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놀이
1.
행복은 놀이 속에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또 우리의 목적이 놀이이며, 고작 놀기 위해 우리가 삶 전체에 걸쳐 애쓰고 어려움을 감내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제외한다면 - 행복이 바로 목적이니까 - 우리가 선택하는 거의 모든 것은 [그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목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단지 놀이를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를 감내한다는 것은 한심하고 너무 어린아이 같은 짓으로 보인다. 아나카르시스가 말한 것처럼 오히려 “진지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놀이한다”는 것이 옳은 이야기로 보인다. 놀이는 휴식과 같은 것이며, 사람은 연속적으로 일을 할 수 없기에 휴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니까. 따라서 휴식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활동을 위해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창우`김재홍`강상진 옮김,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제이북스, 2007, 368~369쪽.
2천5백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삶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러한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인간은 무엇을 추구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통해 놀이는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고 결론 내린 바 있다. 그에게 즐거운 놀이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인생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서 좀 더 진지한 활동에 스스로 매진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 사실 놀이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놀이는 그 자체로 재화를 만들어내지 않으며, 업적이 되지도 않는다. 놀이는 아무런 물질적 보상도 해주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인해 사람들은 놀이를 경박한 것이거나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왔고, 진지한 탐구의 대상이거나, 학문적 성찰의 주제가 되지 못했다. 부르크하르트의 뒤를 잇는 문화사가 요한 하위징아가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하위징아는 1933년 라이덴 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면서 행한 주제 강연 <문화에 있어서 놀이와 진지함의 경계에 대하여>에서 문화에 있어서 놀이가 갖는 중요성을 오랫동안 간과해 왔다고 말한다. 이 같은 주제의식을 발전시켜 1938년 출간한 『호모 루덴스』에서 그는 놀이의 본질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시도한다. 하위징아는 ‘놀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생존을 위한 활동은 기계적 물리법칙을 따르는 것일 뿐이지만, ‘놀이’를 한다는 것은 물리법칙(현실)을 벗어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생존을 쫓아 산다는 점은 인간 또한 여타의 다른 생물들과 다를 바 없지만, 생존의 사슬에서 벗어나 여가를 갖고 놀이할 때 인간의 삶에 비로소 독특한 의미(문화)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본래 인간에게 삶의 의미는 노동으로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데 있지 않고, 놀이를 통해 즐거움을 얻는 것에 있다는 뜻이다. 중세의 인간은 결코 현대의 인간처럼 많은 노동을 하지 않았으며, 노동에 대한 찬미는 자본주의와 산업화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결합하여 인간에게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빼앗고, 노동을 강요하며 생겨난 일종의 문화 이데올로기였다.
이솝의 ‘개미와 베짱이’ 우화에 잘 드러나는 것처럼 고대 이래 인간 사회는 노동을 찬미하고, 놀이를 게으름으로 여겨 천대해왔지만, 일과 휴식(또는 놀이)은 인간 생활의 양대 축을 이르는 행위로서 오랜 세월 동안 인류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는 과정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면서 노동력을 재생산해 왔다. 개미가 ‘노동하는 인간(Homo Faber)’이라면 베짱이는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인 셈이다. 우화가 전달하고자 했던 교훈은 노동하는 인간은 추운 겨울이 와도 걱정이 없지만, 놀이하는 인간인 베짱이는 겨울이 오자 먹을 것을 구걸해야만 하는 신세로 전락한다는 것이었다. 과연 20세기 호모파베르들은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았을까? 역사는 우화가 전하는 교훈과 정반대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경제적 진보에 더 빨리 도달하기 위해 더 오랫동안 더 많이 노동해야 했으며 안정적인 노동력과 시장 확보를 위해 식민지 쟁탈전에 나서야 했고, 그 결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렀다. 노동은 언제나 숭상되었지만,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노동하는 개미들 위에는 항상 군림하는 베짱이들이 존재했다. 일하면 할수록 빈부양극화는 더욱 심각해졌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근로빈곤(working poor)’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어째서 개미는 가난하고, 놀고먹는 베짱이가 부자일까? 카를 마르크스는 이 수수께끼의 풀이를 『자본론』에 기록하고 있다.
2.
