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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구두 | (2003-02-18 20:18:30, Hit : 14033, Vote : 22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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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indshoes.new21.o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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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No. 111. 김갑수의 클래식 음악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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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편지> 이번 호는 그냥 맘 편하게 남의 글을 퍼 나르는 것으로 대체하고자 합니다. 시인 김갑수는 음악을 취미 이상으로 즐기는 사람입니다. 과거에는 시인으로서만 알려져 있었는데, (<세월의 거지>란 시집을 상재해두고 있지요) 요새는 본업이랄 수 있는 시인으로서 보다는 음악 칼럼니스트 쪽으로 더 많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가 음악관련해서 펴낸 두 번째 에세이집이 <텔레만을 듣는 새벽에>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란 그의 첫 번째 책에 훨씬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책은 정말 좋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발췌한 내용은 두 번째 책의 것입니다. 클래식 음악을 처음 접하고자 하는 이에게 저자인 김갑수가 역시 음악 강상에는 왕도가 없다는 취지의 글을 편지 형태를 갖추어 만들어 낸 내용입니다. 솔직히 말이야 쉽지만 누군가의 친절한 가이드를 받을 수만 있다면 음악 감상의 질이 월등히 높아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앞으로 <문화망명지>에서 시간이 되는대로 이 부분에 대한 여러 가이드 자료들을 소개할 생각이긴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김갑수 시인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어 일 저지르기 전에 먼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소개하고 싶어지더군요.
오늘 로이터통신을 보니 지구 종말을 가리키는 시계가 이라크 전운이 고조됨에 따라 현재 11시 53분을 가리킨다고 하는군요. 만약 실제로 전쟁이 벌어지면 2분 더 당겨진다고 합니다. 종말의 시간이란 것이 이토록 위협적으로 느껴지는데 팔자좋게 음악 타령 하는 것 같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음악이 없는 세상이 과연 평화로운 세상인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긴 하는군요. 그럼, 잠시 세상 시름 잊고 음악 볼륨을 조금 키워보자구요.
다른 짓을 할 새가 없다 이겁니다
- 클래식 입문기
모처럼 쉬는 토요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루가 흘러 지금은 사위가 교교한 한밤중입니다. 오피스텔의 공용 라디에이터 속에서 흘러가는 물소리가 마치 시냇가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이왕이면 밤 별떨기, 부엉이 울음소리, 사그락거리는 풀줄기 같은 것들도 함께 했더라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지만 사실은 하루 종일 분주했습니다. 브람스에서 보테시니로, 바그너에서 스크리야빈으로, 또한 하이든, 모차르트, 비오티, 야나체크, 스메타나…. 종일토록 잡탕으로 음악을 들었지요. 음악은 시간을 질료로 하는 어떤 짓인데, 그것은 무위(無爲)를 특징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 무위라는 말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행하지 아니함과 꾸미지 않음.
하다못해 청소기나 세탁기 돌리는 것만큼도 일의 보람을 찾을 수 없으니 음악듣기란 그야말로 '행하지 아니함'이겠고, 음악 앞에서는 하염없이 순정한 마음이 되는 법이니 '꾸미지 않음'이 틀림없지요. 그렇게 보내버린 하루를 되돌아보노라니 좀 허무한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이런 허무감이 어디 하루이틀 일입니까.
인성의 환경결정론이 오류로 판명나고 있는 게 서구 심리학계의 동향이라고 합니다. 역시 사람의 성격과 기질은 타고나는 몫이 더 크다는 깨달음이지요. 저도 그 견해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어린 시절, 어떤 아이는 공차기나 싸움질하기를 더 좋아했던 반면에 저는 본능처럼 소리나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으니까요. 무작정 음악이 좋았습니다.
