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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世襲)의 습격(襲擊)
나는 신자유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로도 극복하지 못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지적하는 문화비평 작업을 꾸준히 수행하고 싶다.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큰 위기요인은 물론 자본주의 자체의 구조적 모순에 따른 것이나 그 내부의 문제 중 하나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세습의 문제다.
글제목을 저렇게 뽑았지만, 오늘 갑자기 생각나서 한 것이 아니라 "내일을 위한 질문(Question for Tomorrow)"이란 제목으로 준비하고 있는( 황규관 형! 나 노는 거 아니우 ㅋㅋ)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계속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다. 세습의 '습'과 습격이란 말의 '습'은 같은 한자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만 놓고 보더라도 세습이 지닌 문제를 잘 보여준다.
어제 하남석 선생이 언급하여 새롭게 생각을 더한 부분인데, '출신이나 가문 등이 아닌 능력이나 실적, 즉 메리트(merit)에 따라서 지위나 보수가 결정되는 사회체제'를 일러 이른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라 한다. 이 말은 잘 알려진 것처럼 영국의 사회학자 M. 영이 만든 용어로 우리 말로 '실력주의'나 '업적주의' 정도로 옮겨지고 있다.
어느 사회에서 또는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신상필벌(信賞必罰), 다시 말해 메리트를 측정하여 그에 합당한 보상 또는 처벌을 가하는 것이다. 이것을 측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그 사회에 축적된 역사와 문화적 차이에 따라 합의된 방식과 수단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가장 중요한 원칙은 공정성과 기회 평등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공동체의 유지에 심각한 에너지 손실을 넘어 붕괴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국처럼 매우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또 다른 국가들의 경험에 비추어 매우 안정적으로 세습제 귀족정치로부터 메리트 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사회조차도 이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해결과제로 지적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런 문제를 대하는 일반 대중의 시선이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식의 체념으로 연결된다한들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저와 같은 체념은 사회의 활력과 동력을 심각하게 훼손하며 결과적으로 그 사회의 역동성을 저하시킨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영국에서 주로 활동했던 랄프 구스타프 다렌도르프는 만하임을 계승(혈통원리에서 재산원리를 거쳐 업적원리로 이행)하여 재산사회는 업적사회로 이행하고, 이 사회는 다시 교육사회로 전화해간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래서 메리토크라시는 자연스럽게 학력사회(또는 학위주의, 학력, 학벌에 의한 지배)를 뜻하는 '디그리오크라시(degreeocracy)'로 연결된다.
문제는 단순한 테크노크라트가 아닌 사회의 'hierarchy'를 이루는 계층에 오를 길은 사실상 막혀있지만, 그것을 위장하는 형태로 '학력'이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학력이 학력(學力)이 아니라 학력(學歷)인 사회에서 재산 정도에 따라 주거지가 세분화된 부동산계급사회에서 아이들은 얼핏 다른 이들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이미 그가 살고 있는 지역과 학교에 따라 사실상 같은 계급구성원들과 경쟁하면서도 가보지 못한 주거지에 살고 있는 가상의 경쟁자들과도 경쟁해야 한다.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불안은 배가되고 공포는 가중된다. 이와 같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지역의 좀 괜찮은 가정의 학부모와 자녀들은 괜찮은 학교, 다시 말해 부동산계급사회의 상층부를 점하고 있는 이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으로 이주하고, 교육에 좀더 많은 비용과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부모와 자녀를 앉아서 손쉽게 차지할 수 있는 학교들은, 솔직히 잘 가르쳐서가 아니라 거저 먹기 식으로 더 많은 아이들을 대학에 보낸다. 그와 같은 통계는 다시 한 번 이 지역의 부동산 가격을 인상시키고, 지역의 부동산 소유자들은 가만히 앉아서 더 많은 돈을 벌게 된다.
점점 더 많은 학생과 학부모를 빼앗기는 지역에선 그 대안으로 다시 자사고를 신설하려 들고, 그 명분은 서울 또는 중심에 빼앗기는 지역의 인력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나는 자사고 설립에 반대하고, 자사고 폐지에 동의하지만 지역민의 입장에서 보면 과연 이것이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정책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다). 사실, 이 문제는 단지 대한민국의 일국적 차원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좀더 확대해보면 세계 자본주의의 교육세계화와도 맞물려 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여러 선진국들이 있지만 한국에서 특히 잘 팔리는 것은 미국 박사들이기에 미국은 한국의 주요 인력들을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절반쯤 미국 사람을 만들어 다시 한국으로 보낼 수 있다.
만약 자본주의가 망한다면, 나는 자본주의에 내재된 대단한 구조적 모순 때문이라기 보다는 자본주의 시스템조차 세습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부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가치는 인류사를 기준으로 보면 지극히 찰나의 역사에 불과하지만, 세습은 인류사에 있어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전통이기 때문이다. 세습은 단지 자본주의나 우파적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이 땅에서 진보적 학문과 생태적 고민을 하고 있다는 이들에게도 똑같이 나타난다.
진보, 보수와 무관하게 우리나라의 대표출판사로 자리잡은 모 출판사는 임프린트들을 자녀들에게 분봉해주었고, 한 시절 진보적 사회과학 출판사로 알려진 출판사는 대표가 자녀들에게 2세 승계를 진행하는 중이고, 생태전문 잡지, 출판사로 널리 알려진 모 매체에도 자녀가 취업해 이미 활동하는 중이고, 1970년대 우리 사회의 지식담론을 이끌었던 모 계간지의 편집위원에 그 자녀가 합류하여 활동하고 있다. 세습이 무서운 까닭도 아마 거기에 있으리라... 머리에서 가슴까지 이르는 길이 가장 먼 길이라고 누가 그러더냐....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 학력주의 내지 이와 관련한 고민의 상당 부분은 박권일 선생이 준비하고 있다는 전설(언제 나올지 도무지 알 수 없는)의 책 내용을 알지는 못하겠으나 그와 나의 상성과 스타일을 생각해볼 때, 또 그의 고민들을 엿보고 있는 처지라서 상당 부분 겹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중인데, 정작 본인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ㅋㅋ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