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자 마츠모토 레이지 vs. 감독 린 타로
종종 일본 애니메이션들을 접하는 가운데 감독에 대해 등한히 하거나 원작자와 혼돈하는 경향이 있는데, 물론 일부 매니아들에게는 확연히 구분되겠지만, 정작 그것들을 팔아먹는 업체(알라딘도 포함해서) 측에서는 그런 구입자들을 위한 정확한 표기를 해주지 않는 것이다.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캡틴 하록 TV판" 시리즈도 같다. "우주해적 캡틴 하록(Captain Herlock : Outside Legend - Endless Odyssey 이하 'Outside Legend')"의 감독 표기에 "마츠모토 레이지(松木零士)"가 있는 건 분명 잘못되었다. 이 아니메의 감독은 분명 "린 타로(林太郞)"이다. 게다가 "린 타로" 감독은 그렇게 쉽게 무시되어도 좋을 만한 감독이 아니다. 1941년 도쿄에서 출생한 린 타로는 불과 17세의 나이에 "도에이 동화(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만화영화제작사들 중 하나)"의 창립 멤버였다. 그가 도에이 동화에 입사할 때의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그는 면접할 때 칼 한 자루를 쥐고 면접관을 협박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도에이 동화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의 작품에서 종종 일본 만화의 디즈니라 불리우는 데즈카 오사무의 흔적이 보이는 것은 그를 발견해서 키워 준 스승이 바로 데즈카 오사무였기 때문이다. 린 타로는 1970년대 말 일본 애니메이션 사상 최초로 극영화를 제치고 아니메로 영화흥행랭킹 1위를 기록하였고, 훗날 데즈카 오사무 사후에는 그의 유작인 불새 시리즈와 메트로 폴리스를 성공적으로 제작해내었다. 이 DVD의 처음 시작하는 대목의 자막에도 원작자 마츠모토 레이지가 이번 하록은 "린 타로 판 하록"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아니메의 부제가 "Outside Legend"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린 타로는 오랫동안 마츠코토 레이지의 원작을 아니메로 옮기는 작업을 해온 감독이고,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가 일종의 외전을 제작할 수 있게 된다(즉, 이 DVD시리즈에 TV판이라 붙어 있다고 해서 TBC방영판을 생각하면 안된다. 정확치는 않지만 아마 OVA일 것이다).
마츠모토 레이지의 작품 세계의 주된 화두
우리는 일본 Koei사의 컴퓨터오락게임으로서의 삼국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삼국지"게임이 그토록 광범위하게 인기를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유비, 조조, 손권을 비롯해 자신이 원하는 캐릭터로 게임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설정에 있었다. 삼국지란 컨텐츠를 이용해서 나중엔 조조전이란 오락도 나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마츠모토 레이지는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때로는 메텔과 철이(테츠로)가 주연이 되고 하록이나 에메랄다스가 조연이 되는 만화를 제작하고, 때로는 캡틴 하록과 토치로가 주연이 되는 만화를 제작하는 방식으로 수많은 이야기들을 직조해 나간다. 그런 까닭에 마츠모토 레이지의 작품들을 따라가며 이해하기란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다. 잘 아는 대로지만 마츠모토 레이지는 다작하기로 유명한 작가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마치 바그너의 오페라나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딧세이에 비견하고 싶어하는 만화가이다. 그런 까닭에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캡틴 하록을 비롯해, 그의 친구 토치로, 에메랄다스, 메텔 등등 중요 인물들이 여러 작품에 등장한다.
마츠모토 레이지의 작품 세계의 주된 화두는 "생명의 유한성"과 더불어 일종의 "청춘예찬"이 곁들여지는 것이 특색이다. 가령, 메텔은 청춘의 한 시기에 거쳐가는 성이랄까, 하긴 단순히 성에 대해 눈 떠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도달할 수 없는 이상과 꿈에 대한 상실을 말하는 것이겠기도 하다. 열심히 살았으므로 후회없는.... 지난 여름을 거쳐 푸르른 녹음도 가을을 맞이하면서 하나둘 떨어진다. 사람들은 가을에서 겨울 넘어갈 무렵이면 나무들이 모든 잎사귀를 떨구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나무를 유심히 관찰해본 사람들은 안다. 겨울, 삭풍 속에서도 유난히 질긴 잎사귀들은 떨어지지 않고 버티지만 새봄 신록이 움트는 시점에 이르면 그들도 떨어지고 만다. 세상살이가 이와 같다.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마츠모토 레이지는 유한하므로 인간의 삶이 가치 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후손들을 위해 더 열심히 살아서 더 많은 양분을 그들에게 남겨주어야 한다고말이다.
