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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 속의 여자
- 정은숙
스무 살, 서울로 떠나는 내게
경제 비상용으로 끼워진 금반지
그 용도를 찾지 못해 오랫동안 머물렀네.
젊음이 상처가 되는 밤마다
손수건 대신 눈물 닦아주던
손가락의 반지
그마저 위로가 절로 되던 둥근 해 같은
눈물이 닿은 손가락은 더 뻑뻑하게 조여왔네.
구애의 반지 그 위에 새로 끼워졌지만
빛을 잃은 그 반지 뽑혀지지 않았지.
부끄러워 입을 가린 사진 속에서
선명하게 떠오르게, 그 반지
서른 살, 손가락 마디가 굵어져
빼어볼 수 없어 언제나 같이 있네.
새벽에 문득 깨어나 부은 손가락 만지며
그 손가락 살을 누르며 존재를
빛내주던 그것,
십년 동안 변함없이 머물렀던
생의 하사품, 추억의 금빛 물결
이제 온전히 내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
반지 속의 나날이여.
● 정은숙, 『비밀을 사랑한 이유』, 문학동네, 2021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동안 키워주셨던 숙부모 댁을 나왔다. 공장으로, 동네목재소 야방으로, 떠돌이 막노동자로 3년을 사는 동안, 초등학교 때부터 모아왔던 우표 책이며 고교시절 애써 모았던 소설이나 시집들은 정처 없이 흩어져 버렸다. 살면서 몇 차례 책의 소실이 있었다. 내가 사라지면 갈 곳 없이 사라졌을 책들이었고, 어디 헌책방에 내다 팔아봤자 그럴듯한 밥이 되긴 영 어려웠을 터다.
평생 내 소유의 집이 아니더라도 살아갈 수 있는 집이 있었거나 하다못해 머물 곳이 있었던 사람들은 경험해볼 필요 없었을, 인간에게 살림 둘 곳이 없다는 경험은 뿌리가 뽑히는 경험이다. 유목민처럼 아주 적은 짐만으로 살아야 했다. 언제 그만두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고, 언제 다른 현장으로 이동하게 될지 모를 일이므로 짐은 최소한의 것만 허용되었다. 그 시절에 나는 더플백 하나에 모든 살림을 챙겨넣을 수 있을 만큼 가벼운 몸이었다.
공사장 숙소에 더플백 하나를 던져두고, 자물쇠를 채워두었다. 그것이 내가 이승에서 짊어진 짐이었다. 아마도 그 안에는 황지우였던가, 기형도였던가의 시집이 들어 있었다. 어쩌면 이성복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가끔 공사장이 쉬는 날엔 왜관읍 장터 서점에 나가 신간이 나온 것이 있나 살펴보던 시절, 누군가 내 짐을 반짝 들고 가버린다 한들 나는 아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그 안에 든 것이라곤 낡은 속옷 몇 장과 공사장에서 편하게 입을 만한 잠바떼기 한 벌에 노트 한두 권 정도였을 테니 말이다. 그때는 공사장에서 일하는 기공들 목에 치렁치렁 걸린 금목걸이가 비상용 금고란 사실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고 순진했다.
그런 경험 끝에 대학생이 되었고, 어머니를 만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2년 정도를 함께 살았다. 다시 헤어질 무렵, 어머니는 내게 금목걸이를 해주었다. 어머니가 내게 주는 마지막 전별금이자 비상금이었던 셈이다. 그나마 아버지보다 나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미국에서 가져온 낙타털 담요 한 장만 내게 남겼으니 말이다. 그 담요는 너무 까끌거려 도저히 덮을 수가 없었다. 평생 동안 몸에 금붙이를 붙여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어머니가 주신 금목걸이를 한 적이 없다. 시인과 달리 나는 그 물건에 애틋한 마음이 없었나 보다.
아내 앞에서 어머니가 해주신 금목걸이라며 한 번 보여주었더니 조폭 같다며 가져가버렸다. 내 금목걸이를 저당잡힌 덕에 같이 살아주는가 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