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빨간
- 임솔아
사슴이라는 말을 들었다
사슴은 태어나면서부터 갈지자로 뛴다
는 말을 들었다. 먹히지 않으려고
여자라는 말을 들었다
먹고 싶다
는 말을 들었다
목소리는 어디까지 퍼져나가 어떻게 해야 사라지지 않는가 눈물을 흘리면 눈알이 붉어졌다 고통의 색이 있다면 그 색으로 나는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창문이 열려 있다면 창문을 넘어 번져가 창밖의 은행나무와 횡단보도와 건너편 건물의 창문까지 부글부글 타오르는 (창문을 열어줘) 저것들 나는 고통의 색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의 피가 빨갛다는 말을 믿고 있다 새빨간 태양이 떠오를 때처럼 점점 눈이 부시다
살인자들에게도 기도를 빼앗을 수 없다는 나의 한 줄 일기를 지우고
당신들이 자살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적어둔다
이곳으로 가면
길이 없다는 말을 들었고
인간이라는 말을 들었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울어야 한다
는 말을 들었다
당신들은 발가벗은 채 발목을 잡히고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매를 맞고
처음으로 울어야만 한다
말할 수 없는 고통들이 말해지는 동안
믿어본 적 없는 소원이 이루어진다
고통을 축하합니다
빨간 촛불을 켜고 노래를 부른다
● 임솔아(2017),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언제였는지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임솔아 시인의 <빨간>을 처음 읽었을 때, 충격이 있었다. 그렇지 않은 시도 있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좋은 시(詩)의 요소 중 하나로 시인이 독자에게 선사하는 ‘폭발’ 또는 ‘폭파’의 감각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나에게 시란 시인이 독자에게 내는 수수께끼, 폭탄 찾기 같은 게임이다. 정답은 이미 제목으로 공개되어 있는 수수께끼란 점에서 처음부터 범인이 누구인지 알려주고 시작하는 추리소설인 셈이다. 정답은 이미 제시되어 있지만, 우리는 시의 미궁(迷宮)으로 들어간다. 시인은 곳곳에 또는 어느 한 위치에 정교한 뇌관을 심어둔다. 미로를 더듬듯, 폭탄을 해체하듯 시어를, 행간을 짚어간다.
그런데 시인은 이미 첫 두 연에서 독자로 하여금 피할 수 없고,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엄청난 폭발을 경험하게 만든다.
“사슴이라는 말을 들었다/ 사슴은 태어나면서부터 갈지자로 뛴다/ 는 말을 들었다. 먹히지 않으려고// 여자라는 말을 들었다/ 먹고 싶다/ 는 말을 들었다”
언젠가 시인은 시를 쓰면서 경계하는 일은 멋 부리는 일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멋부림’이란 생활이 없는 수사, 기교를 위한 것이다. 첫 두 연이 너무 커서 나머지 구절들은 차라리 덤덤하다. 그런데 차분하게 곱씹어 읽다보면 나머지 구절들이야말로 시인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부조리한 세계에서 여자로 산다. 여자라는 말과 먹고 싶다는 말 사이에 그들 ‘인간’이 있고, 그 안에 어쩔 수 없이 인간으로 살고 있는 ‘나’가 있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울어야 한다/ 는 말을 들었다// 당신들은 발가벗은 채 발목을 잡히고/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매를 맞고/ 처음으로 울어야만 한다”
여기서 당신들은 누구일까? 한동안 문단 내 성폭력을 고발하는 운동이 있었다. 작가 역시 습작생 시절 중견 시인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었던 적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시에서 당신들은 구체적인 당신들일 수도 있겠으나 여성을 먹을 것으로 표현하는 세상과 그런 세상을 방치하는 인간 세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살고 있다. 살아간다.
“살인자들에게도 기도를 빼앗을 수 없다는 나의 한 줄 일기를 지우고/ 당신들이 자살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적어둔다”
“말할 수 없는 고통들이 말해지는 동안/ 믿어본 적 없는 소원이 이루어진다”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는 것이 정상이다. 그것이 나의 고통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타인의 고통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형태만 다를 뿐 모두 고통이란 통각(痛覺)을 알고 있으며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해와 공감 능력을 사회구성의 최대 능력치로 평가해야만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물어야 한다.
이제 고통을 느끼신다니 당신에게 진심어린 축하를 보냅니다. “당신은 이제 인간입니다”라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