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 개 - 낮은산 어린이 5 / 박기범 지음, 유동훈 그림 / 낮은산 / 2003년
어미 개 - 낮은산 어린이 6 / 박기범 지음, 신민재 그림 / 낮은산 / 2003년
옆자리가 허전하여 눈을 떠보니 어느새 해는 중천에 떠 있고, 아내는 어느새 일어나 아침을 짓는다. 살아 있다는 기분을 만끽하는 행복한 기분이란 이런 것이겠지. 밥 짓는 아내의 등을 바라보는 남정네의 심정이란 유사 이래 한결같지 않았을까.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는 자연의 잔등처럼 넉넉한 심성을 마주하는 기분. 그런 아내의 잔등을 바라보며 책상 위에 2권의 책이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
아내가 좋아하는 동화작가 박기범. 그는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나 숭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한겨레 문화센터 아동문학 작가학교 6기를 수료했고, 그리고 1999년 창비가 주관하는 제3회 `좋은 어린이 책` 원고 공모에서 창작 부문 대상을 받았다. 그리고 <문제아>라는 동화책이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널리 알려졌다.
이것이 대체적으로 알려진 작가 박기범의 개인약력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박기범의 동화 <문제아>를 읽지 못했고, 그가 권정생 선생을 만나고 난 뒤 쓴 글과 올 2003년 2월 이라크 전쟁의 위기가 한창 고조되던 무렵 반전평화팀의 일원으로 죽음의 위기에 직면한 이라크 아이들과 하겠다는 생각으로 떠나며 쓴 보고문 형태의 글들을 읽었을 뿐이다.
잠은 안 깨어 여전히 침침한 눈을 부비고 박기범의 <어미 개>를 먼저 잡았다. 거기 등장하는 개 이름이 감자였다. 할머니와 어미 개 감자의 이야기. 그리고 감자가 낳은 새끼들이 다시 개장사에게 팔려가는 광경들, 그리고 끝에 생각없이 던져지는 듯한 한 마디가 내 가슴에 '툭'하고 묵직한 소리를 내며 흘러들었다. 세상에 나면서 우리들은 숱한 만남과 이별을 경험한다. 이 글에 등장하는 어미 개 감자와 그 새끼들과의 이별과 같은 경험 뿐만 아니라 전학가는 바람에 헤어지게 된 친한 동무와의 이별부터 선생님의 전근. 혹은 기르던 짐승의 죽음과 같이...우리의 삶은 끝없는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할머니는 혼자 살고 있다. 아니 감자와 살고 있으니 이 두 존재는 함께 살고 있으니 혼자는 아니다. 두 존재는 서로 외따로이 고립된 존재로 쓸쓸하다. 할머니는 여성으로서의 이별(물론 작중에는 잘 드러나고 있지 않지만, 작가가 굳이 할아버지로 하지 않고 할머니로 설정한 까닭은 분명 있을 것이다.)을 알 것이다. 작은 암캐인 감자는 해마다 새끼를 배고 출산하는 고통을 경험한다. 그리고 미처 젖도 떼기 전에 새끼 개들이 팔려가는 경험을 반복한다. 혼자 사는 할머니는 새끼 개들까지 기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좀더 잔인한 상상이기는 하지만 어린 새끼들을 파는 것으로 얻는 소득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할머니의 존재가 서운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삶의 불가항력을 모르는 사람은 어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어른들은 아이들이 늘 아이로 남길 바라겠지만 불행히도 아이들에게도 감당해야 할 그들의 몫의 고통은 있다. 아마도 작가는 아이들로 하여금 그런 아픔을 간접 경험하도록 하고 싶지 않았을까.
나는 아동문학이 판타지의 세계, 동심의 푸릇푸릇한 세계를 그리는 것에 찬성하지만 그와 비슷한 정도로 그들에게도 세상을 천천히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박기범도 그리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아직 박기범의 동화 <문제아>를 읽지 못했고, 그가 권정생 선생을 만나고 난 뒤 쓴 글과 올 2003년 2월 이라크 전쟁의 위기가 한창 고조되던 무렵 반전평화팀의 일원으로 죽음의 위기에 직면한 이라크 아이들과 하겠다는 생각으로 떠나며 쓴 보고문 형태의 글들을 읽었을 뿐이다. 그는 이 책 <새끼 개>, <어미 개>가 출간되던 올 7월까지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박기범의 여러 행적들을 지켜보면서 그간 동화작가들에 대해 품었던 나의 주제넘은 생각들을 많이 교정할 수 있었다. 그 주제넘은 생각들의 이면은 그런 것이다. 나잇값 못할 만큼 주책맞게 어리고, 대책없는 해맑음, 혹은 간사함을 위장한 동심이거나 동화작가라거나, 동시를 쓰는 시인, 그도 아니면 아동문학 작가라고 본인이 밝히기 전에는 도통 그 사람의 행적이나 행동으로 보아서는 전혀 아동문학 하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없는 너무나 어른(?)스러운 이들에 대한 고정관념 같은 것.
그런 나의 생각에 최초의 균열을 준 이가 어디 박기범 하나뿐이었으랴. 거기엔 권정생 선생도 있었고, 또다른 훌륭한 아동문학가들이 상당히 많음을 알게 되었다. 박기범은 <새끼 개>를 통해 아이들에게 아니 어른들인 우리들도 쉽게 잊고 마는 역지사지의 마음을 일러주고 싶어 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온통 사랑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하다못해 광고 CF에서도 '니가 사랑을 알아.'라며 사랑에 대한 과감한 정의를 시도한다. 박기범이 말하는 사랑의 출발은 이해다. <새끼 개>에서 아이들은 어린 강아지 한 마리를 예쁘다 안아주고, 비행기도 태워주고, 목욕탕에 첨벙 담궈 수영도 가르친다. 그러나 아직 어린 새끼 개는 이 모든 것이 두렵기만 하고, 아이들이 다가오는 것도 두렵기만 하다.
그래서 작은 새끼 개는 아이들이 다가오면 왈왈 짖고, 깨문다. 결국 새끼 개는 주인에 의해 다시 애견가게로 돌려보내지고 만다. 가게에 갇힌 새끼 개는 주변의 큼지막한 개들에 놀래 마주 보고 짖어준다. 그 개는 이곳에서도 성질나쁜 개일 뿐이다. 어느 날 주인 아이들이 새로운 애완견을 사러 왔지만 아직 팔리지 않은 새끼 개를 보고도 그들은 본체만체 할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새끼 개는 가게 주인의 눈을 피해 철망을 넘어 달아난다. 그 개는 잠시 자유를 만끽하지만 아이들이 사는 아파트 맞은 편 길가에서 차에 치어 죽고 만다. 그 시간 아이들은 새로 들인 개를 가지고 재미나게 놀고 있다. 사랑은 때로 잔인하다. 그것은 마치 평화와 같은 것이다. 미국의 평화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어린이들의 죽음을 의미하고, 이스라엘의 평화가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때로 우리들이 사랑이라 표현하는 것조차 누군가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병이 되는 것이다. 박기범의 책 2권을 다 읽고 덮으며 나는 그가 확실한 자기 세계를 갖춘 훌륭한 한 명의 작가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가 아주 괜찮은 한 명의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이지만 말이다.
여름이 저문다. 이제 가을이 올 것이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은 사랑을 하라. 그런데 한 가지 알려주고 싶은 것은 '사랑이 사람을 키우기도 하지만, 사랑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면 더 좋겠다. 이 두 가지가 어려운 건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도 사랑이오,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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