스페이스 오딧세이와 아르카디아
누군가 마츠모토 레이지의 작품들을 "스페이스 오딧세이"라고 불렀는데, "은하철도999"를 비롯해 "캡틴하록"에 이르기 까지 그의 작품들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비장미를 고려할 때 이 표현은 적절한 것이다. Outside Legend는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공포가 우주의 생성과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란 거창한 설정에서 출발하고 있다. 즉, 우주가 무한한 밀도 속에 존재하던 빅뱅 이전의 시기, 물리법칙이 통용되지 않던 시간대는 마치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혼돈(混沌 : 혼돈에겐 얼굴도 없고, 몸엔 눈, 코, 입, 귀 등 인간에겐 있는 7개의 구멍이 없다)과 같다. 이 혼돈의 시간은 인간에게 내재된 공포의 시간이고, 혼돈은 어느 때고 봉인을 뚫고 다시 우주를 지배하고자 한다. 혼돈에 조화를 주기 위해 생명체들은 이중 나선의 생명을 통해 혼돈을 봉인한다. 이 작품 속에서 혼돈의 이름은 "누'이다.
이 무렵 지구는 하록과 그의 벗 토치로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은 별이 되어 있었다. 인류는 지구를 버리고 태양계를 벗어나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의 끝까지 진출해서 그들의 고향별인 지구를 잊고 있었다. 인류는 교만해져서 우주의 끝까지 날아가 혼돈을 깨우고 만다. 혼돈의 저주에 감염된 탐사대원은 다시 지구로 날아오고, 어느날 그들이 깨어나 지구는 혼돈의 세계 저 편에 감금된다. 이 아니메의 기본 구조는 마츠모토 레이지 원작의 모든 만화들이 그렇듯 "은하철도999"의 구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거기에 덧붙여서 늘 시대착오적인 해적으로 지탄받는 애꾸눈 선장 하록의 기본 스토리와 캐릭터성이 덧대어져 진행된다. 이야기 구조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거기에 붙어 있는 속살들은 풍성해졌다. 은철의 '테츠로'를 대신해 '다이바 타다시'란 인물이 등장하고, 이 젊은이는 자신의 의지로 아르카디아호의 승무원이 되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
캡틴 하록은 우주 저 멀리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현상을 그의 친구 (죽어서 아르카디아호의 메인컴퓨터가 된)토치로와 함께 감지하고 있었다. 그의 동료들은 대부분 죽거나 혹은 잡혀서 감옥 속에 있거나 아니면 술독에 빠져 폐인처럼 살아간다. 그들은 과거 캡틴 하록과 함께 처음 우주로 나갔을 때를 기억하고, 그와 함께 해적으로 살아가던 때의 이상과 자유를 그리워 한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도 평온하고, 우주에는 연방정부에 의해 질서가 부여되어 있다. 캡틴 하록의 이상과 자유는 시대착오적인 것이었다. 질서, 질서가 평온을 준다. 캡틴 하록은 자기 의지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라며 아르카디아호에서 하선시킨 예전 승무원들을 하나둘 복귀시키면서 혼돈 시대의 공포 "누"와 최후의 대결을 벌이기 위해 항해해 간다. 하록은 타다시에게 "진짜 사나이가 되고 싶거든 내 배에 타라."고 말한다. 마츠모토 레이지의 작품들을 보면 도대체 "진짜 사나이"란 어떤 존재일까가 궁금해진다.
처음하는 짝사랑 고백
세대를 구분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TV판 만화영화를 통한 구분법도 재미있다. "은하철도999", "날아라 야마토(우리나라에선 "날아라 V호)", "은하철도 999", "천년여왕" 등은 1978년부터 1980년 초반 사이 MBC에서 방영되었고, "우주 해적 캡틴 하록"은 KBS로 통폐합되기 전까지 TBC에서 방송되었었다. 그래서 70년대말에 태어난 이후 세대는 캡틴 하록(Herlock)이나 메텔에 열광하는 바로 그 윗 세대들을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사 고백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그 어떤 캐릭터도 "캡틴 하록"에 대해 내가 바치는 경배를 능가하지 못했다.
비록 이 캐릭터의 원작작인 마츠모토 레이지에겐 군국주의자라는, 마초이즘(machoism)의 대명사라는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하록은 닮고 싶은 인물이었다. 나는 "냉소"라는 편리한 자기방어체제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면서 진보와 개혁, 보수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었다. 그런 고민을 하는 동안 나는 깊이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지난 87년을 거치면서 그리고 90년대 초엽을 지나면서 풍향이 바뀌자 일제히 깃발을 바꿔 달았던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아마도 조급해진 탓인지도 모르겠다. 계절은 또 이렇게 바뀌는데, 정체된 기분 말이다. 그럴 때마다 한없이 마음이 급해지면서 스스로를 자책하는 기분이 되곤 한다. 일모도원(日暮途遠)하기엔 아직 철이 없음에도 길이 보이지 않는 기분이 드는 걸지도 모르겠다.
김중식의 시 중에는 마치 이 DVD를 연상케 하는 시 한 편이 있다. "이탈한 자가 문득"이란 시인데, 일부만 옮겨 보면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그 똥,짧지만,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이라고 말이다. 일본에서도 우리의 80년대와 같은 시기를 산 적이 있었다. 미국도, 프랑스도 우리의 80년대와 흡사한 시기를 살아간 적이 있었다. 젊은이들은 인류공동체의 삶에 대해 고민했었고 그네들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학교를 박차고 나온 적이 있었다.
