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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기록유산하면 우리는 조선왕조실록 같은 우리 기록문화유산들만 먼저 떠올리는 경향이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 중세 기독교 예술의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는 것이 아일랜드의 그리스도교 수도사가 남긴 『켈스의 서(Book of Kells)』란 책이다. 이 책은 아일랜드의 역사가 남긴 가장 귀중한 보배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는데, 서기 8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이 책은 교회의 언어이자 문명의 언어였던 라틴어로 기록되었다.
비록 로마 제국은 붕괴되었지만 라틴어는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5세기 무렵에는 서양을 침략했던 야만족의 언어로까지 채택되었다. 야만족의 승리는 기독교의 전파를 촉진했고, 그에 따라서 라틴어는 교회의 언어로, 동시에 로마제국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던 북유럽 지역의 문명어로 확산되어 갔다.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비잔틴 제국에서는 장서가 풍부한 도서관들이 번창했고, 서양의 채식장식에 영향을 준 세밀화 기법(사실, 이 세밀화 기법 하나만 놓고도 문명사로 책 한 권이다만)이 발전되었다. 한편 라틴 문명은 유럽에서 영적 삶의 근원지요, 경제적 생산활동의 중심지이며 동시에 문명의 관리자였던 수도원으로 숨어들었다. 6세기부터 8세기까지 아일랜드와 영국의 선교활동으로 특히 주목을 끌었던 수도원들은 대규모 건립운동을 벌여 유럽전역으로 세력을 확산해 나갔다.
아일랜드는 한 번도 로마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여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3세기 경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후에도 이 섬나라는 대륙과 단절된 상태에 있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아일랜드 교회가 로마교황청에 길들여져 있던 서방교회와는 완연히 다른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뜻한다.
서방교회는 옛 로마제국의 도시행정 단위에 따라 교회 구역을 나누고, 각 구역에 주교를 두어 관할하였다. 반면 아일랜드의 경우엔 그런 조직적인 행정 단위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중심이 될 만한 도시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구 중심이 아닌 수도원이 교회조직의 기본 단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 수도원마다 필사 전용실인 스크립토리움(scriptorium)을 갖추고 있었다. 수도사들은 그곳에서 종교적인 텍스트는 물론, 라틴어 문장 습득에 필요한 고대 그리스 ․ 로마의 세속적인 작품을 줄곧 베껴 쓰면서 삽화를 그려 넣었다. 활약이 큰 스크립토리움에는 추기경, 대주교, 주교들의 복사본이 구비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일하는 수도사들은 수도원 고유의 활동이나 수도사의 의무를 면제받고 있었다.
339쪽으로 이루어진 『켈스의 서』 삽화 중에서 키로(XP) 문양의 그림은 얼른 보기에 새의 머리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크리스토(Christos)를 XPI로 요약한 그림 문자로, 책 한 면을 가득 채우다시피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그림 문자가 아니라 『마태복음』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Christi autem generatio)”의 성구를 쓴 것이다. 여기서 아우템(autem)은 h로 줄여 썼고, (generatio)는 우측 하단 I 밑에 온 단어로 기록하고 있다.
1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책은 파피루스나 양피지로 이루어진 두루마리 책(볼루멘)이었고 손으로 매는 제본 책(코덱스)은 4세기경에야 보편화되었다. 이런 제작상의 이점을 재빨리 체득하여 사용한 것이 그리스도교인들이었다(초기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 박해 역시 코덱스의 전파에 한 몫했다는 이야기는 예전에 한 적 있다). 여기에서 장식 삽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사실 여기에는 사람 같기도 하고 천사와 같기도 한 인물과 나비, 물고기, 수달 등의 그림이 다이아몬드, 원, 파도 무늬 등과 함께 일렁이듯 그려져 있다. 하지만 자세히 시간을 두고 살펴 내려가지 않으면 그 속에 그려진 사물들을 분간해 내기란 쉽지 않다. 이는 같은 방식의 그림 글자인 『린다스판 복음서』와 비교해 그 정교함이 훨씬 돋보이는 것이다. 확대경이나 안경 하나 없이 이루어 낸 이 초인적 인내와 헌신의 작업은 그들의 신앙과 정신적 배경을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중세의 필경사들은 종종 책의 말미 여백에 이런 글을 적어놓곤 했다. "이 책을 마치며, 겸허한 신앙심으로 옮겨 썼고 완성했다." 그리고 자신이 필경한 책 한 귀퉁이에 "시야는 흐릿하고, 등은 굽고, 허리와 배에서는 기력이 빠진다." 같은 필경의 고통에 대한 호소를 낙서 형태로 남겨놓기도 했다. 이런 사실만 보아도 필경이란 얼마나 힘든 노역의 결과물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일생을 기도하고 노동하며 순종과 죄의 고백으로 일관된 삶을 사는, 그렇게 수도원 담벼락 안에서 죽어가는 수도사의 모습을 상상해 보지 않고서는 이 위대한 예술작품의 뒤에 숨어있는 인간의 헌신을 엿볼 수 없다. 종종 깊이 본다는 것은 단순함에 대한 극단적인 추구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삶이 단순해지면 단순해질수록 사물을 보다 깊이있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켈스의 서』는 아마도 어느 한 필사자의 작품이 아니라 필사자와 채식사 그리고 제본가의 공동작업의 산물일 것이다. 그들은 이 책의 문자 삽화를 세밀하고 정교하게 만들면서 그것을 통해 무한한 탐구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영원과 대면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켈스의 서』를 보기 위해 매년 약 500,000명의 방문자들이 더블린에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를 찾는다고 한다. 아일랜드 전역과 해외에서 이 책을 보기 위해 찾아온 수많은 이들에게 이 책은 아일랜드의 문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아직도 이 책의 정확한 제작 연대와 제작 배경에 관해선 수많은 연구자들이 의문을 품고 연구하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숱한 의문들이 풀리지 않는다. 어쩌면 바로 그러한 의문들이 연구자들과 대중들의 발걸음을 이곳으로 찾아들게 만드는 것일 게다.
(오늘밤엔 대충 이 글로 퉁치자. 흐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