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석영과 최인훈
나는 내가 막노동꾼 출신이란 점에 묘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신체를 단련하는 일에서 오는 쾌감 또한 알고 있다. 땀 흘린 뒤에 마시는 막걸리 한 사발이나 맥주 한 잔의 느낌을 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내 안에 숨겨진 지식인 경향성 혹은 지식인이고 싶다는 묘한 갈망도 잘 알고 있다. 나는 육체에 대한 찬미와 동시에 폭 넓은 지식과 깊이 있는 사유에 경도되어 있는 인간이다. 내 안의 자아는 강한 육체에서 오는 마초적인 자부심에 끌리면서 동시에 고우영 삼국지에 등장하는 제갈공명의 연약한 손동작과 하얀 눈밭에 떨구고 간 선병질적인 지식인의 각혈에 흠모를 아끼지 않는다.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 좋아하는 소설가가 누구냐는 질문에 나는 거침없이 "황석영과 최인훈" 혹은 "최인훈과 황석영"을 들었다. 내 대답을 들은 선생님은 최인훈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황석영에서 고개를 가로저었었다. 황석영이 내 실제 삶에 근접한 '경험의 세계'를 반영하는 작가였다면 최인훈은 내가 경사된 세계, 흠모하는 세계의 저 편 '이데아의 세계'를 반영하는 작가였다. 한 사람은 언제나 과도한 실천가에 다변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과소한 실천에 눌변이었으나 한 번 말문을 열면 사자후를 토해냈다. 과다한 실천과 과소한 실천 사이에 있었지만 내가 볼 적에 황석영은 언제나 '우파'였고, 최인훈은 '좌파'였다.
최인훈을 분단작가라고 규정하는 경향성이 있지만 비록 그가 '광장'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월남한 실향민 작가라는 존재적 기반을 가진다 하더라도 그의 사유는 '남과 북' 어디도 선택하지 않았으며 한국이라는 일국적 차원을 넘어선다. 그의 과소한 실천성은 실제 그의 삶이 거의 은둔에 가깝다는 점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언제나 작가는 작품으로 이미 모든 것을 말하고 있으며 내가 읽기에도 그는 작품을 통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말들을 토해냈다. 문제는 그가 낸 수수께끼의 단면을 풀어낸 오이디푸스가 우리나라에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풀어냈다고 한들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구원될 수는 없는 현실 조건이 고스란히 남게 된다는 딜레마가 있다. 문학에서 성취되는 깨달음이 실천으로 구현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황석영은 진보적이라는 저간의 평가와 달리 그의 문학외적인 실천은 대부분 민족적이거나 현실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편이다. 그 스스로 '광대'라 평하는 것, 천인으로 자부하고, 실제로도 시대의 광대 노릇을 자임한다. 나는 오늘 <한겨레>의 최재봉 기자와 그가 나눈 대담에서 그의 아내가 했다는 '메시아' 노릇 좀 그만하라는 충고가 실제 아내의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실제로도 그의 아내가 했다치더라도 그 말을 그가 직접 꺼낸 까닭이나 의도는 그 자신도 일정하게 그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보다 좀더 엄밀하게 말해서 황석영은 스스로를 '메시아'보다는 '지장보살'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내 한 몸 더러운 진창에 떨어지더라도 민족의 화해를 일궈낼 수 있다면...' 오랫동안 그의 작품을 읽어왔고, 내 인생의 경로에서 상당 부분 그에게 빚지고 있다고 느끼는 한 사람으로 그의 진정성을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다만 그에게 후학으로서 드리고 싶은 충고 한 마디는 이렇다. "어차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자기 나이 60이 넘은 사람은 자신이 걸어왔던 과거의 삶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요. 마지막까지 최일선에 서고 싶은 충정은 이해하나 이제 누군가의 어깨에 손 하나 얹어주고 등 두드려주는 꼭두쇠 어르신이 되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세대에선 잃어버린 어른이 너무나 많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