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 맛의 제국
노부 마츠히사 지음, 오정미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03년 6월
"노부, 맛의 제국"은 특이한 책이다. 이 책의 원제는 "Nobu: The Cookbook"인데, 제목대로라면 "노부유키 마츠히사(松久信幸)"란 요리사이자 세계적인 요리 체인점의 경영자이기도 한 애칭 "노부(Nobu)"의 요리책이다. 요리책인만큼 당연히 레시피(recipe)와 음식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는 책이다. 그런데 알라딘의 도서 분류에 따르면 "인물/평전 > 예술인"의 분류로 되어 있다. 어째서 그럴까? "노부, 맛의 제국"은 요리책인 동시에 노부유키 마츠히사의 경영철학, 요리철학, 삶의 편력을 엿볼 수 있는 자서전이기 때문이다. 관련 주제분류를 살펴보면 "동양요리"에도 "서양 세계요리"에도 함께 분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왜 그럴까? 노부의 요리들이 동서양 스타일이 섞인 퓨전음식(Fusion Food)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성격을 종합하는 식으로 정의해보면 '노부유키 마츠히사의 인생역정이 담긴 동서양 스타일이 한데 섞인 요리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요리사'의 복장이나 그들이 만들어내는 음식을 맛보노라면 종종 중세의 마법사 혹은 연금술사를 떠올리게 된다. 음식의 조리법을 일컫는 "레시피"란 말 자체가 비법 혹은 비결, 약제사의 처방전이란 뜻도 함께 가지고 있음을 생각해보면 그들을 맛의 연금술사나 마법사로 연상하는 게 무리는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일본의 요리만화들을 보노라면 극적인 재미를 더하고자 하기 때문이겠지만 동양의 신선이나 알법한 비결들로 빚어내는 요리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각각의 무예가 저만의 특기와 단점이 존재하듯 요리사라고 해서 모든 부분이 통하는 건 아닐 성 싶다. 순전히 일본만화에 의한다면, 제빵사들에겐 빵의 발효를 촉진하는 따뜻한 체온을 지닌 "태양의 손"이 제빵사의 필수적인 요소로 등장하는데, 태양의 손을 지닌 이가 초밥의 달인이 될 수는 없다. 초밥에 얹는 생선살에 온기가 전달될 정도로 오래쥐고 만드는 것은 금기이기 때문이다. 초밥을 만들 때 곁에 얼음물에 손을 담궈가며 만드는 건 그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일본만화에 등장하는 절대미각의 소유자도 아니고, 맛집을 찾아 순례하는 취미도 없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에 속한다. 반대라고 해서 맛없는 음식을 즐기러 다니는 취미를 갖고 있지는 않다. 당연하지 않은가. 맛없는 음식을 찾아다닐리는 없으니. 다만 특별히 음식을 즐기는 취미가 없다는 거다. 그럼에도 우리 집에는 꽤 여러 종의 요리 관련 책자들이 있다. 집사람이 이것저것 사들인 덕인데, 이런 책을 본다고 해서 없던 재주가 갑자기 생길리도 없고, 내 눈 앞에서 이런 요리책을 보는 걸 본 적이 없으니 얻어 먹을 리도 없다. 그래서 이런 책들은 대개 잠 안 올 때 뒤적이는 책들 가운데 하나다. 나는 "노부, 맛의 제국"을 두세 번 읽었다. 재미있어서라기 보다 심심파적으로 생각날 때 그냥 본 거다. 그런 식으로 읽는 책에 별다른 감흥이 생길리 없다. 그러다 어느날 꼼꼼이 한 번 살피게 되었는데 생각외로 재미있었다.
이 책이 주는 재미 몇가지를 말해보자. 우리가 "초밥의 달인"이니 "맛의 달인"이니 하는 일본 만화책을 보거나, 일요일 한가한 오전 시간대 방송해주는 맛집 프로그램 따위를 보는 이유가 뭘까? 그건 아마도 직접 그 음식을 먹어보진 못했지만 언젠가 먹어볼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보는 일만으로도 즐거울 수 있기 때문 일거다. 인간의 주된 욕구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질좋은 사진으로 그런 점들을 충분히 만끽하게 해준다. 이 책의 출판사인 "디자인하우스"는 국내에서는 출판편집디자인으로 알아주는 출판사에 속한다. 물론 좋은 책도 여러 종 낸 출판사이지만 그보단 이 출판사의 이름에 이미 드러나고 있듯 출판, 편집 디자인 쪽으로 예쁘고 좋은 책들을 많이 내기 때문이다. "디자인", "행복이 가득한 집", "DOVE(도베)" 같은 잡지가 나오고, 프랑수아 플라스의 그림책 "마지막 거인",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도 있다.