클래식 음악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것은 고등학생이 되고서야 알았습니다. 그 전까지는 죽자고 라디오만 붙들고 팝송을 들었지요. 요즘 올디즈 명곡이라고 나오는 60-70년대 팝송들을 저는 AFKN의 아메리칸 탑 포티나 국내 심야방송을 통해 신곡으로 섭렵했습니다. 이글스의 음악이 컨트리에서 포크록으로 바뀌고, 도어즈의 짐 모리슨이 갑자기 비명횡사하고, 칼리 사이몬의 대히트곡 '유 아 소 베인'은 미남 배우 워렌 비티를 비꼰 것이고…. 뭐 이런 '연예가 정보'를 당시에는 대단한 문화적 식견인 양 주위 친구들에게 뽐내며 떠벌리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고교 시절 클래식 음악과의 만남은 제 일생 중대사 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힐 만한 일입니다. 어느 일요일, 문예반 선배가 불러대더니 다짜고짜 무교동의 유서 깊은 음악감상실 르네쌍스로 데려가 앉히는 겁니다. 기기 이름은 나중에 알았지만, JBL 하츠필드 스피커와 매킨토시 앰프의 조합으로 뿜어내는 엄청난 음향은 그야말로 신세계였습니다. 무엇보다 그곳의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맛없지만 분위기 있는 원두커피며 뭔가 심오해 보이는 객석의 사람들, 맨 앞줄에 앉아 열광적으로 지휘를 하던 장발의 사내, 벽면을 장식하던 SP음반들, 가끔씩 얼굴을 비치던 도인 같은 풍모의 주인 박용찬 선생…. 저는 그때 처음으로 음악이란 고도로 고양된 정신적인 그 무엇이라는 걸 체험했습니다.
내 내부에 이미 클래식 음악을 받아들일 준비가 싹 트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사춘기 시절이라 더 그랬겠지만, 교양이며 품격 같은 것하곤 도무지 거리가 먼 누추한 가정환경이 과로웠고, 형편없는 학업 성적이 주는 좌절감이며 이성에 대한 동경 따위로 까맣게 타들어가는 가슴에 바흐, 베토벤, 브람스의 선율은 흡사 광명의 종교 체험과도 같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종교와 더불어 평생을 보내게 되었군요. 싫증을 잘 내는 편이라 만일 음악이 내게 조금만 틈을 보였더라면 얼른 딴 동네로 이사했을지도 모르는데 음악은 도무지 끝도 한도 없는 악머구리 같습니다. 한평생 빠져봤자 그저 발목이나 담그는 정도라고나 할까요.
누구나 클래식 음악에는 약간의 관심과 존중감을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몰두해 듣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 보입니다. 어딜 가나 사방에 음악이 흘러 넘치는 세상이 되었는데 이런 현상은 왜일까요. 아마도 고전문학 작품이 외면받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우선 과거시대의 창작물이라 정서적으로 낯설고, 유행가처럼 쉽고 직감적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며, 무엇보다 상당한 정도의 사전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겁니다.
집중해서 클래식 곡을 감상하는 체험을 갖게 되면 크든 작든 인생에 변화가 생겨납니다. 피아니스트 김주영은 클래식을 알면 생겨나는 세 가지 이익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첫째. 잘난 척하면서 친구들 기를 죽이거나 데이트 상대에게 인상적으로 보일 수 있다. 둘째, 아주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다. 셋째, 눈물이 흐르고 피가 끓는 감동의 체험을 할 수 있다. 이것은 클래식에서만 가능한 깊은 세계다. 그러니까 "베토벤의 음악은 지루하다."고 말하면 그것은 내가 무식한 것이지 베토벤이 지루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유머러스한 설명이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여기에 내 생각을 하나 더 보태자면, 클래식 음악에 몰두해서 인생이 달라지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있습니다. 클래식 곡들은 대부분 길이가 매우 길다는 점입니다. 다른 짓을 할 새가 없다 이거지요.
내가 못나고 부족해서 그런 거라네
- 클래식 섭렵기
벗 윤광준에게
책 마무리는 잘 되고 있는가. 80년대 중반부터 오디오 기자로 활동한 당대의 오디오 평론가님께서 이제야 저서를 낸다는 게 오히려 늦은 셈이지. 초고를 보니 좀 맛이 간 인간으로 내 흉을 많이 보았던데 괜찮으이. 아무리 맛이 갔어도 그럭저럭 잘 살고 있지 않은가. 자네와 만나온 지난 10여 년간 우리가 허구헌 날 음악과 오디오 이야기로 지샐 때 열심히 주식이다 부동산이다 재테크에 몰두해온 친구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던가. 비록 쌓아둔 재산은 없어도 '돈맛'에 헛살았다고 탄식할 일은 없는 게 어딘가 말이야. 더욱이 우리가 사랑해온 예술가들 중에 어디 부유하고 순탄하게 살았던 인물이 별로 있던가.
