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 스마일
마이크 뉴웰 감독, 줄리아 로버츠 외 출연 / 콜럼비아 (Columbia)
줄리아 로버츠(Julia Roberts), 키어스틴 던스트(Kirsten Dunst), 줄리아 스타일스(Julia Stiles), 매기 질렌할(Maggie Gyllenhaal), 지니퍼 굿윈(Ginnifer Goodwin) 등 이 영화에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화가들의 이름만큼이나 많은 여배우들이 등장한다. "에린 브로코비치(Erin Brockovich, 2000)" 이후 연기에 새롭게 눈 뜬 줄리아 로버츠의 명연에 기대하며 나는 이 영화를 보았다. 게다가 영화의 배경은 1953년에서 1954년까지의 웰슬리여대이다. 그러다보니 나의 기대는 한껏 더 부풀었다. 예전 중학생 때 기말고사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학교에서 단체 관람으로 끌고갔던 동시상영관에서 "람보"를 보고 난 뒤 선생님의 눈길을 피해 B급도 아닌 호러물 "여대생 기숙사"를 본 이래 최초의 여대생 기숙사 대개봉이 아니던가.
이 영화의 주인공 캐서린 왓슨(줄리아 로버츠) 선생 역시 나못지 않은 대단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부푼 기대를 가슴에 품고,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동부지역 누잉글랜드의 여성 명문 사학 웰슬리에 왔다. 그러나 학교측에서 제공하는 교수 숙소는 취사도구 반입이 금지되어 있었고, 하는 수 없이 근처에 다른 선생들이 기거하는 곳에 함께 하숙을 정한다. 이 영화의 감독 마이크 뉴웰(Mike Newell)은 1980년 "찰톤 헤스톤" 주연(찰톤 헤스톤 주연의 공포영화라니 미국 총기협회 회장으로서 얼마나 적절한 배역이냔 말이다)의 공포영화 "어웨이크닝(The Awakening)"으로 감독에 데뷔한 인물이다. 그외 그의 필모그라피에서 인상적인 영화는 역시 앤디 맥도웰(Andie MacDowell)과 휴 그랜트(Hugh Grant) 주연의 영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Four Weddings and a Funeral, 1994)"일 것이다(이 영화에서 나는 "존 한나(John Hannah)와 크리스틴 스코트 토마스(Kristin Scott Thomas)"를 매우 인상적으로 보았다. 그로부터 한참 뒤에야 비로소 휴 그랜트의 진가를 발견하긴 했지만).
어찌되었든 영국 출신의 감독 마이크 뉴웰은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에서 보여주었던 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이 영화에 잔잔히 깔리는 인생관을 고스란히 재현해주고 있다.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은 잔잔한 화면 전개와 더불어 각기 다른 캐릭터들이 한데 버무려지면서도 제각각의 스토리들을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영국식 코미디물이었다. 다만 이런 각기 다른 캐릭터들과 스토리는 그것이 "결혼"이라는 미혼남녀들의 절대적인 인생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가운데 진행되어 끝까지 스토리텔링의 힘을 잃지 않은 반면 "모나리자 스마일"은 상대적으로 스토리의 힘이 중반 이후엔 쳐지고 만다는 한계를 드러낸다. 런던의 무명 독립영화 제작자로 시작하여 자신의 기획 작품으로 칸느와 아카데미를 휩쓸고 헐리우드에 성공적으로 입성한 데이비드 퍼트냄(David Puttnam)의 몰락 이후 할리우드에 진출한 대개의 영국 감독들 - "미션"의 롤랑 조페, "멤페스 벨"의 마이클 케이턴 존스 등 - 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마이크 뉴웰 역시 할리우드 진출 이후 전작의 성공을 뛰어넘는 영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기대에 부풀어 웰슬리에 온 미술사 교수인 캐서린 왓슨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 보수적인 학풍과 사회에 나가 현모양처가 될 마음만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왓슨의 강의 첫날 학생들은 서부에서 온 촌뜨기 교수를 놀려주기 위해 미술사 교과서를 통째로 외워버렸다. 왓슨은 미술사 교과서에 나오는 작품들을 하나하나 슬라이드로 보여주며 학생들과 대화하고자 했으나 학생들은 모든 작품을 줄줄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참, 시간들도 많다). "모나리자 스마일"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를 연상하는 것도 어색한 일은 아니다. 기본적인 골격은 대개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의 주는 감동에 비해 이 영화에서 왓슨이 주는 감동은 어딘가 모자라는 기분이다. 그 이유는 뭘까? 내 개인적인 판단에 따르면 그건 마이크 뉴웰과 피터 위어 감독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피터 위어 감독을 "죽은 시인의 사회"로만 기억하는 이들에겐 안 된 이야기지만, 그의 필모그라피에서는 남성적인 선 굵은 연출작이 상당히 많다. "갈리폴리, 가장 위험한 해, 위트니스, 모스키토 코스트, 트루먼 쇼, 마스터 앤드 커맨더" 등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나리자 스마일"이 "죽은 시인의 사회"보다 덜 감동적이란 말에는 동의할 수 있어도, 이 영화가 "함량미달"이란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키팅 선생이 어딘가 작위적인 인물로서 감동을 끌어내도록 만들어진 인물인데 반해, 왓슨 선생은 현실 상황에서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는 인물이란 차이 만큼, 이 두 영화가 비슷한 이야기 골격을 가졌음에도 서로 다른 감각과 의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 단적인 예로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은 결국 타의에 의해 학교를 떠나게 되지만, 왓슨 선생은 보수적인 학풍에 따라줄 것을 요구 받으나 스스로의 선택으로 학교를 떠난다는 차이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들은 쉽게 왓슨 선생이 스스로의 행복을 포기하고 학교에 남아 보수적인 웰슬리의 학풍을 개혁하는 투사로 싸워주길 바란다. 마치 헬렌 켈러의 눈과 귀가 되어주었던 설리번 선생에게 기대하듯 말이다. 그것은 "죽은 시인의 사회"가 전교조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과 맞물려 주었던 시대 상황과 그 이후의 변모된 시대 상황처럼 교묘하게 우리의 시대 상황과 우연의 일치처럼 맞물린다.
