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옷 이야기 1.2
타이콘패션연구소 / 시공사 / 1997년 1월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엔 이런 구절이 있다.
금력가로서 갖추어야 할 체면규범에 따르고자 하는 남자들은 인공적으로 유발된 여성의 병적인 신체적 특징에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 서구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오랫동안 널리 유행해온 코르셋으로 바싹 조인 허리라든가 중국의 전족 등이 그런 사례에 속한다.<164쪽>
"싸구려 옷은 그 옷을 입은 사람을 싸구려로 만든다"거나 "값싼 것은 천한 것이다"라는 경구는 다른 품목의 소비보다 특히 의복 소비에 대하여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점은 사실로 인정받을 만하다. ...<중략>... 우리는 비싼 것일 수록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한다. 물론 이런 이론에 맞지 않은 매우 드물고 이례적인 예외로서, 우리는 누구나 비싼 수제의복과 같은 비싼 진품을 모방했다는 사실을 확연히 알아볼 수 있는 좀더 값이 싼 모조품조차도 아름다고 유용하다는 점에서 각광을 받는 경우를 알고 있다. <182쪽>
<토르스타인 베블런, 김성균 옮김(2005), 유한계급론, 우물이 있는 집>
혹시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예전에 아직 프로스펙스나 나이키 같은 신발이 국내에서 인기를 끌기 전에 아동화로 가장 유명한 상표는 "왕자표"였다. 물론 문구류에서도 모나미 말고, 왕자표 크레파스란 것도 있었다. 모두가 그럭저럭 가난하던 시절 초등학교 처음 입학할 때 '쓰리세븐" 가방 하나면 모두가 적당히 만족할 수 있었던 시절 이야기다. 짝퉁이란 말이 널리 사용되기 전엔 "짜가"란 말이 있었다. 가짜를 뒤집은 말이다.
70년대 초반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 세대만의 다소 특이한 경험들을 했다. 전두환 집권 직후 갑자기 교복자율화 바람이 불어 사복을 입고 학교를 다니던 시절, 교복 자율화 바람과 함께 때마침 청소년들의 패션 시장이 활황을 이루었다. 국내에 나이키와 프로스펙스가 브랜드를 앞세운 운동화 시장을 넓혀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아이들 가운데 몇몇 멋장이들은 당시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고가의 운동화들을 신기 시작했고, 겨울철에 접어들면서 지금은 흔해빠져서 그 가치가 많이 떨어진 덕다운 점퍼와 조끼류란 것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교복 자율화는 빈부의 격차를 표피적으로 드러나도록 했다. 최소한 교복을 입는 동안 만큼은 보다 좋은 옷감을 사용했는가, 얼마나 자주 세탁해 입을 수 있는가 정도의 차이였을 뿐 겉으로 드러나는 빈부란 기껏해야 도시락 반찬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나이키를 신은 것은 아니었다. 최소한 내가 중학생일 무렵엔 요새 식으로 말하자면 그래도 중학생은 되어야 핸드폰을 사준다는 식의 분위기가 있었다. 단지 지금은 핸드폰이지만 그 무렵엔 시계였다. 제일 흔한 건 카시오 전자 시계였고, 나이키나 프로스펙스 대신에 중학생 시절 많이 신었던 운동화 브랜드는 상대적으로 마이너 브랜드들이었다. 예를 들어 프로스펙스 대신에 스펙스, 나이키 대신에 나이스, 타이거 같은 신발 말이다. 흔히 운동화라 불리웠던 테니스화 대신에 농구화가 유행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미국의 프로레슬링 WWF와 함께 NBA농구가 국내에 방영되기 시작했고, 자기 치수보다 5mm에서 심지어는 10mm 이상 부풀린 농구화를 신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동대문운동장 뒷편에 형성된 짝퉁 시장을 이용했다. 그러나 내게는 이런 짝퉁 신발조차 너무 비쌌다. 몇날 며칠을 조르고 졸라 간신히 얻어낸 돈 몇 푼으로 친구들과 어울려 동대문 운동장 뒷편의 짝퉁 시장에 가서 그 무렵 갓 들어오기 시작한 푸마 운동화 한 켤레를 사 신은 뒤 나는 처음엔 기분이 좋았으나 점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모두가 날 바라보고 비웃는 기분이 들었던 거다. 가난이란 그렇듯 상대적이고, 남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본인 스스로 비굴하고, 비참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놈의 신발이 밑창이 슬슬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입을 쩍 벌리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학교마다 짝퉁 물건을 귀신같이 알아맞추는 녀석이 있는데, 이런 아이들에게 걸리면 개망신 당하기 십상이었다.
