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현실이 당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당신이 현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만화로 보는 한국현대인권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정익의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를 문상 다녀온 뒤 차근차근 읽었다. 대체로 만화를 독서할 때 우리들은 '읽기' 보다는 '본다'고 표현한다. '독서'의 경우엔 대개 '한다'는 어미가 온다는 점에서 나는 가장 심도있고, 주체적인 책 읽기를 표현하는 단어는 '독서하다'란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 뒤에 오는 말이 아마도 읽는다는 것일 테고, 가장 낮은 단계를 본다고 표현하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가톨릭에서는 1969년까지 가장 중요한 제의인 미사(mass)를 라틴어로 집전했다. 가톨릭 교회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죽은 말에 가까운 라틴어로 집전되는 미사에서 평신도들은 낯선 음절로 진행되는 미사를 지켜보는 구경꾼에 불과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은 주일 미사 드리러 가는 일을 미사보러 간다고 말하는 습관이 남게 되었다. G. 드보르는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우리는 한 때 삶을 살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시청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만화는 부차적인 읽을 거리였으며, 진지한 독서의 대상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드보르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만화는 읽을 거리이기 보다 볼 거리(어느 정도는 만화라는 장르적 속성임을 인정하더라도)로 치부되었고, 치부되는 동안 소비(독서)에서 새로운 것이 발견되지 않었다. 만화의 스펙타클적 소비는 동일한 것이 확장된 되풀이에 그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스펙타클적 시간 속에서, 죽은 그림이 계속 살아있는 독서를 지배하기 때문에, 언제나 과거가 현재를 지배한다. 즉, 우리는 만화를 소비할 뿐 그 만화에 대한 의식을 소유하지 못한다.
만화가 박재동의 제자이기도 한 이정익의 작품집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는 진지한 독서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스펙타클한 만화보기를 탈피하고 있다. 그의 탄생연도를 보니 1978년생이다. 순간 셈이 헷갈리기 시작한다. 68년생도 아니고, 78년생이란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아마도 그가 기억하는 최초의 TV는 총천연색 컬러TV였을 테고, 88올림픽은 열살에(참고로 그때 나는 고3이었다), 97년~98년 IMF는 스무살에, 지금 나이가 계란 한 판에서 하나 빠지는 나이다. 주책맞게도 매우 어린 줄만 알았더니 내일 모레 서른살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압축적으로 흘러가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서른도 안 된 젊은이가 한국현대인권사를 그것도 만화로 그려냈다는 것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자체로 희소성이 있다.
요사이 시민사회단체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는 쓸만한 놈이 없다는 거다. 97년 국가부도위기 사태 이후 밥벌이의 위기에 내몰려 너무나 영특해진 젊은이들이 너나할 것 없이 돈벌이에만 매진하다 보니 영 비전 없는(?)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해줄 젊은 활동가들이 없는 것이다. 따지고보면 이런 현상이 미리 예상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좋았던 시절 - 비록 가난하고 배고파도 사회를 위해,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사명감을 지닌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기초 활동가 노릇에 나서주던 - 은 이제 저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서 다시 주책을 조금 떨자면 그런 점에서 만화계 혹은 애니메이션계는 비교적 행복하다. 최근 살펴본 대한민국의 어떤 예술 장르보다 건강해 보이는 작가들이 다수 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단언치 못하는 것은 그 내막을 잘 모르기 때문인데, 만화계 주변에서 밥벌이하는 동기 녀석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맞는 말 같긴 하다.)
어쨌거나 이 만화책을 읽으며 짐짓 흐뭇해 하는 내 꼬락서니를 보니 나도 이제 늙었나보다. 영특하고, 기특하단 표현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것을 내리누르느라 한참을 주체 못하다가 혼자서 싱긋 웃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 책을 다 읽은 뒤의 소감이고, 책을 읽는 동안엔 가슴에 온통 피멍이 든 것처럼 아팠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만화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 '광주대단지 사건, 동일방직 분뇨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비롯해 '광주민주화항쟁'에 이르는 우리 역사의 골진 이야기들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책에 다소 불경한 표현을 빌어 이야기해보면, 실제 모델이 등장하는 야동보다 만화로 그려진 헨타이 망가가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과 같다.
