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9년의 어느 연말에 나는 이런 내용의 일기를 쓴 적이 있다. 그해 홍성담의 판화를 처음 발견하고 아마도 그 결기를 몸소 간직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였을 지도 모른다. 그 판화의 제목은 <나더러>였다.
나더러 야훼를 팔아 목숨을 구하라 하지 마시오
나더러 민중을 팔아 부를 얻으라 하지 마시오
. 나더러/ 1987년 작품/ 홍성담
그리고 나는 이런 글을 썼다.
- 벙어리는 어떻게 우는가?
차례로 허물어져가는 겨울 바다의 모래성만큼이나 연약한 사람이다. 파도는 잔인하기 때문에 그렇게 세찬 것이 아니라, 으레히 그래왔던 것처럼 몰려왔다가는 또, 왔던 것처럼 그렇게 가는 것이다. 사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져가는 모든 일상의 타성에 젖어 내일도 오늘처럼 살고 마는 것은 비겁이다.
첫눈이 내리던 날! 감상에 젖어서는 안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감상에 젖어선 안 될 만큼 우리 시대의 나를 포함한 젊은이들의 빼앗길 수 없는 고통과 고뇌의 늪은 깊었다. 모든 가난한 이의 가녀린 어깨를 짓누르는 그 어떤 힘의 실체를 우리는 결코 용납해서는 안된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그 어떤 존재도 우리는 무자비하게 이겨 나가야 한다.
내가 언젠가 친구들에게 "벙어리는 어떻게 우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많은 당혹과 의외의 눈초리를 맞이했다. 그렇다면 벙어리는 어떻게 우는가?
벙어리는 입으로 소리내어 울지는 못한다.
벙어리는 온몸으로 운다.
온몸으로 철저하게 운다.
진지하게 운다.
절실하게 운다.
우리는 모두 벙어리의 세상에 던져진 말 못하는 벙어리들! 눈으로 울지 말고, 입으로 울지 말고, 온몸으로 철저히 거부하고, 진지하게 싸우자.
(1989. 12. 27.)
나는 그 무렵 철저하고, 진지하고, 절실한 삶을 꿈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뭐가 그렇게 처절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알 수 없다기 보다는 지금 이 시점에서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해야 옳을 것이겠지만)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두는 것과 상관없이 나는 지금도 내 삶의 방법론적인 운용의 가치를 저 세 마디로 압축해 두고 있는 셈이다. 스스로를 평가하는 일은 인생에 있어서 늘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스스로를 돌이켜 반성하는 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수단일 테니까. 모든 생명체는 지난 겨울을 기억하고 반성하고, 이를 후세에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므로 반성이 인간만의 것이라고 강변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반성과 성찰은 우리가 살아있는 생명체란 유일한 증거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인생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반성한다. 반성이란 행위 자체는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이지만 반성한다고 해서 과거를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미래 지향적인 행위이다. 나는 도대체 반성하지 않는 인간을 신뢰할 수 없다. 그것은 실수 없는 인간이란 것에 대해 애정을 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다.
<논어(論語)> 술이편(述而編)에 보면 공자 자신이 이런 말을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학문이라면 나도 대략 남만큼은 한다. 그렇지만 몸소 군자의 도를 행하는 것은 아직 이루지 못하였도다." 라는 것이다. 동양 최대의 성인이라고 하는 공자조차도 스스로 늘 주장한 바대로 행하고 살지 못했다는 것을 자인한다. 공자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그는 완벽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존경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완벽하지 못함을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존경받는다.
치열한 인생은 피곤하다. 스스로도 피곤하고, 남들도 피곤하게 만든다. 나는 치열함은 타인에 의해 혹은 타인의 인정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치열하다는 것은 순전히 자신과의 대면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 너는 네 인생을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하는 오해 아닌 오해를 받는다. 하긴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렇게 살아온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열하다는 말로 넘어오게 되면 나는 그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치열하다는 것은 결핍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충족되는 순간. 치열함은 의미를 잃는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인생이 치열하다고 느끼고 계시는 분들은 분발해야 한다. 스스로 그렇게 느낀다는 것, 그것은 사기이므로.....스스로의 치열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분들에게는 위로를 보낸다. 당신의 삶은 이미 충분히 치열하다. 치열한 삶과 치졸한 삶의 경계를 구분짓는 단 하나의 구분 근거는 반성에 있다. 당신이 반성을 멈추지 않는 동안 치열한 삶은 계속된다.
노마드(유목민)에게 사유는 어려운 일이다. 사유와 반성이란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되돌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길 위의 인생"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우습게도 멈춰 섰을 때뿐이다. 그럼 가던 길을 계속 가보도록 하자. 나는 오늘도 불알을 덜렁이는 낙타를 타고 치열과 치졸의 경계를 넘나든다. 흐르는 사막에 떠밀려 쾡한 눈으로 세상을 두리번거리며... 별이 보이지 않으면 어떠랴. 별을 찾을 수 없을 땐 마음 가는 대로 걸어가면 되는 것 아닌가. 누군가는 길을 찾을 테니.....
나의 치열함은 이런 것이다. 길 위의 던져진 인생. 가다 서고 두리번거리다 다시 가는.....인생. 멈췄을 땐 흐르는 사막이 나의 길을 덮어줄 것이다. 참으로 다행스럽지 않은가? 우리는 아름다운 시체를 남길 일도, 멋드러진 비석을 세울 일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편안하다. 그저 살아갈 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