한번 돌아보세. 때론 재즈나 록을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우리의 청청했던 젊음과 지금 이 조락의 나이까지 변함없이 가슴을 후비고 들어온 기본 음악, 클래식 음악의 바다를 말일세. 좀 엄두가 안 나는 일이기도 하지. 더욱이 주로 오디오에 집중해온 자네에 비해 음반에 탐닉한 나의 경우는 너무 많은 음반 때문에 오히려 애착을 느끼는 앨범을 추려내기가 매우 어렵네. 가령 실패한 연주는 그 실패가 안겨주는 인생론적 값어치가 있을 것이고, 명성은 높지만 지겹고 정이 안 가는 곡이라면 우리의 평소 농담대로 '내가 못나고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여기면 되니까. 자, 어디부터 갈까.
우선은 바흐 영감님부터 뵙는 게 예의가 아닐까. 마태 수난곡, 요한 수난곡, B단조 미사, 무반주 첼로 조곡, 바이올린 독주 파르티타, 골드베르크 변주곡……. 아, 끝이 없겠지만 그래도 역시 우리가 일제히 전집을 구했던 장장 224곡의 칸타타가 다가오는군. 그 중에서도 내가 거품 물고 흥분한다고 자네가 흉봤던 <악투스 트라지쿠스, BWV 106>는 어떤가. 통상 '칸타타 제106번: 하나님의 세상은 최상의 세상이로다'로 일컫는 이 곡은 애도 행사에 쓰여져서 레퀴엠 미사의 원조 격으로 여기는 작품이지. 도입부 신포니아의 아름답고 구슬픈 리코더 2중주의 음색이며 각 성부가 다투듯이 주고받는 코랄의 묘미, 테너, 베이스, 알토로 이어지는 아리아에서는 마치 생사의 무게를 짚어보는 듯한 느낌이 들지. 바흐의 곡치고는 선율이 풍요로워서 무척 쉽게 다가온다는 장점도 크고.
손꼽을 연주로는 아무래도 칼 리히터 지휘본을 먼저 들어야겠지. 칼 리히터는 1981년 사망하기까지 바흐의 거의 모든 곡을 연주하고 지휘한 바흐 스페셜리스트인데 특히 26매의 CD로 재출반된 칸타타 전곡집은 불멸의 성과로 기록되지 않는가. 그의 '악투스 트라지쿠스'는 알토에 헤르타 퇴페, 테너에 에른스트 헤플링거, 베이스에 테오 아담 등 짱짱한 솔리스트들이 포진해 있지. 이 곡으로 헤플링거를 좋아하게 됐는데, 그가 부르는 슈베르트 가곡들도 그 청아하고 애조 띤 음색이 일품이네. 그 밖에 프로프리우스 레이블로 나온 안데르스 외볼 지휘본은 극히 축소된 공간감으로 특이한 연주집이라 할 만하겠네. 외볼의 음반에는 피셔 디스카우 이후의 걸출한 바리톤 하켄 하게고드가 참여한 점이 눈에 띄지.
바흐 음반을 뒤적이다 보니 첼리스트 안네 빌스마를 그냥 넘어갈 수 없을 것 같네. 클래식 동네에도 유행과 선풍이라는 게 없지 않은데, 마치 요즘 지휘자 헤레베헤가 받는 열광적 찬사처럼 한 10년 전부터 네덜란드의 첼리스트 안네 빌스마가 꽤나 사랑을 받고 있지. 음악 좀 듣는다는 사람들은 '음악의 황제' 카라얀을 대부분 싫어한단 말야. 겉만 번지르르한 종합선물 같다는 거지. 그런 점에서 외골수로 파고드는 스페셜리스트가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남다른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어 있지. 그래서 위대한 로스트로포비치를 두고도 얌전한 샌님 같은 다닐 샤프란을 더 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고.
하여간 빌스마의 첼로는 고음악 정격연주의 한 정점이라 여길 수 있을 것 같네. 소위 기름기를 제거한 고아한 원전의 향취. 그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을 두 차례나 녹음했는데 먼저 나온 RCA본보다는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소장된 '스트라디바리우스 세르베'로 연주한 소니 클래시컬본이 더 나은 것 같네. 다만 고악기 특유의 쨍쨍거림이 있으니 오디오 성능에 자신이 없다면 좀 망설여야겠지.
