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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이후 밤늦게까지 뉴스 속보를 보고 읽고 해석하고 글 한 줄이라도 올려야겠다고 마음은 먹지만, 현실은 나에게 그럴만한 여유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다. 내란 상황이 지속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상 상황은 장소와 사람을 변경해 계속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내가 처한 여러 여건들 또한 그러하다. 당장 내란 사태 이후 이와 관련해 『황해문화』 특집 기획 전체가 변경되어 원고 청탁부터 모든 일이 뒤엉키고 시급한 상황이 되었다.
재작년부터 우리 새얼문화재단은 전체 직원의 본래 정원보다 2명이 부족한 상황에서 일하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닥치지만 경제적 어려움이 닥쳤을 때, 가장 먼저 손쉽게 절약하게 되는 것이 후원금이기 때문이다. 적은 인원으로도 작년, 재작년 진행해야만 했던 모든 사업들을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완결했지만, 그 과정에서 전체 직원들의 심신에 피곤과 피로가 가중되어 하나둘씩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병원을 두 군데씩 다니고 있다. 그래도 올 한해 잘 넘기면 또 어찌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대통령의 친위쿠데타 시도가 있었다. 처음에 한밤에 펼쳐진 소극(笑劇)처럼 여겨지던 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날이 갈수록 끔찍한 계획들을 은폐하고 있었으며 오랫동안 준비되었던 계획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의 무능과 무책임을 비판해왔는데, 이제는 윤석열과 그 일당의 무능함에 감사해야 할 상황이다.
비상계엄은 여러 기억들을 소환해냈다. 내 나이대의 사람들은 ‘국가폭력’ 상황을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기에 이르는 시기 내내 경험했다. 국가폭력이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폭력의 낙수효과’와 그 대상이 무차별적이라는 데 있다. 피해의 정도와 강도에서 다소 차이가 있을 뿐 국가폭력의 피해는 직간접적이라는 차이를 따지기 어려울 만큼 가해자는 물론 피해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깊은 상흔을 남긴다. 이런 사실은 학교 다닐 때 집단 체벌을 경험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이처럼 국가폭력은 사회 전체, 시민 모두에게 짙은 그림자와 상흔을 남긴다.
국가가 대놓고 국민에게 폭력을 휘두르면, 그 도구가 되는 군대, 경찰 조직 내부에서도 폭력이 정당화되고, 일상화된다. 그들이 가정이나 사회로 돌아와 다시금 폭력적인 아버지, 폭력적인 삼촌, 폭력적인 남성, 폭력적인 교사가 되고, 사회 전체에 만연한 폭력은 어린이,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다시금 축적된다. 이처럼 성장과정에서 축적된 국가폭력의 상흔들은 독소가 되어 우리의 정신과 감정을 병들게 한다. 이성복의 시(詩) <그날>의 한 구절처럼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앞서 윤석열과 그 일당의 무능함 덕분에 비상계엄이 실패했다고 말했지만, 사실 비상계엄이 실패한 원인은 비록 제한적이고 불충분한 민주화였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민주주의의 축적된 경험을 통해 우리 시민들이 권리 위에 잠자는 사람이 아니라 그 밤에 국회 앞으로 달려가게 만들었고, 비상계엄의 기억을 잊지 않았던 국회의원과 보좌관들이 몸을 사리지 않은 덕분에 헌정 질서의 위기를 극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뒤에 벌어진 일들이고, 사실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다.
이번 내란 사태 이후 한 군인이 광주 이후 군이 과거의 오욕을 씻어내기 위해 오랜 세월 노력했던 모든 노력이 한 순간에 수포로 돌아갔다고 울분을 토로하는 것을 보았다. 사실, 저와 같은 반성은 그 군인이 아니라 지금 ‘국민의힘’ 당에서 나왔어야 할 통탄이고 반성이었어야 한다. 12․12군사반란, 5․17쿠데타를 일으켰던 신군부의 민주정의당에서 3당 야합의 민주자유당(민자당), 차떼기 불법대선자금의 신한국당, 북풍조작 사건의 한나라당, 비선 조직에 의한 국정농단 새누리당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 동안, 당명을 바꾸고 당 대표를 바꿔가며 마치 흡혈귀처럼 신분을 세탁해 가며 끈질기게 생존해온 그들이 말했어야 한다. 이들이 이토록 기나긴 세월 동안 생존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랜 세월 김대중을 핍박했던 지역감정, 노무현도 극복하지 못했던 기득권 수구세력의 야합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당 정치에 갇혀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없게 만들었던 이 나라 정치구조에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책임은 우선 우리 기성세대의 탓이다.
그나마 이번 내란 사태에서 우리가 한 가지 얻은 것이 있다면, 난생처음 비상계엄을 경험한 젊은이들에게 이 정당의 본색이 만천하에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시켰다. 한겨울 광장에 모인 수많은 시민들이 이 나라를 정상적인 국가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광장의 언어, 민중의 희망은 이 나라 정치에 반영되지 못했다. 촛불이 횃불이 되고, 광장의 언어가 정치의 언어가 되어 현장의 분노가 일상의 민주화로 연결되지 못한 결과였다. 그러나 냉전수구세력이 이 나라의 주류 세력으로 해방 이후 현재까지 켜켜이 쌓아온 기득권의 역사를 한 순간에 모조리 변화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다시 광장에 모인 목소리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서도 그다지 낙관하지 못한다.
이미 나는 이 나라에, 사실은 더 나아가 인간 그 자체에 그다지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게 87년 12월 대선의 기억은 내가 바라는 세상과 현실의 놀라운 간극을 절망적으로 일깨워주었고, 이후 21세기가 된 오늘날까지 나는 거창한 희망이나, 섣부른 절망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최소한의 소망은 다만 한 가지, 그저 헌법이 정하는 대로 제대로 정상 작동하는 국가이길 바랄 뿐이다.
그러나 만약 이에 더해 한 가지를 더 소망할 수 있다면, 이제는 분단과 냉전, 국가폭력으로 병든 과거의 현실과 단호하게 결별하고 혐오와 갈등 대신 새로운 민주주의, 새로운 세계시민으로서 우리 사회가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는 정치와 문화를 만들어 가게 되길 바란다. 아주 오래 전 한 시인이 말했던 것처럼 모든 “껍데기”는 가고, “알맹이”만 남아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길 수 있는 새로운 변화가 이제 시작되길 바란다.
추신 : 삼가 제주항공 참사로 안타깝게 희생되신 분들의 명복을 빌며. 그 유가족들에게 애도의 마음을 전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