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어렸을 때 가졌던 꿈 중 하나는 "마징가Z"의 비닐 피규어를 갖는 것이었다. 사촌 동생 집에 놀러갔다가 제법 큰 스케일에 팔 다리가 움직이는 로봇 장난감을 보고 마음속 깊이 소망하였으나 결국 입 밖으로 '나도 저것이 갖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다. 말한다 한들 내게 그런 장난감은 사치였고, 그런 것을 사줄 만한 사람도 내게는 없었다. 나중에 나이를 먹어 이제는 갖고 싶다면 내가 번 돈으로 살 수도 있으련만 선뜻 지갑을 열게 되지 않는다. 성취되지 않은 소망은 나이를 먹을수록 추억이 된다. 로봇 장난감을 소망하였으나 가지지 못한 탓에 나는 대신 만화방에서 로봇 만화를 읽는 것으로 그 소망을 대체하곤 했다.
이정문 선생의 만화 <철인 캉타우>를 접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당시 어문각이란 출판사에서는 클로버 문고라는 만화 문고본을 출간했었는데, 내 또래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 시리즈를 기억할 만큼 만화가 천대받던 당시의 분위기로는 특이할 만큼의 고급스런 장정으로 꾸며진 만화책이었다. 반공색채가 짙은 만화를 즐겨 그렸던 김형배 선생의 “20세기 기사단” 시리즈도 클로버 문고로 읽었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이정문 선생의 <철인 캉타우>가 유독 내 시선을 잡아끌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철인 캉타우>의 매력은 로봇 캐릭터의 독창성과 개발과 성장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절에 환경과 생태 문제를 만화의 주제로 삼았던 점이다.
이미 오래전 이야기지만 예전에 한일 친선 축구 대회에서 우리 국가대표 응원단이 <아톰>과 <마징가Z> 주제가를 멋모르고 응원가로 불러 일본 응원단의 조소를 샀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학교 다녀온 뒤 저녁 먹기 전 시간에 해주던 TV만화영화 시간을 장악했던 것은 모두 일본 애니메이션들이었다. <아톰>, <마징가Z>는 물론 <달려라 번개호(마하고고)>, <유성소년 피터>, <서부소년 차돌이> 등 일본 어린이들이 보고 자란 TV판 애니메이션들은 우리들도 역시 보아왔던 것들이다. 그들 경기장에 나선 사람들 가운데는 이 만화영화들이 일본 것이란 것은 알았지만 설마 주제가까지 일본 것들을 그대로 베껴온 것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촌극이었다.
올해 8월 16일부터 19일까지 4일간 부천에서는 제10회 부천국제만화영화축제가 열렸었다. 부천국제만화축제의 프로그램의 메인 주제였던 것은 ‘철인의 꿈 : 대한민국 4대 로봇 만화전’이었다. 우리 대한민국의 로봇만화를 대표하는 김형배 선생의 『로봇태권브이』와 고유성 선생의 『로보트 킹』, 그리고 이정문 선생의 『철인 캉타우』와 신문수 선생의 『로봇찌빠』 이렇게 4대 로봇만화를 보여주는 특별 기획 전시였다. 비록 로봇 캐릭터란 측면에서 ‘태권 브이’가 외형상 ‘마징가Z'와 닮은 구석이 많았다는 찜찜함은 있었지만 『로봇 태권 브이』는 그것이 우리나라 만화영화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본의 찬란한 슈퍼 로봇들에 기죽어있던 한국 어린이들의 기를 살려주었던 작품이었다.
 
<로보트 킹> 캐릭터 vs. <자이안트 로보 GR2> 캐릭터(피규어 이미지이기 때문에 애니 이미지와 다소 차이가 있다)
고유성 선생의 『로보트 킹』은 어렸을 적 무척 좋아했던 만화였다. 특히 고유성 선생의 재치 넘치는 입담과 ‘로보트 킹’ 캐릭터 디자인이 무척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로보트 킹’의 캐릭터 디자인이 일본 것을 사실상 거의 그대로 표절한 것(<자이안트 로보>에서 2호 로봇)이란 사실을 알고 실망했던 것이 90년대 초엽의 일이었지만 나중에 길찾기에서 이 만화가 복간되었을 때 나는 전권을 구입했다. 추억이 무서운 건, 실망까지도 극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신문수 선생의 『로봇 찌빠』는 다른 세 종의 만화와 달리 ‘아톰’형 소형 로봇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별도로 이야기될 만하다.
어쨌거나 이정문 선생의 만화 『철인 캉타우』는 비록 외계로봇이란 설정이긴 하지만 캐릭터 디자인이란 측면에서 토종 냄새가 풀풀 나는 한국형 슈퍼 로봇이란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여기저기 뾰족하게 솟은 날카로운 돌출부들이 여기저기 돋아있고, 무시무시하게 생긴 철퇴를 고정으로 장착한 캉타우는 한 눈에 보아도 전투형 로봇 이미지가 강렬한데, 그런데도 어딘가 우리와도 친숙한 ‘돌쇠’ 혹은 ‘마당쇠’ 이미지가 숨어 있다(비록 원통형 몸체라면 일본 애니메이션 중 『철인 28호』 캐릭터가 연상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복부가 훨씬 날씬하기까지 하다).