그건 마치 우리들이 지난 80년대를 살아가면서 우리 모두가 거리에서 동지, 형제, 자매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던 그 순간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풍향계가 바람을 따라 일제히 돌아가듯이 순간 홀로 남은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이전의 경험이 강렬하면 할수록 홀로 남겨졌다는 느낌은 피리부는 사나이를 쫒다 홀로 남겨진 어린 절름발이 소년 피터의 그것과 같았을 것이다. 캡틴 하록을 체포하러 온 경찰이 외친다. 넌 시대착오적인 해적일 뿐이다. 구 시대의 유물이라고 말이다.
김중식의 시에서는 김수영의 냄새가 난다. 우리는 김수영의 시 "푸른 하늘을"을 읽고 감동한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는 그의 싯구를 읽고 감동한다. "자유를 위해서/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라는 구절 때문이다. 이 때의 자유는 실천해본 자만이 알 수 있는 "liberty" 이기 때문이다. 자유(自由)란..... 결코 평등하지 않다.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의 "번역과 일본의 근대"란 책을 보면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인들에게는 생소한 서구적 개념들을 예를 들어 "democracy"나 "Freedom", "liberty" 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어떻게 자신들의 언어로 표기할 것인지를 고민했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자유란 아시아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생소했던 서구적 개념인 자유는 어떻게 김수영을 거쳐, 시인 김중식에게 전해졌을까?
"자유(自由)" - 나는 나의 깃발 아래에서 싸운다.
우리는 한자로 "스스로 자"와 "말미암을 유"로 표기한다. 말 그대로 하자면 '스스로 말미암는' 것이 자유다. 그러나 이때의 자유는 "freedom"과 "liberty"를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는 "free"란 말에 공짜란 뜻도 있음을 안다. 그러나 "liberty"는 보다 정치적인 개념으로서의 자유, 댓가와 의무를 다한 뒤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자유다. freedom과 liberty는 다른 자유다.
한자어에서 '自由'는 영어 표기의 자유보다 복합적이고 보다 철학적이다. "스스로 자, 말미암을 유, 스스로 말미암다"는 말의 핵심엔 자기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혈족, 가족, 가문, 민족, 국가를 뛰어넘는 자리에 그 모든 것의 근원에 자기가 있다. 자유는 나의 존재근거다. 즉, 나를 중심에 놓을 수 없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자신의 소중함을 증명하기 위해 자유를 위해 죽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자유란 무엇일까?
제 아무리 기술이 발달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캡틴 하록과 그의 우주선이 그렇듯 우주의 끝까지 갈 수는 없다. 자기대(代)에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계의 100분의 1도 벗어날 수 없다. 수대에 걸쳐 시도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겨우 은하계 우주의 1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거리인 것이다. 인간은, 빛을 넘어설 수 없다. 그런데 자유라....
캡틴 하록은 그를 시대착오적인 해적이라며 비아냥거리는 경찰에게 이렇게 외친다.
우리들은 결코 아무것에게도 기도하지 않는다... 바라지도 않는다..
다시는 남의 깃발 아래서 싸우지도 않는다.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의 믿음을 위하여
우리들의 깃발아래서만 생명을 걸고 싸워 나간다.
나의 깃발 아래서.
아르카디아호 발진....
누군가 지금의 20대를 버림받은 세대라고 말한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줄 이념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르는 세대라고 말한다. 단지 20대만 그런 것은 아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30대, 40대들도 역시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대의 좌표와 지표를 잃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종종 가족이나 민족에 넌덜머리를 내면서도 인터넷상으로는 아일러브스쿨이니, 싸이니, 블로그니 하면서 그들이 그토록 혐오해마지 않았던 인맥 속에 포함되고자 애쓴다. 혼자서는 불안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좌파와 우파, 진보와 개혁, 보수와 수구의 깃발 그 어딘가엔가는 가서 서고 싶어한다. 그런 뒤에 배신당하고 고통스러워 한다. 혼돈을 경험한다.
어떤 의미에서 캡틴 하록은 내가 아직 '체 게바라"나 '에밀리아노 사파타"를 미처 모르던 어린 시절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인간을을 움직이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라는 것을 최초로 깨우쳐 준 인물도 바로 그였다. 비록 마츠모토 레이지의 "진짜 사나이"에 전적으로 동감하지는 못하더라도 캡틴 하록에게 나는 늘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어차피 싸워야 한다면 나는 나의 깃발 아래에서 싸우고 싶기 때문에...
* 원래 이 DVD는 총 13편의 에피소드(항해)로 꾸며져 있는데 현재 알라딘엔 처음 발매된 시리즈만 판매하고 있다. 실제로는 뒷 이야기들도 4장의 DVD묶음으로 모두 발매되어 판매되고 있다. 화질을 포함해서 아니메의 이미지들은 전작을 능가하는 화려함을 가지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북클릿이 아예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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