육체의 안일과 편리를 위해 추구해온 모든 것들은 육체가 사라진 순간 그 가치와 의미가 사라지게 됩니다. 제한된 자원과 조건 속에서 자신이 육체적으로 추구해온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질 때 인간은 무엇으로 스스로의 존엄을 세울 수 있을까요? 이미 가진 자들, 부모에게 물려받은 여건과 환경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평생 88만원 세대, 인턴 세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포기할 수밖에 없고, 포기당해야 하는 사람은 그동안 온갖 괴로움과 고달픔을 참고 견디며 노력해온 공부의 대가가 과연 무엇인가? 묻고 싶지 않을까요.
사실 삶의 이력, 일생이 소소한 일들이야 예측하기 어렵지만 큰 틀에서 예견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철이 들고, 세상물정을 조금 아는 나이가 되면 누구라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사회공동체가 특히 교육이 이와 같은 일생을 조금이라도 예견할 수 있다면 당연히 “나는 무엇 때문에 살며,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다못해 전제왕정 치하의 백성들도 받았던 교육, 교육이 지닌 철학이 그러할진데, 장차 민주공화국의 시민이 될 사람들을 키워내는 교육에 아무런 철학도 없이 기껏해야 경쟁만을 부추기는 교육이라면 그 사회의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1%의 귀족들을 위한 포커 판, 입시
현재 우리의 교육은 대한민국 1%의 사람들이 귀족으로서의 기득권을 자연스럽게 누리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교육을 방편삼아 포커 판을 벌여놓은 것과 같습니다. 사교육 시장의 판돈을 올리며 배팅 경쟁을 강요하며 돈의 레이스를 부추깁니다. 이 포커 판에 끼어들 기 위해서는 그만한 판돈을 걸고, 따라오던지 아니면 아예 카드를 엎으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교육을 통해 없는 집 자식이라도 신분상승의 기회가 있었으나 이제는 유일한 기회였던 학벌조차 '돈 놓고 돈 먹기' 경쟁을 통해 자본주의식으로 정당하게(?) 가져가라고 요구하는 것이죠.
그들은 말합니다. 글로벌 무한경쟁의 시대, 천연자원은 부족하고 인력만이 자원인 나라에서 우수한 인재를 육성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고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은 정말 인력이 자원이고, 우수한 인력이 국가자원이라면 말입니다. 그 우수한 인력이란 것이 아빠와 엄마의 재력에 따라 유전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면 국가는 당연히 모든 인재들에게 균일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국가가 국민들이 사교육에 들이는 비용을 절감한다는 차원에서라도 소득에 따라 세금을 거둬 균등한 교육기회를 제공하고, 교육에 소요되는 모든 재원을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학의 반값 등록금이 국고보조금 5조원이면 된다는데 부자들에게 감세해주었던 것만 그대로 다시 거둬 무상교육 서비스에 투자했다면 이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지 않았겠습니까. 그랬다면 임실에서 성적 조작하는 일도, 고려대 수시사태 같은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현재와 같은 ‘승자독식사회’에서 일부만 승자가 되고, 나머지는 ‘쓰레기가 되는 삶’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앞서 저는 “먹이기만 하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돼지로 사귀는 것이고, 사랑하기만 하고 공경하지 않는 것은 짐승으로 기르는 것(食而弗愛 豕交之也, 愛而不敬 獸畜之也)”이라 했습니다. 우리 정부가 국민 알기를 돼지나 짐승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일제고사 같은 교육정책을 이처럼 무자비하게 밀어붙이지는 못할 겁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제고사를 통한 줄 세우기, 교육자금 동원경쟁력으로 키워진 입시기계들이 아니라 세계 시민으로서의 책임감과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갖춘 인재를 키워내겠다는 교육철학을 갖춘 정부, 모두에게 균등한 교육기회를 제공한다는 올바른 정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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