아마 "노부, 맛의 제국"에 수록된 사진들도 디자인하우스측에서 원서에 실린 사진들을 재스캔받는 식이 아니라 원서의 슬라이드 필름이나 인쇄에 사용하기 위한 디지탈 이미지들을 직접 받아서 제작하는 방식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래서이겠지만(이 말은 같이 책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참 무책임한 말이기도 하다.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각기 다른 음식 맛이 나는 것이 요리이듯, 책도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편집자의 능력에 따라 확연히 다른 책이 된다) 책의 내용은 둘째로 하고라도 책 자체가 매우 예쁘다. 용지도 로버트 드니로와 마사 스튜어트의 발문에 해당하는 글은 마닐라지(紙, Manila paper)를 사용하는 등 시각적인 면을 많이 고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대형 도판으로 구성된 요리 사진들을 인쇄한 본문도 광택이 적은 특수지를 사용하여 사진 본래의 질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다.
사실 음식 자체를 질보다는 양으로 혹은 간간이 굶지 않을 정도로만 먹으면 되지 하는 이들에게 음식, 혹은 요리사가 예술인으로까지 대접받는 일에 대해 불만을 터뜨릴 수도 있다. 혹은 군산과 제주의 결식아동들이 받은 도시락을 떠올리면 이런 책을 읽는 것도 죄악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분통을 터뜨리는 건 정신건강에도 유익할 거다. 그런데 나는 종종 그런 분노들을 접할 때마다 우리나라가 생각보다 인심이 후한 나라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츠나미로 인해 피해를 본 서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원조한다고 했을 때도 저와 똑같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우리나라에도 굶주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데 외국을 돕는다는 거다. 이런 식의 논리라면 우리나라는 21세기가 아니라 23세기에 이르러서도 외국을 돕기 어렵다. 이런 논리가 국가나 사회가 아닌 개인으로 내려오면 '가족주의'가 된다. 그래서 김두식 선생은 "헌법의 풍경"에서 처음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해서” 법조인이 되길 꿈꾼 한 젊은이가 평생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겠다고 생각만 하다가 끝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아직 우리 사회가 각박하고, 내가 각박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각박하다고 생각만하는 것이 결국 그 각박함에 떠밀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건 아닐까. 실제로 아름다운 재단이나 사회단체에 기부하는 이들을 보면 그들의 삶이 경제적으로 꼭 풍족하기 때문만은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과 음식 잘 먹는 것이 어떻게 연계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을 마음의 여유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조만간 국내에 체인점이 생길 거라는 노부의 음식점에 갈 만큼 풍족한 삶을 살지 못한다. 설령 그만한 돈이 생길지라도 그 돈으로 다른 걸 먹으러 가거나 그 돈으로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나에게 좀더 유익할 거란 생각을 한다.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 "바베트의 만찬", "음식남녀", "담뽀뽀"는 음식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다. 영화 "제8요일"의 잘 나가는 세일즈 기법 강사 "아리"는 비록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지만 그의 인생엔 오로지 쓴 맛만 존재한다. 그가 성공을 위해 일에 몰두하며 사회적 지위를 얻은 대신 가족을 잃었기 때문이다. 오랫만에 아이들을 만나기로 한 약속을 잊은 아리. 그런 아버지에게 아이들은 등을 돌리고, 아리는 순간 삶의 회의를 느낀다. 그래서 떠나게 된 여행에서 아리는 다운증후군 환자인 "조르주"를 만나게 된다. 가족조차도 견딜 수 없었던 아리에게 느닷없이 맡겨진 불청객 조르주. 다운증후군 환자이자 초콜릿 알레르기까지 있는 조르주는 초콜릿을 잔뜩 먹고는 알레르기를 일으키거나 트럭 운전사와 싸우는 등 문제를 일으킨다.
