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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노르슈테인 작품집 - [초특가판]
유리 노르슈테인/etc / 리스비젼 엔터테인먼트 / 2006년 7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작가 중 한 명은 '유리 노르슈테인(Yuri Noshtein)'이다. 그는 러시아 애니메이션의 대가다. 한때 미국과 함께 세계를 제1세계와 제2세계로 구분한 강대국이지만 애니메이션 계에서 러시아는 미국과 일본에 이어 제3세계 애니메이션으로 구분되어야 할 게다. 그러므로 혹여 이 작가의 작품들에서 할리우드와 디즈니, 재패니메이션과 같은 기대를 하는 것은 금물이다.
하지만 시중에서 워낙 값싸게 구입할 수 있으니까 틈날 때 한 번쯤 공부하는 셈치고 그의 작품집 DVD를 만나거든 무조건 한 번 구입해주시길... 나역시 그의 명성은 들었으나 그의 작품을 보기도 전에 거장이라는 찬사를 붙일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나의 이런 생각은 유리 노르슈테인 단편집 중 첫 작품 <25일 첫날>, <케르제네츠의 전투>를 보는 순간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면서 막상 실제로 흔히 사용하기는 어려운 말이 ‘품격(品格)’이란 말인데, 첫 작품부터 이건 만만하게 볼 작품들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25일 첫 날(1968년, 9분)>, <케르제네츠의 전투(1971년, 10분)>, <여우와 산토끼(1973년, 12분)>, <왜가리와 학(1974년, 10분)>, <안개에 뒤덮힌 고슴도치(1975년, 10분)>, <이야기 속의 이야기(1979년, 29분)><사랑스런 푸른악어(1966년, 9분)><사계절(1969년, 9분)>까지 모두 8편의 단편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하나같이 환상적이고, 러시아적인 색감(이걸 어떻게 언어로 표현해야 할지 참 난감하다)들로 가득했다.
전반부의 작품들은 러시아정교회 특유의 이콘(icon)화를 연상케 하는데 우리가 흔히 보아오던 셀 애니메이션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과 색채가 마치 한 편의 장엄한 시를 바라보는 느낌을 준다. 그런가 하면 <여우와 산토끼>는 보는 내내 한국과 러시아가 우화의 세계에서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아늑한 집에서 쫓겨난 산토끼의 슬퍼하는 표정 묘사는 해학(諧謔)적이기 까지 해서 보는 내내 감탄이 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안개에 뒤덮힌 고슴도치>에서의 안개 묘사와 마지막 엔딩 장면 역시 어째서 그를 러시아 애니메이션의 영상시인이라 부르는지에 동의할 수 있게 만든다(고슴도치는 친구를 찾아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데 과연 고슴도치의 친구는 누구였을까? 말하면 욕먹는다. 흐흐).
작품집을 보고나서 유리 노르슈테인이란 애니메이션 작가에 대해 궁금증이 일어 찾아보니 일본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가장 존경하는 두 명의 애니메이션 감독 중 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그 표현 양식이나 기법은 매우 다르지만 작품 속에서 강한 휴머니티를 느낄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특히 <왜가리와 학>은 서로 엇갈리기만 하는 두 연인의 심리를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장면들이 탁월하다.
러시아 애니메이션은 처음 접해보았는데, 영미권의 상업적 애니메이션의 밝고 화사한 색감은 아니지만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면서도 어딘가 어두운 색조가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영미권이나 일본 애니메이션과 같은 스펙타클한 요소들은 적은 편이지만 문학적인 내용과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표현들, 은유와 상징이 교차하는 화면들을 러시아 민요와 클래식 선율의 음악들이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군데군데 돋보이는 해학과 익살스러운 대목에선 유리 노르슈테인이 예술성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감각까지도 함께 겸비하고 있음을 잘 느끼게 해준다.
1941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1961년 소유즈멀트필름에서 2년간 애니메이터 교육과정을 거친 뒤 1971년 러시아 최고의 애니메이터인 스승 이반 이바노프와 함께 키에프 공화국의 역사를 담은 <케르제네츠의 전투>를 공동 연출하면서 감독으로 데뷔한 그는 이후 동구권이 배출한 가장 뛰어난 애니메이션 작가로 성장한다. 특히 동구권 최고의 애니메이션으로 손꼽히는 1979년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작가 자신이 어린 시절 직접 경험한 전쟁의 비참함을 어린 늑대에 투영시켜 평화를 염원하는 작품으로 만들어 자그레브 페스티벌을 비롯해 오타와 페스티벌 그랑프리 수상 등 세계 각종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그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지난 2002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상영된 후부터인데, 이 작품집은 지난 2003년 출시된 것인데, 컷 아웃기법(평면 위에 하나하나 자른 종이를 얹어가며 촬영하는 기법)이라 해서 얼핏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엄청난 작업량이 있어야만 완성될 수 있는 기법을 활용해 만들어진 작품집이다. 작품 하나하나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완성도와 러시아의 문화적 품격을 경험할 수 있는 뛰어난 작품인데다가 어린이들부터 어른들까지 함께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내용이므로 이 작품집 하나 정도는 소장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http://youtu.be/dRsXU4Q6a0Q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