시(詩)가 단어(單語) 그자체 보다는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의 뉘앙스가 풍기는 긴장에 의해 예술성이 발휘된다면, 만화에서 발휘되는 예술성은 그려진 부분보다는 그려지지 않은 이야기 속에서 발휘된다. 그런데 이정익의 작품은 매우 직접적인 묘사 방식을 택하고 있어서 만화의 예술성보다는 전달하고 싶은 주제에 휘둘리는 느낌을 준다. 즉, 거리두기를 통해 주제를 내면화하고 이를 표현하기 보다 주제의 묵직한 무게에 작가가 압도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1987년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교실에 있는 친구들을 부추겨 한겨레신문의 창간주주가 되도록 했었다. 그 무렵 나에겐 그만한 돈도 없었기 때문에 직접 주주가 되겠다는 생각을 할 수는 없었지만, 80년 광주의 진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당장이라도 이런 정권은 타도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87년이 좌절된 까닭에 대해 나는 그무렵만 하더라도 진실이 더 많이 알려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순진하게 믿었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렀다. 물론 여전히 사람들은 광주의 진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나는 폭압적인 권력의 본질적인 교체가 일어나지 못한 까닭을 다르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제 나는 사람들은 그와 같은 진실 따위 별로 알고 싶어하지 않으며 설령 안다고 해도 그것을 작가가 느끼듯, 혹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당시 느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느끼지 않을 것이란 사실 정도는 알게 된 나이라고 해두자. 이정익이 다루고 있는 한국현대사의 뼈아픈 고통에 대해 전혀 모르는 독자라면 아마도 이 작품집의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살벌한 얼굴의 공권력과 살벌한 장면들을 보고 책을 다시 덮을 것이다. 그 시대를 당사자로 뼈아프게 살아온 사람도 역시 이 책을 끝까지 보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내 친구 한 명도 군에서 고문을 당했고, 그로인해 오랫동안 고통받아왔다. 그 친구는 지금도 TV에 등장하는 폭력적인 장면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지식이나 논리 혹은 사건의 전개상 필요한 팩트(fact)의 부분도 중요하지만, 만화 중간중간에 작가 자신이 직접 참여하여 박정희 시대의 개발정책과 산업정책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들은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읽게 될 주요 독자층이 어떤 계층에 속한 사람이고 누구일까를 과연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했을지 반문하게 만든다. 어쩌면 이정익의 독자가 작가 보다 이 분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더 진하게 살아온 사람은 아닐까.(비록 작가가 이 작품을 위해 많은 이들을 인터뷰하고, 자료를 조사했겠지만 본질적으로 만화는 논문에 비해 이런 이야기를 하기엔 지나치게 비좁은 장르다. 만화 혹은 예술은 작가에 의해 이야기된 부분보다 말하지 않은 부분에서 더 많은 감동을 주는 법이다.) 누군가는 젊은 만화가가 자신이 누구보다 아프게 살아온 시대에 대해 알고 싶어하고, 이야기해주는 것을 대견하고, 기특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는 그와 같은 연배의 사람들에게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단 이 만화책이 자본주의적 유통경로를 밟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시대, 많은 이들이 고통받았던 것은 물론 잘못된 권력의 탓이 크지만 잘못된 권력의 신화를 정반대로 뒤집어 보면 계몽의 폭력 역시 이에 못지 않게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점도 중요하게 생각해보야 한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 작품이 지닌 가장 큰 힘은 여전히 이 작품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함정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읽는 이라면 누구라도 과거의 암울함, 그 시절을 각인시켜주었던 어두컴컴한 지하골방의 세미나와 광주비디오, 사진첩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되풀이하는 것만으론 다음 세대를 이끌어가야 할 젊은 작가 이정익의 몫이 다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선배들과 다른 시대의 젊은이이고, 그는 선배 작가들을 긍정적으로 극복해야 할 책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집의 가장 빛나는 백미(白眉)는 과거 고통받았던 시대를 그린 부분보다 작가 이정익의 에필로그 부분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나는 니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이건 내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볼 때도 마찬가지야.... 여기서 니가 부딪히고 있는 부분이 뭐야? 도대체 니가 부딪히고 있는 부분이 뭐야? 없어? 몰라? 그런 게 아니야? 도대체 - 민주화, 민주주의, 독재타도, 미군철수, 파쇼머저리들, 극우꼴통! 이런 거 우려먹기도 많이 우려먹었잖냐, 니가 말하려는 게 이런 거잖아 - 아니야? 그럼, 니 지점은 어디라고 생각하냐?"<중략> "너 맨날 하는 사랑 타령이나 감성적인 소재들 있잖아~ 너 좋아하는 거. 삼백육십 일 남녀상열지사에 목매는 녀석이 왜 난데없이 먼 놈에 민주화구 민주주의구 민주언론이구 지랄이냐구~"<본문 171쪽>
혹독하게 몰아세우는 형(선배)의 이야기를 듣다 지친 작가는 밖으로 빠져나와 택시를 탄다. 그리고 우리가 택시를 탔을 때 경험하곤 하는 낯익은 풍경들이 펼쳐진다. "아저씨, 담배 한 대 피워도 돼요?"로 시작되는 대화는 작가가 하는 일을 궁금하게 여긴 택시 기사 아저씨 덕으로 우리는 이 작품의 전사(前史)를 살필 수 있게 된다. "예전에요... 많은 사람들이 군사정권에 쫓기구 고문당하고 불쌍하게 살았거든요... 아무 이유도 없이요... 그래서요~" "거! 이유가 없긴 왜 없어! 어린 친구라 잘 모르겠지만 잡힌 사람들 대부분은 다아 빨갱이였고 간첩이었다고 - 물론 어쩌다가 한두 명은 억울한 사람도 있었겠지. 그렇다고 사정 다 봐줬으면 이렇게 먹고 살 만한 세상이 왔을 것 같애? 인권이네 뭐네 해도 박통 없었으면 이렇게 못 살지. 암." 대충 이와 같은 풍경 말이다. 그리고 작가는 목적지에 도착해서 택시에서 내린다. 택시 기사 아저씨가 작가에게 말한다. "학생! 저기... 나도 끌려가고 막 고문당하고 그런 적은 없지만, 그 시절 힘들었다면 힘들었던 사람인데...만화에 나 같은 사람도 넣어줄 수 있나?" "...." "네, 그럼요!"
나는 이 글의 초입에 다소 맹꽁이 같은 말을 써 놨다. "현실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현실이 당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당신이 현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어쩌면 기성세대에겐 이 슬프고 고통스러웠던 역사를 직시하지 못했던 것이 여전히 부담스러운가 보다. 하지만 작가의 흔쾌한 "네, 그럼요!"라는 대답 속에서 우리는 비록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이 고통스러운 반복, 되돌아가는 역사의 스펙타클한 소비를 끊어낼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이정익의 몫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