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레스타인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 / 2002년 9월
키스 W. 휘틀럼은 『고대이스라엘의 발명-침묵당한 팔레스타인 역사』를 저술하게 된 동기에 대해 “나는 원래 팔레스타인 고대사를 쓰려고 집필에 착수했으나 방향을 바꾸어 팔레스타인 고대사를 쓰는 일이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영향력으로부터 어떻게 방해받아 왔는지를 탐구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연구자의 입장에서 학문적 근거를 갖춘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언제나 두 가지 어려움과 직면하게 된다. 첫째는 연구할 주제와 관련한 사전연구나 자료가 방대하게 축적되어 있을 때,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축적해온 연구의 성과들 사이에서 그 보다 나은 연구 혹은 남다른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는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하는 어려움이다. 그리고 다른 어려움은 자신이 연구할 주제와 관련한 자료가 의도적으로 훼손되거나 고의로 은폐되고, 심지어는 의도적으로 폐기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제 아무리 권위 있는 연구자라 할지라도 정부 혹은 한 사회가 의도적으로 담합하여 접근 자체를 고의로 가로막았을 때 이 장벽을 뛰어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진다.
현재 국정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국정원과거사 진상규명위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홍구 교수의 강연을 청취할 기회가 있었다. 많은 이들이 과거사 진상규명과 관련해 많은 국가들이 남아공의 ‘진실과화해위’를 모델로 삼고 있다. 사석에서 이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어째서 그런 방식으로 과거사문제를 처리했는지 물었다고 한다. 그는 만약 과거사 문제를 들춰내 그들을 법적으로 처벌했다면 자신은 아마도 침대에 누운 채로 죽어 있었을 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이들을 처벌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직접 경험하고 있다. 그나마 남아공의 ‘진실과화해위’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가 눈을 부릅뜨고 남아공을 지켜보고 있었으며, 남아공 정부가 과거사를 고백하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처벌이라는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 현실에서조차 그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과거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게 먼저 화해하자고 손을 내밀어야 했다. 화해와 용서는 비슷한 느낌이지만 명백히 다른 말이다. 용서란 잘못한 이가 먼저 사과하고, 이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이지만, 화해란 쌍방에 과실이 있는 자들이 서로를 용서하고 평화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사에 대해 굳이 고백하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점에서 과거사 진상규명과는 아주 먼 곳에 살고 있다. 용서를 구해야 할 자들에게 도리어 용서를 구걸하고 있는 판이니 말이다. 같은 민족끼리도 이처럼 용서와 화해는 어려운 일이다.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을 읽는 동안 마음은 무거운 돌을 얹어 놓은 것처럼 계속 묵직했으며, 이 작품에 대한 괜찮은 평들이 또한 내 마음을 무겁게 내리 눌렀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나쁜 책이라거나 이 책에 대해 좋게 평을 쓴 이들을 폄하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다. 다만, 켄 로치의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보며 영국의 잔인무도한 아일랜드 식민 정책을 비판했던 사람이라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조 사코의 냉정한 묘사가 충분히 거북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의 말미에서 박홍규 교수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이야기한다. 오리엔탈리즘이 포스트모던할 수 있는 까닭은 결국 우리가 서구의 인식체계를 받아들여 그들이 우리 안에 무의식적으로 삽입해준 필터를 통해 여과된 지식과 문화로 세상을 받아들인다는 부분이다. 결국 우리는 이것을 역으로 필터링해내지 못하고는 어떤 경로로도 문제의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 에드워드 사이드 자신이 「조 사코에게」란 제목으로 쓴 서문에는 이런 말이 있다.
당시 약 10편까지 나와 있던 만화는 이제 한 권의 책으로 나와, 미국 사람만이 아니라 세계인들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분명 여기에는, 오랫동안 주도권을 장악해 왔고 전복될 기미가 없어 보였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각각의 지지자 간에 뒤틀린 담론과는 전혀 다른 정치적, 미학적 시각이 깃들여져 있었다.