옷이 날개란 말이 있는 반면, 허례허식 혹은 지나친 사치, 사람을 외견만 보고 판단하는 경향에 대한 교훈 이야기들도 산더미다. 이런 교훈담이 흔하다는 건 그만큼 우리들이 사람을 외견으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에 반증이기도 하다. 시공사에서 나온 "남자의 옷 이야기" 1.2권은 말 그대로 옷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도 남자들의 옷입기에 대해 1권 정장편과 2권 캐주얼 웨어와 액세서리편으로 나누어 다룬다. 이 책의 저자들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옷에 대한 보수적인 혹은 이중적인 시각을 눈여겨 보았는지 앞 부분에 이런 이야기들을 한다. "돈 들이지 말고 멋쟁이가 되자." 그러니까 이 책을 읽는 것은 돈 들이지 않고 멋쟁이가 되는 비결을 읽는 것이다.
남자 옷 입기의 6계명
1. 유행을 따르기 보다는 자기 스타일을 가져라.
2. 옷감을 두르지 마라.
3. 옷을 사지 말고 옷장을 갖추어 나가라.
4. 점잖을 것이냐 개성있을 것이냐
5. 교과서처럼 빈틈없는 옷차림은 문제가 있다.
6. 옷을 입는 '줏대'를 가져라.
남성의 정장은 수트, 재킷, 셔츠, 넥타이, 그리고 코트 등으로 구성된다. 이 책에서는 각각의 의복들이 서구 사회에서 어떻게 발전해왔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설명해준다. 즉, 어쩔 수 없이 서구화된 의복을 입어야 한다면 잘 알고 있자는 것이 이 책의 주요 취지이다. 수트 하나에도 아메리칸 스타일, 유러피안 스타일, 새빌로우 스타일, 이탤리언 스타일 등이 있으며 그냥 보기엔 다 거기서 거기인 듯 싶은 이 수트 하나에도 각각의 의미가있으며 나름의 사연들이 있다. 당신에게 잘 맞는 수트란? 이 책에서 주는 조언은 "아내를 고르듯 고른다"는 것이다. 아내를 어떻게 골라야 하는 건지 잘 몰라서 인용해본다.
외모도 보고, 성격도 보고, 장점과 단점을 냉정하게 따져 이런 사람이면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신중하게 배필을 고르듯 수트 한 벌을 고를 때에도 신중하게 선택하십시오. 귀찮아서 아무데서나 사자, 이거면 됐어 하는 식으로 '대충 사는 것'에 습관을 들이게 되면 계절마다 옷을 사더라도 한해만 지나면 입을 옷이 별로 없는 듯 느껴지게 되기 쉽습니다. <본문 31쪽>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우선 실용적인 의도에서 옷 좀 잘 입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결과는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다. 우선 이론쪽으로는 늘 그렇듯 무척 강해졌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대학을 마치며 친구들 따라 당구장에 하도 많이 죽치고 있어서 귀동냥으로는 당구치는 법이 애버리지 300인데, 실제 내 당구 실력은 처음 당구장에 따라간지 20여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30이다. 게다가 옷을 잘 입기 위해선 우선 본인 자신이 부지런해야 하는데, 나는 다른 일들이 더 즐겁기 때문에 옷 입는 일에 그다지 신경을 기울이지 못했다. 그러니 멋장이들을 시기질투할지 언정 욕할 마음은 추호도 없고, 그럴 까닭도 없다. 자신을 잘 가꾸는 일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게다가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또다른 이유는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가들 때문이었다. 셰익스피어는 평생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는 어휘보다 훨씬 더 많은 어휘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의 시대는 자연이 주변에 가깝던 시기였으므로 자연을 통한 비유 혹은 묘사가 지금의 작가들보다 손쉬웠으리라. 그래서인지 요새 작가들은 도시의 풍물을 묘사하는데 익숙하다. 그러나 자연과 달리 도시는 얼마나 빨리 변하는가. 예를 들어 어떤 작가는 들판에 꽃이 만발했다고 묘사하는데 비해, 어떤 작가는 질경이, 노루귀, 사철 원추리가 피었다고 말할 때, 묘사가 좀더 생생해지는 것처럼 어떤 사람의 복식을 설명할 때도 글렌 체크 스타일 넥타이를 더블 노트로 매고 발마칸 코트를 입었다는 묘사는 좀더 생동감이 있다. 서양 작가들의 작품을 읽을 때 이런 옷입는 상식은 좀더 재미있게 그들의 소설을 읽도록 도와줄지도 모른다.
일단 내가 무슨 옷을 어떻게 입을 것인가? 하는 실용적인 고민에 더해져 남들 옷차림도 좀더 세밀하게 살필 수 있는 즐거움을 이 책은 줄 수 있다. 거기에 풍부한 사진 자료들과 이미지들은 더 한층 풍성한 느낌을 준다. 앞서 이 책 이야기보다는 옷에 관한 이야기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옷을 잘 갖춰 입는다는 일이 아직 내겐 사치스러운 일로 여겨지는 탓일지도 모르겠다. 위의 "남자 옷 입기의 6계명"이 그러하듯 결국 멋장이의 옷입기도 결국 기본에 충실하면서 자기 스타일을 찾아가는 일이리라. 이런 류의 책이 실제 삶 자체를 풍성하게 해줄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대신에 마음만 편하다면 삶의 다른 측면들을 풍성하게 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남자들의 옷 입기도 여성의 코르셋 못지 않게 불편하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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