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요술 조약돌
한성옥 그림, 팀 마이어스 글, 김서정 옮김 / 보림 / 2004년 10월
『시인과 요술조약돌』은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의 산물이다. 일본의 하이쿠 작가인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와 숲속의 여우들을 주인공으로 미국인 작가 팀 마이어스가 글을 쓰고, 한국인 일러스트레이터 한성옥이 그림을 그렸다.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의 이름을 모르고 읽었더라면 일본 동화인 줄 알 뻔 했다.
아마 어려서 읽었던 계몽사판 세계소년소녀동화전집의 체험이 없었다면 평생 동화나 어린이문학과는 담쌓고 지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세대가 어렸을 때는 한창 전집 붐이 일어 집집마다 아이들을 위한 백과사전을 비롯해 전집들을 한두 질씩은 비치해두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우리 집에는 계몽사 위인전만 있고, 100권짜리 동화전집은 없었다. 초등학생 때 친구 집에 있던 이 동화전집을 다 읽기 위해 거의 매일 같이 그 친구 집을 들락거렸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기만 하다.
안데르센을 비롯해, 그림 형제의 동화까지 제법 구색을 잘 갖추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북유럽 동화집이었고, 그 다음이 일본 동화집이었다. 지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많은 차이가 있는 북유럽과 일본이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이 두 지역 혹은 국가의 동화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북유럽 동화와 일본 동화에는 유난히 트롤 같은 요정 이야기나 변신 이야기가 많다는 것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까지 관심의 영역이 넓어져 간 것을 보면 그것이 내 취향이었던 모양이다.
팀 마이어스의 약력을 보니 일본에서 3년을 살았다고 한다. 단순히 이 이력만 보면 겨우 3년 그 나라에 가서 살았다고 일본에 대한 동화를 쓰다니 하고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일본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싶었으면 일본에서 3년이나 살았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일본에 산 기간은 불과 3년여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내 생각에 그는 일본에 거주하기 이전부터 일본문화에 대해 상당한 관심과 깊은 조예를 지닌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동화의 도입부는 매우 드라마틱하게 아름답다.
마쓰오 바쇼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입니다.
하지만 바쇼가 후카가와의 여우들과 어떻게 평생 친구가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영화 『트랜스포머』나 반지의 제왕』이나 마찬가지인 점은 판타지에서 판타지가 지닌 개연성(蓋然性)의 세계로 독자들을 어떻게 거부감 없이 끌어들일 것이냐는 것이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한국의 작가들이 아직도 취약한 지점이기도 하다. 한국의 작가들은 이 지점에서 묘한 중압감에 시달린 나머지 장황해지곤 한다. 마이어스와 한성옥은 이 지점을 절묘하게 통과해 나간다.
후카가와 언덕의 노을을 배경으로 시인 바쇼와 여우 세 마리가 함께 저 멀리 석양을 지켜보고 있다. 언덕에는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고 바쇼의 성긴 머리카락과 여우의 뾰족한 주둥이들이 보인다. 바쇼의 바로 옆에 앉은 여우는 이제 막 뭔가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듯 바쇼를 쳐다본다. 바쇼의 눈썹은 그의 경륜을 말해주듯 눈꺼풀 위로 길게 자라 있다.
첫 장부터 아무런 의심 없이, 아니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몸살이 날 지경이다. ‘그래서? 바쇼와 여우들은 어떻게 평생 친구가 된 거지?’라는 의문이 다음 장을 빨리 펼쳐보고 싶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마이어스의 이야기 솜씨도 기가 막히지만, 페이지마다 펼쳐지는 한성옥의 삽화들은 하나하나가 매우 공들인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바쇼는 자기 집 마당에 있는 벚나무 열매를 여우들과 나눠먹으며 여우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림 왼편으로 화려한 기모노를 입은 여우 세 마리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뭔가 재미난 이야기라도 나누는 듯 서 있고, 문제를 일으킬 여우는 바쇼 옆에 앉아 있다. 나무 위에는 두 마리 여우가 버찌를 따서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한 마리는 입을 헤 벌리고 있는 바쇼의 입에 버찌를 던져준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풍경이다.
다음 장에 가면 유난히 버찌를 좋아한 여우 한 마리가 홀로 떨어져 나와 어떻게 하면 저 버찌 열매를 독차지할 수 있을까 궁리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어느덧 그림의 색채들은 서서히 가을빛을 담고 있다. 변신술에 능한 여우는 조약돌을 금돈으로 속여 궁핍한 바쇼에게서 벚나무를 빼앗는데 성공한다. 여우는 자신에게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간 바쇼가 금돈이 조약돌로 변해버린 것을 보고 얼마나 억울해할지 궁금했다. 그러나 바쇼는 여우가 가져다 준 조약돌의 아름다움에 반해 “돌은 가난을 아랑곳 않고 강만 사랑하누나”라는 시를 적으며 행복해 하고 있었다.
사실 이쯤 가면 작가보다 혹은 여우보다 영리한 독자라면 대개의 동화들이 그러하듯 뻔한 권선징악을 예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이어스는 “깨달음을 얻은 여우는 바쇼에게 돌아가 사과하고, 이번엔 진짜 금돈을 준다.”는 뻔한 스토리 전개를 감동적으로 비트는데 성공한다. 여우가 금돈을 가져다주지만 바쇼는 이마저도 거절하는 것이다. 곤란에 처한 것은 도리어 여우가 된다. 과연 여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머지 이야기를 줄줄이 읊어대는 것은 영화로 치자면 트레일러에 속하는 부분일 테니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다만 여우는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사랑에 빠진 우편배달부가 파블로 네루다를 통해 시인이 되는 것처럼 바쇼를 만나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는 시심을 확인한다. 벚나무와 버찌 열매를 독차지하려 했던 여우는 바쇼를 통해 함께 나누는 기쁨과 사소한 것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시인의 눈을 얻는다. 그 기쁨을 여우는 이렇게 적는다.
더불어 먹는
버찌는 혼자보다
더욱 달콤해
내가 오래전부터 들락거린 인천 배다리 지역은 조만간 재개발로 마을 한 가운데 8차선 길이 뚫려 오랫동안 마을공동체로 함께 살아오던 한 마을이 통째로 동강날 운명이다. 그곳에서 평생을 두고 헌책을 만지고 팔아왔던 한 아주머니는 내가 그 헌책방을 찾을 때마다 지금도 가끔씩 이런 말을 한다. “사람들이 시를 읽는다면, 시인의 마음이라면 이 거리가 없어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 분은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시인들을 초대해 함께 시를 읽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시인의 마음 못지않게 어린이 문학하는 이들의 마음이라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아니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고, 너와 내가 남이 아닌 서로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거리가 없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사람과 여우가 함께 대화를 할 수 있었던 시절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인디언들이 곰의나 늑대에게도 영혼이 있다고 믿어 그들과 대화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들도 누군가와 함께 별과 꽃과 자연에 대해 기뻐하며 이야기나눌 수 있다고 믿는다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우리들은 같은 인간끼리도 서로 영혼이 없는 사이처럼 박정하게 굴고 있는 건 아닌지 이 동화를 읽으며 참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김서정 선생의 번역도 매우 깔끔하고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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