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성원이 쓴 서평집이다. 표지 상단에 박힌 ‘바람 구두 인생 서평’이 눈길을 끈다. ‘바람구두’는 저자를 상징하는 말이다. 고등학생이던 1987년 이후 3년간 막노동자로 전국을 떠돈 이래 그는 늘 방랑을 갈구했다. ‘인생 서평’은 저자가 책을 읽고 글을 쓸 때 자신의 삶과 연결지었다는 뜻이다. 뜨란 출판사의 편집장은 저자가 쓴 500편 이상의 서평에서 저자의 삶 일부가 드러난 원고만을 골라 이 책을 기획했다고 한다.
서평에서 책과 관련 지어 자신 인생 이야기를 쓴다는 건 뭘 뜻할까? 책은 고정된 정보 매체로 독자와 분리되어 있다. 독자가 책을 선택하고 손에 들고 읽어나가야만 책은 그 독자의 마음에서 살아 숨 쉰다. 하지만 독자가 책을 읽는다고 그가 책에 마음을 온전히 여는 건 아니고, 책도 자신의 가치를 독자에게 완전히 넘겨주지 않는다. 독자가 읽은 책이 독자 마음에 어떤 파도도 일으키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도 흔하다. 그렇게 단순히 정보만 전달한 책은 다시 독자와 분리된다. 독자가 자신의 인생과 연결해 책을 읽으면 책은 독자 마음으로 녹아 들어가 독자 인생을 살찌우거나 행로를 바꾼다.
저자는 그 결과로 나온 이 책을 “책을 악보 삼아 나란 존재를 울림통 삼아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담았다”고 말한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곧 자기성장의 길이다.
‘자기성장의 길’을 걸을 사람이 명심할 첫 번째 신조는 ‘눈물 없이는 진짜가 되지 못한다’이다. 지은이가 고른 첫 번째 책인 『헝겁 토끼의 눈물』에서 헝겊 토끼 인형은 소년에게 사랑받고 진짜가 되고 싶어 한다. 인형은 오래전부터 소년의 방에 머물던 늙은 말 인형에게 묻는다.
“모두들 자기만이 진짜라고 자랑하는데, 진짜라는 건 도대체 어떤 건가요? 몸에 태엽이 붙어 있는 것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 진짜라는 건 몸이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것이 아니야.”
가죽 말이 말했다.
“우리 몸과 마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걸 말하는 거야. 만약 그 장난감을 갖고 있는 아이가 그 장난감을 그저 놀잇감으로만 여기지 않고 아주 오래도록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장난감은 진짜가 되는 거지.”
“진짜가 될 때 아프지는 않나요?”
토끼가 물었다.
“때로는 아프기도 하지.”
가죽 말이 말했다. 이 늙은 말은 모든 일을 언제나 정직하게 말해주었다.
“하지만 진짜가 되면 아픈 것 따위에는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단다.”
헝겊 토끼 인형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진짜가 되고 싶어 한다. 진짜가 될 때 아프기도 하지만 진짜가 되면 아픈 것 따위에는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 읽고 쓰면서 지은이는 진짜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왠지 읽고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하고, ‘시대와 공명’할 수 있어야 하며, 끊임없이 앞서간 선각자와 행동가를 생각하면서 ‘다른 삶의 가능성’도 찾아봐야 한다. 책은 1장부터 4장부터 그런 문제의식 아래 지은이의 독서를 따라 간다.
로버트 코마이어의 『초콜릿 전쟁』 은 오늘날 미국의 청소년 소설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출판 전후로 적지 않은 논란을 겪어 출판되기 전에는 일곱 개의 주요 출판사가 출간을 거절했고, 출판된 이후에는 학교와 도서관들이 강독 금지와 대출 금지 조치를 내렸다. 청소년 소설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작품 분위기가 어둡고 자아가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냉철하게 살피고 있다. 주인공 제리는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생활하는 평범한 학생이다. 그는 학창 시절 동안 풋볼팀에서 뛰고 싶다는 소박한 희망을 품고 있으나 학교의 전통 행사인 초콜릿 판매를 거부하면서 그의 소망은 철저히 망가진다.
지은이는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여 사회를 통제하듯 학교교육이란 생각하기에 따라 사회의 통제와 폭력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묻는다. 『초콜릿 전쟁』에 나오는 아이들이 졸업한 뒤 맞닥뜨릴 사회가 학교 현실보다 덜 절망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의 아이들이 부딪히는 학교와 사회는 둘 다 무시무시한 괴물은 아닐까? 『초콜릿 전쟁』의 작가는 청소년 소설로서 결론이 너무 암울하다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 슬픈 일입니다. 현실과 마주한다는 것은.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네버랜드에서 살게 될 뿐입니다. 그곳은 성장도 승리의 가능성도 없습니다.”
지은이는 1987년, 고등학생 신분으로 서울지역고등학생운동연합을 결성해 교육민주화를 주장하며 명동성당에서 벌어진 농성시위에 참여했다. 『초콜릿 전쟁』의 제리처럼 고등학생이었던 지은이는 절망적인 현실과 마주한다. 그리고 학교를 그만둔다. 지은이의 고등학생 체험은 『초콜릿 전쟁』의 제리와 닮았다. 그래서 지은이는 『초콜릿 전쟁』의 불행한 결말을 통해 현실이 비록 절망일 뿐일지라도 도망치지 말고 직시하라고 말한다.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보에티가 쓴 『자발적 복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억압인 ‘노예근성’을 경고한다. 보에티는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를 은밀하게 노예로 만드는 유혹이다. 이에 비하면 폭력으로 통치하는 방법은 그다지 겁나지 않는다. 권력자들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 노예근성이라는 독으로서 유혹한다.”고 말한다.
지은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자발적 복종』을 뼈에 사무치는 느낌으로 읽는다. 2007년 말 삼성 비자금 문제를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 사건 때문이었다. 김용철 변호사는 특수부 검사 출신으로 1998년에서 2004년까지 7년 동안 삼성그룹의 고위 임원으로 일했다. 그는 삼성이 정관계에 전방위적으로 로비를 해왔다는 내부 고발을 한다.
삼성 특검이 발족되나 특검은 삼성의 고위 임원과 삼성에서 로비를 받았다는 정관계 인사를 제대로 수사하지 않는다. 결국 비리는 곪고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를 넘어 이재용-박근혜-최순실이 연루된 뇌물공여 사건까지 연결된다.
지은이의 바람구두를 신은 삶은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은밀한 유혹’에 말려드지 않으려는 노력이 아니었을까? 한 직장에 머물러 있으면, 한 장소에 붙박혀 지내면 안정된 곳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이 생기고 그게 더 강해지면 ‘노예근성’으로 굳어지는 게 아닐까?
지은이는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이자 문화비평가로 일하고 있다. 직업 때문이기도 하지만 책 읽기를 좋아한다. 이 책에 실린 서평을 읽으면 지은이의 삶과 읽은 책이 얽히고, 또 그 얽힘이 다른 책으로 뻗어나가 도시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책을 옆에 끼고 자전적 성찰을 하며 걷는 바람구두 인생은 ‘진짜’로 가는 길이 아닐까.
[출처] [독서일기 237] 길 위의 독서/ 전성원/ 뜨란 |작성자 그리샴
https://blog.naver.com/jmolaw/22127274765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