바흐를 빠져나오기가 정말 힘들군. 당연한 일이지. 평생을 들어도 닿을 수 없는, 베토벤의 표현대로 '대양'이니까. 이제 길을 바꿔 성악 쪽을 둘러보면 어떨까. 이 동네는 취향에 따라 리트(가곡)파와 오페라 아리아파로 나뉘잖는가. 아울러 세대별로 캐슬린 배틀, 체칠리아 바르톨리를 듣는 연배가 있고, 그보다 앞서 마리아 칼라스,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를 듣는 세대가 있고, 또 더 거슬러 가서 엘리자베스 슈만이나 로테 레만을, 아예 선사시대로 가서 넬리 멜바의 유성기 기록음반을 찾아 듣는 골동학파도 없지 않지. 모두 여류 성악가들인데 테너나 바리톤들의 활약 또한 그에 못지않은 장관이 아닐 수 없지.
음악의 절반이 성악인데도 '가사의 벽' 때문에 망설이는 사람도 꽤 많지. 하지만 글쎄, 그럴까? 가사 이해는 단지 부수적인 일에 불과한 것인데. 가사의 뜻을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면 그냥 낭송을 하지 무엇 하러 멜로디를 붙였겠는가 말이야. 오히려 가사가 음악을 방해하는 경우도 많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거야. 독일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로 된 이해 못할 가사일랑은 뜻 모르고 팝송을 듣듯이 그냥 넘겨짚으면 될 일.
헛다리도 짚어보고, 틀려도 보고
- 클래식 가이드
가끔씩 아무 용건 없이 찾아와 빈둥거리다 가는 후배가 있다는 사실은 참 즐거운 일이구나. 햄스터야, 내가 자판을 두드리는 이 밤 시간에 넌 새근새근 자고 있겠지. 손님이 왔는데 쳐다도 안 보고 판만 돌리기냐고 원망하는 말속에 실은 내가 열심히 들려주는 음악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안다. 그 햄스터를 닮은 또록또록한 눈매가 모든 걸 말해주니까. 하지만 기회가 없었던 나로서는 아마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무얼 알아야 하는 것인지. 그래서 이 편지를 쓴다.
먼저 나는 클래식에 대해 음악적으로 별로 아는 게 없다는 말부터 해야겠다. 공연히 자기 반성을 하자는 게 아니고 실제로 그렇다는 말이다. 많이 알고 정확히 평가하는 일은 그걸 직업으로 하는 전문가가 따로 있다. 가령 시, 소설을 잘 이해하고자 직접 문학평론을 공부할 필요는 없다. 필요하다면 평론가의 글을 읽으면 되니까. 음악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클래식 음악을 듣는 데는 많은 지식이 '반드시' 필요한다. 미술 평론가 유홍준은 아는 만큼 느낀다고 했고, 개미박사로 잘 알려진 생태학자 최재천은 알면 사랑한다고 했다. 그 말은 맞는 말이다.
정리하자면 이렇가 클래식 음악은 1백 년 이상 된 서양의 음악이니 지금 이곳의 삶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 놓여 있다. 더불어 그것은 언어와는 다른, 음향과 시간의 산물이며 언어적으로 파악되어서도 안 되는 대상이다. 그러니까 친해지기 위해, 각종 관계와 분위기를 알기 위해 지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물론 지식이 좀더 진척된다면 곡의 구조와 형식을 파악하기 위한, 음악 내적인 이해를 도모해야겠지만 불가결한 것은 아니다. 소나타 형식의 경우 한 악장 내에 주제의 제시부가 있고, 전개부(발전부)가 이어지고 다시 재현부로 종결되는 내적 구조가 있어서 그 흐름을 따라갈 수 있으면 훨씬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일이 그렇게 듣자면 그거 어디 피곤해서 견디겠는가.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작곡가나 연주가의 생애와 성향, 음악사적인 맥락 같은 인문적인 사항을 많이 읽고 친근해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다음은 멋대로 들으라는 말을 하고 싶다. 흔히 "음악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싶은데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요?" 하는 말들을 한다. 레코드점에 가보면 초보자를 위한 기초음악(?) 모음집이니 백만인을 위한 클래식이니 하는 야들야들한 자켓의 음반이 꽤 보이고 엄청난 가격의 전집물도 눈에 띈다. 내 생각엔 부질없는 장삿속만 같다. 어떤 작곡가도 자신이 특정 체계의 일부가 되기 위해 곡을 만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고전주의에 반항하느라 낭만주의를 했다는 식의 설명도 실제 창작자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작곡가 개개인은 모두 자신의 성향과 신념대로 곡을 만든 것이고, 그것이 나중에 지배적인 조류 속으로 정리되어 한 체계를 이루는 듯이 보일 뿐이다.
