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도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년 1월 12일 ~ 1797년 7월 9일)"를 인용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인용했던 그의 글과 말은 대부분 그가 자유주의자 시절에 했던 말들일 것이다.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은 그간 우리에게 개혁적 보수주의자, 공리적 자유주의자롤 알려져왔던 에드먼드 버크, 자유주의자에서 보수주의자로 표변한 에드먼드 버크의 진면목을 잘 드러내주는 책이다.
에드먼드 버크는 영국의 정치인이자 철학자이자, ‘보수주의의 대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대표작은 1790년에 펴낸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이다. 이 책은 지금까지 보수주의의 바이블로 여겨진다. 일본에선 이미 19세기에 번역 출간되었으나 우리는 220년만인 올해 이태숙(경희대 사학과) 교수에 의해 완역 출간되었다.
진보와 보수 논쟁의 역사는 사실 한국전쟁 직후 죽산 조봉암이 진보당을 창당하고 북한의 간첩으로 몰려 법살(法殺)당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 일제하나 해방 직후의 극심한 이념투쟁을 논외로 하는가? 그건 좌우논쟁으로서 보수와 진보(혁신) 논쟁과는 결이 조금 다른 편이므로 구분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우리는 형용모순(形容矛盾)의 언어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혁신적 보수’니 ‘진보우파’니 하는 이야기들이 당대 최고의 문장가 중 한 명이라는 작가 이문열의 입에서 나온다. 그런데 이것을 형용모순이라고 단정해버리면 실제 현실과 괴리되어 버리는 느낌이다. 진보는 제 자리인데 보수는 혁신하고 있다는 건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혁신(innovation)'을 가장 많이 떠들어대는 이들은 급진적 정치 분파가 아니다.
 그들은 다국적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마케팅 이론가들이다. 이들에게 혁신이란 구조조정 등 신자유주의 전략을 통해 인력의 세계적 재배치(인력감축이나 비정규직화 등)를 통한, 전혀 새롭지 않은 이윤창출 구조를 완전히 혁신적인 새로운 이윤창출 구조로 선전하고 있다.
문제는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오래된 미래’라는 더딘 대안이 구체적으로 출현하지 않는 동안 신자유주의, 다른 말로는 금융자본주의라는 실질적인 이윤은 만들어내지 못하는 허수(虛數)의 금융놀음에 놀아난 결과를 우리는 거의 반세기 동안 혁신이라고 굳게 믿었다.
에드먼드 버크의 책이 이 시점에 번역 출간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이제야 우리 사회가 진보와 보수의 진면목을 탐구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잘 알려진 바대로 에드먼드 버크는 1729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부유한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나 당대 최고의 교육(트리니티 칼리지)을 받으며 성장했다. 대학 시절엔 법학을 전공했지만 문학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았다고 한다. 1750년 대영제국의 심장부인 런던으로 건너온 버크는 당시 휘그당의 지도자 로킹엄의 비서로 정계에 진출했고, 훗날 로킹엄이 총리로 선출되자 그의 후원을 받아 브리스틀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그는 거의 30년 동안 정치인으로 의회에서 활동했다.
여기에서 주목해보아야 할 점은 그의 이력이 정치이론가로서가 아니라 현실정치인으로 먼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버크의 정치이론은 도서관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가 맞닥뜨린 현실정치 속에서 연마된 것이고, 그의 입장은 다분히 그가 속해있던 온건개혁파 정당인 휘그당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고 구체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자주 인용되는 그의 명언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시기의 것들이다.
 예를 들어 에드먼드 버크가 영국 왕실을 비판하고,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정책을 비판한 것들이 그런 사례들이다. 이처럼 초기의 버크는 온건한 자유주의자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런 에드먼드 버크에게 하나의 결절점을 제공한 것은 국내의 상황이 아니라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프랑스대혁명의 진행과정을 지켜보았던 유럽의 지식인들 중 상당수는 보편적인 반감을 품었다. 지금의 관점에선 이해가 어려운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당시의 입장에서 보자면 왕의 목을 자르고, 다수의 무지몽매한 자들에 의해 정치권력이 행사된다는 것은 왕이라는 고립된 일인자만 견제하는 것에 비해 훨씬 더 어렵고 난해한 작업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약간 결이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뤼순 감옥에 갇혔던 안중근 의사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거둔 승리를 “쾌하도다. 장하도다. 수백 년 이래 악을 행하던 백인종의 선봉을 한 번의 싸움으로 크게 부수었으니 천고에 드문 일이며 만방이 기념할 자취라 할 수 있다고”고 말했다. 쑨원 역시 “일본이 러시아와 싸워 이긴 결과 아시아 민족 독립의 대희망이 생겨”났다고 토로한 바 있으며 심지어는 제정 러시아를 유럽과 달리 동양의 왕도주의에 입각한 나라로 생각했다. 오늘날 여성에게 참정권이 허용되고, 시민권이 부여되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지만 당시엔 여성과 재산이 없는 사람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책임도 의무도 지지 않는 자들의 무책임한 민주주의’, ‘다수의 독재’로 간주되는 것이 상식이었다.