노동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인가?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노동이 인간 누구에게나 내재한 자연스러운 본성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 의해 재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전제로 한다. 너무나 풍요로운 자연은 “지나치게 보호받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인간을 자연의 손안에서 놓아주지 않는다.” 이와 같은 자연은 인간에게 스스로를 발전시킬 하등의 필요성도 갖지 않도록 만든다. 자본의 모국은 식물이 무성한 열대지방이 아니라 온대지방이다. 토지의 절대적 비옥도가 아니라 토양의 차이, 토지의 천연산물의 다양성, 계절의 변화야말로 사회적 분업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며 그것들이 인간을 둘러싼 자연 환경의 변경을 통하여 인간을 자극시켜 인간 자신의 욕망(필요)이나 능력이나 노동수단이나 노동양식을 다양화시키는 것이다. 산업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자연력을 사회적으로 통제할 필요성, 그것을 절약할 필요성, 인간의 손으로 그것을 대규모로 이용하거나 또는 복종시킬 필요성이다. 카를 마르크스, 김수행 옮김, 『자본론』, 비봉출판사, 1993년, 646쪽.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발생(원시축적의 기원)을 역설적이게도 자본이 아닌 노동계급의 탄생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부의 집중으로서의 자본은 자본주의 발생 이전에도 이미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노동력이 상품이 되기 위한 조건이 생겨남으로써 자본주의 체제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노동력이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노동력의 소유자가 자신의 소유자여야 한다. 농노나 노예는 노동력의 판매자가 아닌 그 자신이 상품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노동력의 소유자가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을 박탈당해 자신의 노동력 자체를 상품으로 시장에 내놓을 수밖에 없어야 한다.
근대 이전까지 인간의 삶은 지역이라는 공간 속에서 생산과 소비, 여가를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개인적인 일과 사회적인 일 모두 동일한 공간에서 영위되었고, 노동과 놀이는 하나의 유기적인 순환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 산업화는 그러한 지역의 안정적인 기틀을 해체하고 사람들을 대규모로 동원하는 체제였다. 도시는 각기 다른 여러 지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군집을 이루어 살아가는 공간이었다. 초기 산업화 단계에서 노동자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던 도시인의 삶은 노동을 중심으로 촘촘하게 배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가라고 부를 만한 행위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산업화 과정에서 생산은 일상생활로부터 분리되어 그것만을 위한 영역을 집약적으로 그리고 거대하게 형성했다. 사회 전체는 생산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조직되었고, 공간도 그러한 목표에 맞게 재배치되었다. 대도시는 그와 같은 근대 산업화 과정의 산물 중 하나였다. 생산 기지로서 생성된 대도시는 애초엔 생활의 공간이 아니었으며 노동자의 가정은 노동의 재생산과 소비를 위한 배후지가 되었다.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 중 상당수는 사적인 영역으로 전가되어야 했다. ‘생활 세계의 식민화’는 여가를 위한 시간과 공간의 박탈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전통적인 공동체에서라면 당연했던 의미 있는 공동체적 관계는 상실되었다. 도시는 생산수단을 잃어버린 채 노동력을 팔기 위해 도시로 찾아드는 인구를 수용하는 것만으로도 급급했기에 거주환경은 열악했고, 사회적인 관계가 안정적으로 형성되기에는 노동조건이 너무나 불안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여가를 영위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3.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는 방편으로 마르크스가 노동해방을 주장하였다면, 그가 공상적 사회주의로 비판했던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는 일이 놀이가 되고, 놀이가 일이 되는 사회(유토피아)를 꿈꿨다. 『파사젠베르크』에서 벤야민은 샤를 푸리에의 유토피아주의와 관계있는, 자연과의 조화롭고 유희적인 관계 개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주의적 지배가 끝나면) 인간 노동은 …… 자연 착취라는 성격을 벗어던질 것이다. 인간 노동은 푸리에에게 조화에 대한 열정적인 노동의 기초인, 어린아이들의 놀이 양식과 일치되어 갈 것이다. 푸리에의 가장 뛰어난 장점은 놀이를 착취적이지 않은 노동 형식의 기준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유희가 생명력을 불어넣는 노동은 가치 생산이 아니라 자연 개선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리고 푸리에의 유토피아는 새로운 노동의 모델을 제시하며, 어린아이의 놀이는 그 모델을 현실화한다. …… 그 속에서 행동은 꿈의 자매가 될 것이다. 그램 질로크, 노명우 옮김,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효형출판, 2005, 183쪽 재인용.