결혼이 인생 최대의 목표이며 남편에 대한 내조가 여성 최고의 미덕으로 치부되던 당시 미국 동부 상황에서 왓슨 선생의 최대 난적은 학교당국이 아니라 학생 베티(키어스틴 던스트)였다. 나는 이 영화가 매우 뛰어난 페미니즘 영화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여성의 적은 여성이었더라는 식의 해석을 위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종종 남성들의 언어로 만들어진 영화(물론, 이 영화의 감독은 남성이긴 하지만)들은 수직적인 위계에 따라 정보를 제공하고, 그 정보를 관객들이 그저 묵묵히 따르다보면 저절로 감동에 이르는 마치 주입식 교육과정과 흡사한데 비해서, 여성적인 언어로 만들어진 영화들은 수평적이고, 관객과 영화 사이에서 친교(혹은 대화)를 요구한다. 마이클 뉴웰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캐서린 왓슨 선생은 결코 완벽한 스승이 아니다. 그는 어린 베티와 논쟁을 벌이고, 종종 자신의 꿈과 의지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학생들에게 실망하기도 한다. 때로는 그들에게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왓슨은 그녀의 주장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선택하여 살아가라"는 "주장의 강요"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남성사회가 말하는 승리의 메시지란 걸 깨닫게 된다. 어쩌면 마이클 뉴웰의 이런 주장은 1960년대 초반의 페미니즘이 거쳐 온 지난한 싸움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당시의 페미니즘에 대한 나의 거친 오해라는 비판을 감수하고 말하자면, 한동안 페미니즘은 기존 사회에서 여성이 여성스러움으로 상징되던 모든 것들을 거부하자는 일종의 안티운동으로 드러나곤 했었다. 그러던 것이 현재에 와서는 어째서 여성이 여성스러울 수 있는 가치를 스스로 폄하해야 하는가라는 식으로 변모해 간 것도 사실이다. 이걸 성숙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타협이라 생각하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런 판단은 각자의 몫이고, 이 영화에 드러나는 왓슨 선생의 깨달음은 훨씬 더 자유롭고, 포용력이 있어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모나리자 스마일"의 광고 카피 "오늘, 당신에게 기적 같은 미소가 찾아옵니다!"란 것은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몰라도 타깃을 전혀 잘못 잡은 것이다(물론, 영화 중반에 줄리아 로버츠가 눈 밭의 계단에서 미끄러진 뒤 버여준 표정 연기는 정말 좋았다).
"모나리자 스마일"에서 감독과 영화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기적도 아니며, 여성에 대한 포장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베티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던진 한 마디 "모나리자의 미소가 겉으로는 웃고 있는 듯 보여도 사실은 아니었다"라는 깨달음이어야 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라는 것이어야 했다. 자, 이제 당신이 마이클 뉴웰이 던진 질문에 답해야 할 때이다. 과연 "모나리자의 미소'에서 이 여인이 “해 맑게 미소 짓고 있는 것은 과연 진정으로 웃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이 영화 속에서 다양한 예술 작품들 가령, 수틴, 잭슨 폴락,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날 수 있다. 어느 시대의 어느 예술가들이든 시대와 불화하지 않았던 인물은 없다. 다빈치는 사생아였고, 반 고흐는 평생 죽은 형의 이름을 물려받은 죄의식에 시달려야 했고, 잭슨 폴락은 아내이자 화가였던 "리 크레이즈너"가 고통이자 곧 사랑이었다.
"모나리자 스마일"에 대단한 기대를 품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에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속단하지도 말자. 좋은 그림과 좋은 책은 한 눈에 들어오기도 하지만, 천천히 곱씹을 수록 감회가 새로운 것들도 있는 법이다.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성들이 모두 어느날 대오각성해서 살아가는 감동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진짜 현실 속의 우리들이기도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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