가족을 찾아간 아리. 그러나 그의 가족은 그를 매몰차게 내?아 버린다. 울음을 터뜨리는 아리. 지금껏 돌봄을 받아야 했던 조르주가 이젠 거꾸로 아리를 돌본다. 마침내 아리는 강의도 팽개쳐버리고 조르주와 함께 신나는 불꽃놀이를 벌인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가족을 찾은 아리. 자신이 있을 곳을 확인한 아리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가족의 마음도 초콜릿이 녹듯 스르르 풀린다. 이제 자신이 있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조르주는 아리의 곁을 떠나 그렇게 좋아하지만 먹을 수 없는 초콜릿을 입 안 가득 넣고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건물 옥상에서 뛰어 내린다. 이 영화에서 초콜릿을 단순한 음식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이 음식은 그저 배고픔을 채우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어느날 문득 잠오지 않는 밤에 홀로 분통을 터뜨리며 무심결에 잡게 된 책이 "노부, 맛의 제국"이었다. 책제목이 제국이라니... 화가 나서 팽개쳐버리려다 조금더 읽기 시작한다. 김지하의 "밥"이 떠올랐다. "밥이 하늘입니다. /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 밥은 서로 나눠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 밥은 여럿이 갈라먹는 것 // 밥이 하늘입니다. /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 밥이 하늘입니다. /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먹는 것"이라던... 나는 가족이란 말보단 식구란 말이 더 좋다. 우리 가족이란 말보다 우리 식구란 말이... 더 정감어리기 때문이고, 가족이란 말엔 어쩐지 가법(家法)이니 가문(家門)이니 가부장(家父長)이니 하는 권위의 냄새가 나지만 식구란 말에선 여성적인 포용, 열린 개념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밥은 서로 나눠먹는 것"이란 김지하 시인의 저 말과도 통한다. 같이 밥을 먹는 사람 누구나 우리 식구라는... 웰빙이란 시대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다. 그러나 잘 먹고 잘 산다는 의미가 어디 나홀로 잘 먹는다고 되는 일이던가. 승자독식(勝者獨食,Winner takes it all)시대의 웰빙이란 가진 자가 나누지 않는다고 분통을 터뜨리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데 외국을 돕느냐고 분통을 터뜨리는 것도 승자독식의 웰빙 만큼이나 각박하긴 매일반이기 때문이다. 음식을 즐겨라. 그것이 무슨 죄이겠는가. 다만 즐기는 만큼 아니 즐기는 기쁨을 나눌 마음의 여유만 가진다면,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는 마음으로 식구가 된다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부, 맛의 제국"을 읽으며 노부유키 마츠히사가 어떻게 맛의 제국을 건설했는가 하는 그 노우하우를 배우지 못하고,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돈 벌기는 영 글렀다. 참고로 마쓰히사 노부유키(松久信幸)는 세계 각국에 모두 14개의 ‘노부’레스토랑을 갖고 있다. 그는 고교 졸업 후 스시집의 견습생으로 일했고, 그가 내세우고 있는 새로운 일식이라는 "신와쇼쿠(新和食)"란 말에서도 묻어나는 스스로는 퓨전 요리사이기 보다는 미국, 남미, 유럽식에 접목한 자신만의 일식을 노부 스타일이라고 지칭한다. 스시 요리사로 출발해 페루에 정착하면서 남미식 일식을 만들다 미국 알래스카 등지에 '스시바' 형태의 체인점을 만들면서 LA, 말리부 등지에 세계각국의 요리 스타일을 배합한 요리로 그만의 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특히 각가의 현지 체인점을 그곳의 유명인사들과 동업하는 전략을 사용하는데, 예를 들어 밀라노점은 조르지오 아르마니와 뉴욕점은 로버트 드니로와 동업했다. 그는 자신의 단골 고객들과 친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영화 "카지노, 오스틴 파워3" 등에 출연하기도 했다. 국내 진출을 앞두고 몇 년 전 신라호텔에서 그의 프로모션 행사가 있었는데, 참가비가 1인당 15만원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