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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구두 | (2002-12-28 11:16:07, Hit : 13586, Vote : 24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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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indshoes.new21.o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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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클래식 오딧세이 1 -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글쓴이/ 율리시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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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Sviatoslav Richter, 1915-1997, 피아니스트)
위대한 예술가의 죽음은 신들의 황혼
리히터는 전지전능하다. 물론 호로비츠 또한 그랬다. 러시아가 낳은 무수한 피아니스트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존재인 그들은 피아노를 가지고 못할 일이 없었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아주 중요한 부분에서 다르다.
호로비츠의 연주에서는 일종의 '요기'가 감돈다. 1979년에 녹음된 리스트의 메피스토 왈츠 연주가 전형적인 예의 하나로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곡이 시작되고 얼마 안돼서 호로비츠는 청자를 완전히 사로잡는데, 이때 청자가 받는 느낌은 '압도'라기 보다는 '압도적인 매혹'에 가까운 것이다. 수많은 동세대 피아니스트들을 절망케 했던 그 무시무시한 기교, 발작적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도발적인 프레이징, 피아노가 부서져 버리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포르티시모 등 실로 메피스토펠레스 자신이 호로비츠의 탈을 쓰고 연주하는 듯한 악마적인 연주다.
악마적. 이것은 단순한 낭만주의 예술의 키워드가 아니다. 전지전능한 인간이란 불가능하기 보다는 불허된 존재이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 호로비츠나 리히터 같이 전지전능한 인간은 따라서 '악마'가 될 수 밖에 없다. 호로비츠의 메피스트토 왈츠 연주는 인간으로서 절대권능을 손에 넣은 자의 득의의 선언인 것이다.
그러나 리히터는 다르다. 그에게는 호로비츠의 유희감각이 없다.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배제해 버린 것이다. 호로비츠의 연주는 유희의 완전한 형태를 보여준다. 유희도 얼마든지 숭고한 감정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면서. 그러나 리히터의 연주에서는 오직 음악 그 자체만이 들려온다. 이것은 그의 소름끼치리만치 철저한 집중에 의해서 가능해지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그는 호로비츠가 거처하고 있는 유쾌한 마계에서 벗어나 승천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천사의 무리에 낀다. 연주의 절정에서 호로비츠의 주위에 요기가 감돈다면, 리히터의 머리 뒤로는 후광이 감도는 것이다. 그의 별명이 '성스러운 악마'라는 것은 그래서 필자에게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피아니스트들이 숭배하는 대상이 된다.
내가 그의 연주를 처음 들었던 것은 1997년 5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였다. 연주회의 프로그램은 슈베르트의 마지막 소나타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리히터의 템포는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그 어느 것보다도 느렸다.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고백하도록 하자. 우선 나는 슈베르트의 음악을 거의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반복적 구조를 싫어하기 때문인 것 같은데, 특히 좀 긴 곡이라도 듣게 되면 무언가 불안정하고 어색함마저 느끼게 된다. 두 번째는 나는 주로 레코드를 통해 음악을 듣지 음악회에는 거의 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리히터의 첫 프레이즈 연주와 느린 템포가 주었던 감동 때문이다. 사실 나는 거의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슈베르트의 반복적 구조에 대한 편견은 이미 사라진 뒤였으며, 기껏해야 장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리히터에 의해 중추적인 요소로 다가오고 있었다. 더욱이 곡에 대한 분석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마치 즉흥연주가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주었는데, 그의 음반을 들을 때도 그랬던 것처럼 바로 그 순간 나는 우리 시대가 낳은 최고의 음악 전달자를 보았던 것이다.
이 증언이 다른 사람도 아닌 글렌 굴드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당신은 믿을 수 있겠는가? 믿지 못하겠다면 굴드가 연주가를 '리스트'와 '리히터'의 두 가지 타입으로 분류했다는 얘기를 해줄 수 밖에. 리스트로부터 유래하는 무대 위의 프린스를 경멸했던 굴드는 그에 대응하는 이상형으로 자신이 아닌 리히터를 내세웠던 것이다.