우리는 뉴욕이나 런던의, 몇몇 사람들이 좌지우지하는 이미지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매스미디어 범람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때때로 만화에 파묻히는 것으로 그 해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단정적이고 때로는 엽기적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글과 그림은 오히려 현실을 바로 보는 눈을 열어 준다.<본문 6~7쪽>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이자 그 자신이 팔레스타인계 지식인이었던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이고 보니 이역만리 먼 타국에서 팔레스타인의 역사에 대해 단 한 줄도 제대로 된 글을 읽어본 적이 없는 나에겐 성경 말씀이다. 그럼에도 나는 조 사코에게 남다른 명성을 안겨준 이 작품을 읽는 것이 영 개운치 않았으며, 심지어는 불편하기 까지 했음을 고백한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나는 지식인들, 혹은 대한민국 주류 사회에서 언제나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취급되는 냉정한 인식, 객관적 판단이나 중립, 중도란 말에 대한 오해 혹은 지나친 사랑이 문제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식민정책에 대해 우리가 마음 편하게 ‘영국 놈들도 알고 보니 참 잔인하더라.’ 혹은 이와 조금 다른 방식이더라도 편하게 정리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까닭은 아직도 일부 진행 중이긴 하지만 영국이 과거 아일랜드에 대한 식민통치에 대해 사과했고, 아일랜드 대기근 사태를 의도적으로 방치했던 것에 대해 영국 총리가 사과하며 역사적으로 정리된 과거이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문제에 대해 우리는 이제 제3자로서 냉정한 현실인식을 말할 수 있으며, 그런대로 중립적인 입장에서 논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문제도 이와 같이 중립과 중도를 지키며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허락될 수 있는 사안일까. 혹은 이스라엘도 잘못이 있지만, 팔레스타인의 자살 폭탄 테러, 어떤 방식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테러를 자행하므로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오기는 어렵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과연 정치적으로, 객관적으로 중립을 지키며 이야기하는 것일까? 물론, 조 사코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처럼 진실을 말하고 있으며 기존의 매스미디어에서는 보여주지 못하는 이야기를 전복적으로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사이드의 말에서 서글픔이 묻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고작 이 정도의 진실만으로도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린 듯한 그의 어투에서 말이다. 강철탄도 막아내는 탱크에 고작 맨손으로 주먹을 쥐어 보이거나 돌멩이 세례를 했다는 이유로 소년들에게 7.62mm 기관총을 난사하는 현실에서 정치적 중립과 냉정함이란 어쩌면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바로 그와 같은 이유에서 조 사코의 냉정함이 내 가슴을 돌덩이의 무게로 내리누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1962년 다른 ANC 간부들과 함께 체포되어 1990년 석방될 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장기수 중 하나였던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는 1992년 아내 위니 만델라와 이혼한다. 넬슨 만델라가 오랜 기간 동안 부부였으며, 정치적 동지였던 아내 위니와 결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어제까지 적(敵)이며, 그 자신을 감옥에 가두었고, 악명 높은 인종분리 정책으로 수많은 흑인들을 학살했던 당사자와 오늘 웃으며 악수하는 넬슨 만델라를 아내 위니는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위니는 개인적인 복수를 선택했고, 급기야는 한 소년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했다. 슬프게도 역사는 언제나 정의로운 자들에게 일방적인 승리를 안겨주지 않으며, 때로 역사는 절대적인 선인도, 악인도 구분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 한 가지 배울 것이 있다면 폭력을 종식시키는 것이 언제나 좀더 강한 폭력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객관이나 중립이란 결국 피 흘리는 당사자가 내가 아니라는 안도의 표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언제까지나 내 가슴을 무겁게 내리누르겠지만. 이스라엘이 그 사실을 깨우치게 되기까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앞으로도 더 많은 피를 흘리게 되겠지만, 그들이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날이 오게 되기를 희망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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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제 글에 오해가 없기를 바라면서...
서로 죽고, 죽이기를 반복하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부부 싸움에 빗댈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런 싸움이 반백년에 걸쳐 진행되다 보면 마치 부부싸움처럼 잘잘못을 가리기 어려워집니다. 처음엔 일방적인 피해자였던 사람도 어느 정도는 가해자의 얼굴을 하게 되는 법이죠. 서방의 인종주의가 이식된 것이든, 오도된 민족주의의 발로이든 간에 이제와서 이상주의적으로 누가 더 많이 잘못했느냐를 따지는 것은 어느 일방이 압도적인 힘의 우세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선 잘못된 현실 판단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팔레스타인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이스라엘과 서방 강대국의 잘못이 명확하지만, 극단적인 처벌과 보복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그것은 남아공의 경우처럼 대한민국에서도, 세계 현실에서도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나는 그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지점에서 분노를 이해하는 만큼 조 사코의 냉정함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지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고 해둡시다. 지식인을 일반 대중과 구분하게 만드는 유일한 덕목 "분노와 슬픔을 넘어선 냉정"은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하는 것일테니. 그런데 그 보다 더 큰 지점, 용서와 화해를 통해 미래로 가는 길은 대중의 합의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미래를 위한 가장 큰 창조를 "용서와 화해" 혹은 "포용"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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