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흑사병의 시대
- 혐오와 노예의지
다음 강의는 르네상스 시기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는데, 이 시기의 특징 중 하나로 흑사병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글을 쓰다 보니 문득 이 시대의 흑사병과 스스로의 몸을 채찍직하며 고행하던 기독교 광신도들의 움직임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실과 혐오의 정치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사병은 14세기 중반, 그러니까 1347년 무렵 킵차크(Kipchak) 군대가 제노바 시를 향해 페스트 환자의 시신을 쏘아 보냄으로써 유럽에 전파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긴 하지만, 이전부터 동방 원정에 나섰던 십자군 병사들이 보석과 동방 문화를 약탈해 오면서 부수입으로 한센씨병(나병)과 흑사병을 얻어 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로마제국 말기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페스트는 이 무렵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상인들의 배와 함께 지중해의 여러 항구들로 퍼져나갔고, 이때부터 순식간에 전유럽으로 퍼져 나간 흑사병은 불과 수년 동안 시칠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과 프랑스, 유럽 중부의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을 거쳐 벨기에, 네덜란드, 그리고 처음 선보인 지 고작 3년여 만에 스칸디나비아 국가에까지 이르렀다.
흑사병은 쥐벼룩 외에 인간을 통해서도 전염되었기 때문에 도시에서 더욱 위력을 발휘했고, 그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믿으면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수도원에서 가장 큰 희생자를 냈다. 이렇게 되자 겁에 질린 사람들은 사람을 찾기 힘든 시골 한적한 곳을 찾아 도망치듯 떠났다.
한편 흑사병이 유럽 전역을 공포에 떨게 하자 모든 외국 선박에 대해서는 항구에 내리기 전에 40일 동안 검역 정선을 명령하기도 했다. ‘검역(檢疫)’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 ‘quarantine’은 40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quaranta’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니까 40일 동안 환자가 발생하지 않은 배에 한해서 상륙을 허가한 것이다. 이는 꽤 합리적인 방안이었는데 페스트의 잠복기가 길어야 10일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조치가 페스트의 확산을 완전히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페스트균을 보유하고 있던 생쥐와 벼룩은 자유롭게 하선하여 돌아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엔 ‘전염(傳染)’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흑사병의 창궐을 지진, 혜성, 나환자, 집시 그리고 특히 유대인의 탓으로 돌렸다. 늘 그렇듯 역병(疫病)은 신의 천벌(天罰)로 여겨졌기에 독일의 기독교 광신도(Flagellant)들은 세상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대중 앞에서 스스로의 몸에 채찍질을 가했다.
이들 채찍질 고행파 집단은 스스로의 몸에 피가 철철 흐르도록 채찍질을 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을 전염병 전파의 주범으로 몰아 그들의 피로 대지를 적시는데 앞장섰다. 전 유럽에서 유대인 대학살이 시작되었고, 독일 마인츠에서만 1만 2,000명의 유대인들이 산 채로 불탔다. 그 결과 서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대거 동유럽으로 집단 이주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폭력적인 사태는 당대 유럽인들의 인식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페스트가 기승을 부릴 때는 아주 건강하던 사람도 24시간 만에 비참하게 죽어갔다. 이런 현실은 세상사의 신비를 소박하게 설명해보려는 모든 노력을 철저히 불신하게 만들었다. 이때까지 중세교회의 주된 철학이었던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의 스콜라철학과 합리주의 신학에 대한 믿음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갑작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거듭 경험하면서 자연히 암울한 인생관이 등장하여 거리마다 사람들이 떼를 지어 ‘죽음의 무도(La danse macabre)’를 추었고, 이것은 또한 당대 미술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인식의 변화는 중세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충격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중세보편교회의 중요한 신학적 관점이었던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은 신의 선택에 의한 구원(노예의지)으로 변모해 가게 되었다. 페스트의 창궐과 같은 거듭되는 위기에 대해 중세의 일상을 지탱해왔던 가톨릭교회는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고, 이후에도 적응하는 데 몇 세기나 걸렸다.
감당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는 거듭되는 위기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자신을 스스로 학대하며 희생양을 찾는 것은 아닌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