19세기 푸리에는 노동이 놀이가 되는 사회의 가능성에 관해, 즉 노동이 인간의 자유로운 욕구에 따라 조직될 수 있는 사회에 관해 이야기하길 두려워하지 않았다. 더욱이 최근에 근대 극복의 화두로서 주로 세 가지 방향에서 제기되고 있는 욕구나 감성의 해방, 노동의 종말과 자율 노동, 또는 대안적 공동체의 모색이라는 논의들을 어느 한쪽이 아니라 서로 연관된 기획으로, 즐거운 노동 공동체라는 하나의 기획으로 구성했다는 점에서 푸리에의 논의는 커다란 의미가 있다. 마르쿠제가 푸리에를 경유한 마르크스가 아니라 마르크스에서 푸리에로의 방향이란 맥락에서 “생존보장을 위한 노동이 더 이상 개인의 중요관심사가 되지 않고, 인간 능력의 자유로운 놀이로서의 일이 근본적 욕구가 되는 사회”에 대해 언급한 이래 푸리에가 제기했던 노동과 놀이가 결합한 ‘즐거운 노동’의 문제는 ‘노동해방’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주제로 새삼 주목받고 있다. 현대 사회주의 노동해방론의 여러 입장, 즉 네그리(Antonio Negri)와 하트(Michael Hardt)의 자율노동, 노동거부론이나 앙드레 고르(A. Gorz)의 노동시간 단축론, 노동종말론 등의 전개가 그것이다. 장동진, 『이상국가론- 동양과 서양』, 연세대학교출판부, 2004, 237~238쪽 참조.
특히 A.고르는 노동일 감축과 자유시간의 증대, 자유시간의 자기조직화를 통해 문화 활동의 증대가 삶의 중심적인 활동이 되는 사회가 오늘날의 발전된 생산력을 기초로 현실화될 수 있는 조건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의 이행이라는 대대적인 문명적 변동이 사회 성원의 다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극소수에게만 한정된 혜택으로 국한된다면 이는 유례없는 가공할 야만 상태(대량실업과 빈곤의 양극화)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다수의 문화적 권리 확대를 위한 투쟁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것은 이 투쟁이 위와 같은 야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확장을 위한 방향으로 이끌도록 촉진할 매개변수가 되기 때문이었다. A.고르의 문화사회론은 1990년대 절차적 민주화가 완성되고 산업화의 결실이 개개인에게 구체적인 혜택으로 분배되기 시작하면서 민주화와 산업화라는 근대의 이중 과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는 낙관론에 기대어 한때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이후 세계 자본주의의 기획에 따라 진행된 신자유주의는 한국 사회의 문화 이데올로기적 지형을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시켰고, 유례없는 가공할 야만은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노동과 놀이의 결합은 애초에 노동해방의 기획으로 출발했지만, 변모해가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질서 속에서 장기간에 걸쳐 추진된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한 미국에서,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의미가 탈색된 부의 추구는 세속적이기만 한 열정과 연계되기 쉬운데, 실제로 종종 스포츠의 성격을 띠곤 한다” 대린 맥마흔, 윤인숙 옮김, 『행복의 역사』, 살림, 2008, 479쪽 재인용.
며 자본 축적에 대한 열망 또한 놀이적 속성을 띨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바 있다. 국가가 노동을 포섭하면서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했던 포디즘적 훈육사회는 정보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포스트포디즘의 자율통제사회로 전환되었다. 자본은 정보와 지식의 독점을 통해 우리 일상과 하나가 되어 어떤 놀이도 선사할 수 없는 강력한 쾌락(?)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노동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우리는 좋아서 일을 하고,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일에 쏟아붓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의무 노동자가 아니라 향락 노동자이다. 이 단어는 몇십 년 전부터, 실제로는 이미 200년 전 시민 계급의 시대가 시작된 이후 지속되어 온 발전의 정점을 표현한다. 인간이 제 몸을 망가뜨리는 노동을 기계에 떠맡기고 직업 교육을 통해 적성에 따라 직업을 선택하며 자신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달라지게 된 이래로, 노동이야말로 행복을 약속하는 것이 되었다. 스베냐 플라스푈러, 장혜경 옮김,『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경쟁 사회에서 자유와 행복을 찾아서』, 로도스, 2013, 8쪽.
산업자본주의에서 이윤의 창출이 잉여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면 지식정보산업사회에서 인지자본주의의 새로운 축적 체제는 더 이상 공장과 사무실 안에서의 노동시간에 주목하지 않는다. 대신에 인지자본주의는 자신들의 지배영역을 공장과 사무실 바깥으로 일상의 사적 영역까지 점유하고 있다. 인지자본주의는 무료로 제공되는 모바일 게임, 페이스북과 트위터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이용자의 관심을 끌어들여 스스로 시간을 소비하게 만들고 그들의 활동결과물을 빅데이터로 축적한다. 지식정보산업사회에서 자본은 노동자가 아닌 이용자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이들의 노동에 대해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본을 축적한다. 하위징아는 『호모루덴스』에서 “놀이는 사물을 결합하고 해체한다. 놀이는 우리를 매혹시킨다. 놀이는 우리를 사로잡는다. 즉 놀이는 우리에게 마법을 거는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 우리는 그 놀이노동에 사로잡혀 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
소설의 대지를 횡단하는 탐구자 <작가세계> 
바람구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