이정문 선생은 『철인 캉타우』를 그리게 된 계기에 대해 “일본의 아톰이나 마징가가 대단한 인기를 누렸는데, 어느 순간 우리나라 어린이의 우상으로 자리 잡는 것을 보고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철인 캉타우를 그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만약 그것뿐이었다면 『철인 캉타우』가 지닌 현재적 매력은 반감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제가 이 작품을 그리던 시대는 모둑 못 살고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국가 정책도 성장을 우선으로 생각했지요. 그래서 여기저기에 공장을 세웠는데, 그 공장에서 나온 폐수나 쓰레기들을 아무렇게나 처리했지요. 그때는 다들 경제만 발전하면 된다고 생각해서 그런 식으로 자연을 훼손하는 행위 자체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고 나라에서도 눈감아주는 실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연이란 한 번 훼손되면 회복하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고 있는 저로서는 아이들에게만이라도 이 지구의 환경보호가 얼마나 필요한 것이고 자연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일깨워주고 싶었다”고 작품의 창작 배경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였을까. 『마징가Z』의 에너지원이 원자력을 연상케하는 광자력 에너지인데 반해서 캉타우의 에너지원은 자연적인 현상인 번개였고, 작품 중간에 에너지원이 고갈되어 위기에 처하는 순간도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무엇보다 캉타우와 마징가Z의 대결이었다. 이 둘의 대결을 처리하는 과정도 어린 마음에 비교적 공정하다고 느꼈던 것은 지구를 지배하려는 스펠타 집단의 또또 소장이란 인물을 활용해 마징가Z, 그 자체가 아니라 마징가Z의 설계도를 훔쳐다 똑같은 로봇을 만들어 캉타우와 대결시킨 것이다. 나는 마징가Z 자체를 끌어들이지 않고, 설계도를 훔쳐와서 제작했다는 설정이 마징가Z 캐릭터를 극복하려는 민족주의적 감정과 같은 만화가로서 타인의 로봇 캐릭터 자체의 고유성을 훼손시키지 않으려는 나름의 배려로 느꼈다.
이외에도 캉타우의 오랜 숙적인 장카1호와 캉타우의 숙명적 대결을 앞두고 밝혀진 비밀, 천하무적이고 유일한 로봇인 줄만 알았던 캉타우가 오크타 혜성에서 지구로 올 때는 100여대에 이르는 로봇이었는데 장카1호와의 대결에서 50대가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단순한 슈퍼로봇인줄 알았던 캉타우가 마치 리얼로봇물 속의 대량생산된 로봇들처럼 대량생산되었던 로봇이며, 그 가운데 99대가 파괴되고 유일하게 생존한 로봇이란 설정이 밝혀졌을 때의 신선한 충격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이런 설정들이 전개과정 속에서 하나둘 개연성을 갖춘 이야기들로 완성되는 내러티브 구조는 『철인 캉타우』의 매력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작화적인 측면에서도 과감하게 생략되거나 과장된 묘사가 극적인 긴장을 고조시키고, 특히 실제 영화 속 사운드를 듣는 것 같은 쾌감을 선사하는 효과음 처리 방식은 이후에도 이만한 것을 보지 못했단 생각이 들만큼 압도적이다. 결말부에서 그동안 지구인들을 위해 싸운 캉타우와 외계소년 카우카가 다시 지구를 떠난다는 설정은 이 작품의 절정을 이룬다.
이정문 선생은 “지구의 문제는 지구 사람들이 풀어야 할 숙제”이고, “언제까지 캉타우나 카우카”가 대신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의 책임도, 해결책도 역시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찾아내야 하는 것이란 말이다. 복간되어 나왔단 소식은 예전에 들었지만 오래전 로봇 장난감을 이제 다시 구입하기 주저하게 되는 것처럼 다른 급한 책들에 밀리다 보니 올해 들어서야 구할 수 있었다. 내 손에 들어온 책이 2001년 초판인 것을 보니 그동안 복간만화 붐이 불었다고는 하지만 이것이 언론의 떠들썩함과는 달리 실질적으로 독자들의 사랑으로 연결되진 못했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쉽게 역사를 말하지만 역사란 기억되고 보존되지 않는 곳에서는 자랄 수 없다. 한국 최초의 장편 로봇 애니메이션이었던 『로봇 태권 브이』의 복원 작업이 어려웠던 까닭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만화작품들의 복원 역시 이에 못지않게 큰 어려움들이 있다. 비록 디지털 기술이 발달해 복원 불가능했던 어려움들을 극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지만 때로 새로운 책을 내는 것보다 복간하는 것이 더 어렵다.
왜냐하면 원본이 사라진 경우가 대다수이고, 그나마 원본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보존된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60~70년대 대중문화를 연구하는데 가장 좋은 자료는 「선데이 서울」이고, 80년대 TV문화를 살피는데 가장 좋은 기초 자료는 「TV가이드」다. 과연 이들 자료들이 체계적으로 수집되고, 보존되어 있을까. 한 번 읽고 쉽게 버리는 것이 만화책이란 인식이 우리 만화의 거장들을 쓸쓸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잘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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