버크가 미국의 독립 혹은 시민혁명을 지지한데 비해 프랑스대혁명에 대해 격렬히 반대했던 이유 중 하나는 미국의 시민혁명에 비해 프랑스대혁명이 훨씬 더 급진적이고 과격한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앙정부인 연방정부보다 각각의 주정부의 권한이 강했으나 프랑스는 중앙집권적인 왕정에 의해 통치되었기 때문에 혁명은 그 본래의 의미인 아래로부터의 변화인 동시에 위로부터 급격하게 전파되었다. 혁명을 주도한 급진파는 토지의 재분배는 물론 교회의 특권을 폐지하고자 했다(물론 이때의 교회는 가톨릭 교회다). 그에 비해 미국은 신교도들이 종교적 자유를 찾아 이루어진 이민자들의 나라답게 대통령의 취임선서는 오늘날까지 성경에 손을 얹고 이루어진다.
 프랑스혁명은 종교와 분리된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채택하면서 평등을 강조했고, 테르미도르의 반동에 의해 좌절되기 전까지 평등은 자유만큼이나 중요한 덕목이었다. 프랑스혁명을 이끈 지도자들은 현실정치인이라기 보다는 정치이론가(계몽주의)들이었다. 계몽을 통한 이성의 발현이라는 계몽주의의 이성적 낙관론은 노회한 현실정치인의 경험적 진실과 전문성(실용주의)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에게 전문가란 오늘날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영혼 없는 공무원 같은 존재들이었다.
어쨌든 프랑스대혁명에 대(大)자가 붙었던 까닭은 이전의 상식들(앙시엥레짐)과 결별하는 거대한 문화혁명의 성격도 함께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동의 폭이 컸던 만큼 반동하는 힘 역시 매우 클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에 놀란 자유주의 정치세력은 보수화되었고, 이에 따라 보수주의 정치철학은 갑작스런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에드먼드 버크의 표변은 자유주의가 평등주의와 결정적으로 이반되는 현상을 공개적으로 드러냈고, 후세의 사람들은 버크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오늘날까지도 논쟁거리로 남겨두고 있다.
같은 영국 출신의 인물로 버크와 함께 미국의 독립을 지지했고, 실제로 미국 독립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토마스 페인은 에드먼드 버크와 달리 프랑스대혁명을 열렬히 지지했고, 심지어는 프랑스로 건너가 혁명에 동참하여 국민공회의 의원이 되기도 했다. 그는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고찰』을 반박하기 위해 『인간의 권리』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토마스 페인은 루이 16세의 처형에 반대했고, 결국 로베스피에르가 실각되기 전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는 미국 독립의 영웅 중 한 명이었지만 무신론을 주장했다는 오해를 받아 미국에서는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그의 이전 주장들에 기대어 그를 공리적 자유주의자로 해석하지만 마르크스는 버크를 가리켜 ‘고명한 궤변가이며 아첨꾼, 철저하게 저속한 부르주아지'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먼드 버크를 부활시킨 것은 마르크스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냉전체제의 국면에서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대혁명의 급진주의에 대한 비판은 보수주의,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에게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급진주의로 몰아 비판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잠들어 있던 사상가가 부활하는 데에는 다 그만한 까닭이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에드먼드 버크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는 까닭은 급진적 정치세력의 출현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자본주의의 위기로 인해 새롭게 시작된 자본주의에 대한 학습 열기가 보수주의에 대한 학습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보는 편이 좀더 그럴 듯 해 보인다. 마르크스가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던 것처럼 에드먼드 버크 역시 보수주의(保守主義 conservatism)란 말을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찾아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묘한 공통점이다.
* 내가 알기로 보수주의란 용어는 프랑스의 시인 샤토브리앙이 발간하던 잡지의 제호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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