리히터가 청중 뿐만 아니라 피아니스트들에게도 전지전능한 존재로 보였다는 것은 아쉬케나지의 다음과 같은 회고를 통해 알 수 있다.
리히터의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힘 때문에, 다른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나도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음악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내 생전에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의 예술에 대해 완전한 헌신과 진지함으로 임했고 그래서 더 많은 교감을 주고받았다. 지난 일을 되돌아 보면 바로 그 점이 나를 그에게 끌리게 한 요인이었고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가 청중을 매료시키는 가장 강렬한 요인은 바로 자신이 하는 특정 순간의 연주가 그 순간만은 절대적으로 옳다는 신념이었음을 지금에서야 깨닫고 있다. 그 신념은 그가 자신의 내면세계를 독자적으로 가꾸어 왔고 또 순전히 그의 마음속에서 완성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문제로 그와 어떤 논쟁을 벌인다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그는 "네, 어쩌면 당신이 옳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내가 느끼는 것이고 또 그것이 내가 연주하는 식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연주가 다 끝나고 나면 나는 비로소 내가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그러나 연주 도중에는 모든 것이 아주 잘 어울리고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몰입되어 있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압도당하고 만다.
아쉬케나지의 회고는 불신자들조차도 그를 따라올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리히터의 마력의 비밀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준다. 극도의 집중력과 자신이 빚어내고 있는 음악에 대한 확신. 그의 이러한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음반은 1958년에 녹음된 소피아 리사이틀 실황녹음이다. 이 음반을 끝까지 듣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고통스럽다. 리히터의 연주의 가장 큰 특징인 '살아 움직이는' 음악은 스피커 밖으로 튀어나와서 뭇소르그스키의 친구인 화가 하르트만의 그림을 우리 앞에서 그린다. 오로지 전지전능한 리히터만이 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그리고 고통스런 연주다. 우리 같은 범인은 그 '과연 음악을 위해서 저렇게까지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만들어도 좋은 것인가?'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기 때문이다.
리히터의 음악은 듣는 사람에게 대가를 요구한다. 만일 당신이 교양을 늘리기 위해서, 혹은 스트레스 해소나 분위기를 잡기 위한 용도로 그의 음반을 구입하고자 한다면 그만두는 편이 좋다. 그의 음반은, 심지어 가장 대중적이라는 라흐마니노프/차이코프스키 협주곡 음반조차도 가슴속을 불태우고 머릿속을 텅 비워 오로지 음악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음반은 당신을 완전히 정복해 버릴 것이다!
바흐와 차이코프스키를 동시에 연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 '암보로 연주하는 것'을 경멸했고, 조명을 최소화하여 거의 암흑에 가까운 무대에서 연주할 정도로 악보와 작곡가에 헌신했으면서도 어느 누구의 것과도 다른 주관적인 해석을 들려주었던 이 위대한 예술가의 죽음은 신들의 황혼 그 자체였다. 단순한 회고취미로 동시대의 연주가들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전지전능했고, 전지전능한 인간이란 그렇게 쉽게 이 지상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2001. 7. 24.>
writer/율리시즈(ulysses@cjdream.net)
service/ Windshoes's Federation Asyl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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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H2138 |
저도 얼마전에 리히테르(혹은 리히터)의 평균율에 대해 감상글을 올린적이 있는데, 리히테르의 음악은 저 역시 너무나 무겁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바람구두님과 생각이 비슷하네요!^^ 피아노란 악기는 어떤 악기보다도 연주자의 심경이 잘 들리는데(다른 악기도 그렇겠지만), 그의 음악은 베토벤의 후기 음악에 잘 어울릴거란 생각도 해 봅니다.
바람 구두님 이글 제 블로그에 올려도 될지 문의 드립니다. bach2138 http://www.mediamob.co.kr/bach2138/blog.as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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