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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이 정말 바뀌기를 원하고 있을까
신현수
1.
내가 아무리 후배들의 뒤꽁무니라도 따라다니며 살아가기로 하였다 하여도,
내가 아무리 후배들이 하는 운동 언저리에서나마 평생 지내기로
결심하였다고 하여도,
이런 일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냥 폼만 잡고 왔다 갔다나 하며 살려고 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이런 일까지 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지금 고등학교 국어 선생에다가,
명색이 시인에다가,
인천연대 수백 명의 회원을 대표하는 상임대표에다가,
중학교와 초등학교 다니는 두 아이의 아버지에다가,
벌써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이 되었는데
어떻게 집집마다 초인종 누르고 다니면서
안에 계시냐,
문 좀 열어 달라,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경찰에게 죽도록 얻어터진 일에 대해서 들어보셨느냐,
16만 평 부평 미군기지에 정작 미군은 9명밖에 없는 거 알고 계시냐,
서명 좀 해 달라, 천 원 내시면 신문에 이름 내드리겠다,
어려우시면 유인물이라도 꼭 읽어보시라,
다음에 또 찾아뵙겠다,
이런 쪽팔리는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차라리 내게 학교를 그만두라고 하거나
담배를 끊으라거나, 술을 먹지 말라거나 하는 게 낫지,
그런 일은 정말 못하겠다,
정말로 하기 싫다.
그러다가 학부형이나 제자라도 만나면 어떻게 하냐,
뭐라고 말 하냔 말이다.
그런 일까지는 제말 시키지 말아 달라.
2.
그런 일은 제발 시키지 말아 달라…….
제발 시키지 말아 달라…….
말아 달라…….
나는 고등학교 국어선생이라
큰 이변이 없는 한 매달 월급 꼬박꼬박 나올 테고
내가 하는 인천연대는 민민운동도 아니고
요즘 유행하는 소위 시민운동이니
당장 잡혀갈 염려도,
당장 학교에서 쫓겨날 염려도 없으면서,
몇 백 명이나 되는 인천연대 상임대표이니 제법 폼도 나면서
그러면서 남들처럼 게으르거나 나태하게 살지는 않는다는 자부심도
스스로 느껴가면서
노숙자가 쓰레기통 옆에서 얼어 죽고
그 시체가 쥐가 뜯어먹을 때까지 사람들이 몰랐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아직도 이런 일이 있다니 가슴이 몹시 아프군,
적당히 분노나 하면서.
3.
나는 이 세상이 정말 바뀌기를 원하고 있을까?
내가 쓴 모든 글,
내가 참석한 모든 자리에서
입버릇처럼, 마치 관용구처럼
쓰고 떠들어댔던
더불어 함께 잘 사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골고루 잘사는 세상을
나는 정말로 바라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세상이 정말 바뀌기를 원하고 있을까?
- 신현수, 『나는 좌파가 아니다』, 작은숲, 2012.
● 어릴 때, 내 곁엔 꼭 필요한 어른이 없었다. 그 때문에 나는 항시 어른을 갈망했다. 어느덧 철이 조금 들어 세상이 온통 불만이던 시절을 건너가며 나는 더 이상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1987년으로부터 1997년의 십년 세월을 가파르게 살면서부터는 마음속에 더 이상 어른을 품지 않았다.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10대에서 20대의 시절, 거의 대부분을 나는 위선을 비웃으며 냉소로 살았다.
두 해쯤 전 공저를 써달라는 제안을 하나 받았다. 책 제목은 가제이겠으나 『고등학생 운동사』였다. 87년의 어느 시기에 잠시 그런 운동이 있었고, 그 시절에 멋모르고 참여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선배랍시고 글 한 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쓰긴 쓰기로 하여 계약금도 받아 챙겼는데, 도무지 글이 나가지 않아서 다들 원고를 보냈다는데 나만 못 쓰고, 못 보내고 있다. 틈날 때마다 원고를 만지작대면서.
함께 운동했던 친구 중에 둘이 죽었다. 한 명은 사고, 한 명은 자살... 그리고 고등학생 운동 후배 중 하나는 대학에 가서 분신했다. 그 사람들 모두와 친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유독 한 녀석은 그 시절 이후 십 년여 세월을 그리워했으나 만나지 못했었다. 간신히 다시 만나게 되었을 무렵, 그는 내가 그리워하던 옛 모습 그대로였으나 그의 마음속은 꼭 그렇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그를 만나고 두 해쯤 지난 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았던 원인에 대해 나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다.
고교를 졸업하고 잠시 공장, 막노동판을 전전했던 3년여의 기간 동안, 나는 내가 활동할 수 있을 만한 공간을 찾았었다. 그러나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운동권, 학출’이란 말에 고졸자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대학에 갔다. 잠시 광고회사를 다녔다. IMF 외환위기 직전에 정신을 차려보니 지금 내가 뭘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인가? 반성과 회한이 들었다. 그런 반성과 회한의 우연스럽지 않은 인연으로 찾아든 곳이 지금의 새얼문화재단이고, 황해문화였다.
선거가 끝나고 한 선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본의 아닌 칭찬을 들었다. 내용인즉 어려운 시기, 모두가 숨겨진 위선의 민낯을 드러내는 상황에서 너는 잘도 버티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언젠가 나는 나보다 앞서 세상을 등진 세 명의 벗들에 대해 “내 마음속의 빚이자 빛”이라 말한 적이 있다. ‘부끄럽다’는 감정은 내게 있어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이고, 여전히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유일한 방도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나는 그 시절, 전교조 선생님들을 가장 미워했었던 것 같다. 가장 가까이에 있었고, 가장 의지했으나 나의 처지와 가장 다른 사람들이기도 했다. 인천에서도 먼발치에서나마 신현수 선생님을 뵙고, 알고 있었지만, 굳이 가까이 하지 않았고 않으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선생님을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금도 이 시를 읽으며 공연히 눈물이 차오른다. 이제는 나도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어른이 되었다.
정말 하기 싫은데, 여기저기 후원 좀 해달라고... 우리 잡지 내용이 참 좋은데 한 번 읽어달라고... 당장 잡혀갈 염려도, 당장 쫓겨날 염려도 없으면서, 월급도 따박따박 타 먹고 있는데... 더 열심히 못 살아서 그들에게 미안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름도 없이 그늘에서 조용히 피었다 간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세상의 작은 진보를 위해 평생을 바쳐 노력했으나 역부족이었던, 그래서 그것이 미안하고 부끄러운 사람들, 그걸 알아주는 사람조차 없는데,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데, 도리어 이제는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도 매순간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부끄럽다. 부끄럽다 말하며, 미안하다, 미안하다 말하며... 언젠가 선생님은 내게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당신이 전교조 선생님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당신이 내게 미안할 것이 무엇인가. 멀리 흘러가지 않고, 여기 계신 것만으로도, 여기 계셔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말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시절인데 말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