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모두가 눈이 멀게 된 것보다 더 두려운 건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2. 시카리오
몇 주 전 아내마저 깊이 잠든 한밤에 홀로 영화 <시카리오>를 보았다. <시카리오>는 경계(線)에 관한 영화다.
마약과의 전쟁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딸마저 카르텔의 손에 잃은 전직 멕시코 검사의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와 ‘케이트(에밀리 블런트)’ 그리고 마약 카르텔에 연루된 부패한 멕시코 경찰 실비오(맥시밀리아노 헤르난데즈)는 각자 경계를 넘은 자들이다. 영화는 전적으로 케이트의 시선을 따르기 때문에 관객들은 ‘실비오’에 대해 감정이입을 하기 어렵다. 세 사람이 한 장소에서 만나는 것은 단 한 순간이다.
알레한드로는 세 사람이 절대 한 장소에서 만나면 안 된다는 듯 그 순간 케이트에게 총탄을 날린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진정한 클라이맥스는 알레한드로의 복수 장면이 아니다. 아내와 딸을 무참하게 살해한 상대방 카르텔의 두목 일가를 모두 살해하고 돌아온 알레한드로는 발코니에 서 있는 케이트에게 당분간은 위험하니 창가에 서 있지 말라고 충고한다.
곧이어 그는 케이트에게 자신들의 작전이 규정에 따라 적법하게 이루어졌다고 서명하도록 강요한다. 케이트가 거부하자 그는 그녀의 턱 아래 총구를 들이대고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한다.
“자살을 당할 수도 있어.”
스스로 죽는 것을 자살이라고 했을 때, 자살을 당한다는 표현은 논리적 모순이지만, <시카리오>의 세계에서 그것은 모순이 아니다.
케이트가 단지 두려움과 공포라고 표현할 수 없을 심리적 압박을 견디지 못해 눈물을 흘리자 알레한드로는 딸의 뺨을 어루만지듯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미국과 멕시코, 또는 법과 무법의 세계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치와와 사막을 가로질러 세워진 국경선을 통해 평행우주처럼 마주본다.
후아레즈의 폭력이 후아레즈에 머무는 동안 ― 후아레즈의 위험이 적절하게 통제되는 동안, 마약의 생산과 유통이 미국 중앙정보부(CIA)의 통제에 의해 관리되는 동안 ― 후아레즈의 사람들은 죽어가지만, 그 경계의 반대편, 케이트가 속한 세계는 안전하다. 그 폭력(위험)이 경계를 넘었을 때, 더 큰 폭력(국가폭력)은 이들을 징치(懲治)한다.
멕시코의 마약카르텔이 자신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로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여 그 시신을 고가도로에 내걸 듯 국가폭력은 경계를 넘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한 멕시코 마약카르텔의 보스 일가를 잔인하게 살해함으로써 후아레즈의 폭력을 관리(조장)한다.
케이트가 살고 있는 세계가 <하이눈(High noon)>의 세계라면, 알레한드로의 세계는 <하이눈>의 경계 너머에 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케이트를 통해 두 세계의 경계를 잠시 열어 보인다.
케이트가 매트의 권유로 전담팀에 합류한 뒤 영화는 곧바로 실비오의 집안 거실을 비춘다. 아들은 밤새 마약을 운반하고 늦잠을 자던 실비오에게 축구 시합에 가자고 조르고 그는 못 이기는 척 집을 나선다. 이후 실비오가 알레한드로에게 사로잡혀 실컷 이용당하다 죽는 순간까지 관객들은 실비오가 왜 등장하는지 장면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알레한드로와 매트의 팀에게 ‘케이트’는 멕시코 마약카르텔 보스를 살해하기 위한 합법적 장치, 다시 말해 그들을 멕시코 마약카르텔 보스와 연결해주는 미국 측의 합법적 루트이다. 그와 반대로 ‘실비오’는 멕시코로 넘어간 알레한드로를 멕시코 마약카르텔 보스와 연결해주는 멕시코 측의 비합법적 루트이다. 그런 의미에서 케이트와 실비오는 성별(性別)도, 외모도 다른 ‘도플갱어’인 셈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평행우주가 존재하는 한 절대 만나선 안 되는 접점이었던 셈이다.
영화의 엔딩에서 드니 빌뇌브 감독은 다시 삶을 이어가는 실비오의 집을 보여준다. 감독은 매우 영악한 사람이다. 그는 이런 방식의 삶이 지속될 것이란 사실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이건 영화일 뿐이야, 영화가 현실을 바꿀 수는 없는 거라고, “자살을 당할 수도 있어.”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다만 그 꽃은 언제나 핏빛일 것이다. 그 경계를 넘어섰다가 돌아온 케이트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그조차 모든 것을 본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고 감독이 엔딩에서 말하고 있지 않은가.
3. 늙은 신생아, 홍콩에 대하여
영화 <시카리오>를 보고난 뒤 알 수 없는 일이 갑자기 프루트 챈 감독의 <홍콩반환> 3부작들 - <메이드 인 홍콩>(1997), <그해 불꽃놀이는 유난히 화려했다>(1998), <리틀 청>(1999)- 이 떠올랐고, 그 영화들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아시아에서 '홍콩'이란 어떤 공간일까. 내 청춘의 연대기는 홍콩영화의 전성기와 함께 한 세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홍콩의 의미는 이제야 비로소 조금씩 다가온다.
홍콩은 영국과 중국이란 두 제국을 같은 뿌리로 하여 태어난 근대적 공간이자 포스트모던한 공간이란 점에서 ‘늙은 신생아로서의 홍콩’이다. 홍콩이란 도시는 중국의 작은 어촌이었다는 원재료가 무엇이었는지조차 잊힐 정도로 서구 근대가 겹겹이 버터와 슈가를 뿌려 쌓아올린 세계이자 이를 다시 서구 근대를 수용한 신중국이 재수용해 다시 중국의 것이 되도록 반죽하고 있는 공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홍콩은 전근대와 근대와 탈근대의 중층결정이 패스트리처럼 겹겹이 쌓여있다. 문득 그 경계를 하나하나 해체하여 들여다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지금의 나로서는 절대 넘어서면 안될 경계인데도 불구하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