물론 사족적인 이해가 전혀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다. 모노포니(단성음악), 호모포니(화음반주가 딸린 음악), 폴리포니(다성음악)로 나누는 음악 양식 가운데 가령 고전파 음악은 이전 바로크 음악에 비해 호모포니의 발전이 두드러진다는 점, 그래서 교향곡, 협주곡 같은 기악곡들이 주요한 장르로 등장한다는 계기성 속에서 곡을 파악하는 것은 유익하다. 고전파에 이어 나타나는 낭만파 음악은 베버를 시발점으로 해서 베토벤, 베를리오즈, 슈만의 음악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참고로 우리가 클래식이라고 통칭하는 것은 고전파 음악에서 빌려온 편의적인 명칭이며 정확히는 시어리어스 뮤직(진지한 음악)이라 부른다. 아울러 클래식이라는 낱말도 일본식 약어이고 클래시컬 뮤직이 정확한 표현이다.
쉬운 음악과 어려운 음악이라는 구분이 있는데 그것은 그다지 믿을 게 못 된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 아무 곡이나 하나 들어보렴. 그 명징하고 쾌적한 선율이 쉬운 곡이라고 여긴다면 실은 오해다. 드뷔시의 몽상적인 전주곡집, 쇤베르크의 무조음악, 벨라 바르톡의 음산한 현악 4중주곡들을 과연 어렵다고만 볼 수 있을까, 내 생각엔 감상자에게 친화력이 높은 곡과 덜한 곡으로 나눌 수는 있을지언정 난이도로 곡을 분류하는 각종 가이드 글들은 오히려 폭넓은 음악 이해에 방해만 되는 것 같다. 그러므로 곧장 핵심으로 들어가라고 권한다. 초보자는 여기까지 듣고 다음 단계엔 이런 곡을 정복하고 하는 식이 아니라 음악사의 별 같은 명곡들을 곧장 망설임 없이 접하는 것이다.
하나 더 권하고 싶은 사항은 나만의 음악을 들으라는 것이다. 각종 음악서적은 말할 것도 없고 인터넷 음악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정말 질릴 만큼 다양한 명곡 추천 명단이 있다. 하지만 그런 곳에는 닐센이나 하르트만의 교향곡도 쳄린스티의 현악 4중주도 없다. 심지어 20세기 현대음악을 정리한 어떤 음대교수의 책에서 쇼스타코비치가 완전히 빠져있는 것도 보았다. 물론 유명한 작곡가의 인기 곡이 좋은 곡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만이 최고라고 한다면 곤란한 생각이다. 언젠가 고교생들을 상대로 한 강연장에서 좋아하는 시인 이름을 적어내게 한 일이 있는데 대부분이 윤동주, 이육사, 한용운이었다. 교과서에 이름을 익혔기 때문일 것이다. 이 유명한 인물들은 틀림없이 위대한 시인이지만 시에 식견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이성복, 황지우, 최승자, 기형도를 즐겨 읽는다. 즉 교과서적 평가와는 다른 현실적 척도가 또 존재하는 것이다.
음악을 듣는 일은 어떤 이득을 꾀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당연히 핵심체크, 요점정리 같은 것은 쓸모도 없고 의미도 없다. 좀 적당히 헤매고 실패도 해가면서 하나하나 자기만의 고유 체험으로 레퍼토리의 양을 늘려 가는 게 좋다. 물론 그러다 보면 매우 중요한 곡을 놓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게 그렇게 억울한 일일까. 많이 틀려봐야 정답을 맞힐 수 있듯이, 헛다리도 짚다 보면 메인 스트림의 의미도 알게 되고 마이너의 가치도 이해하게 된다.
- 김갑수(시인) : 글쓰기와 방송 두 분야를 오가며 자유롭고 창조적인 삶을 꿈꾸는 김갑수는 성균관대학교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수료했다. 시와 음악칼럼 그리고 출판평론이 주된 활동영역인 그는 1984년 실천문학을 통해 시단에 데뷔하고 시집 『세월의 거지』,음악에세이집『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를 출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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