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기의 예술
폴 오스터 지음, 최승자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6월
"폴 오스터" 1947년생으로 오늘날 미국의 현대문학을 대변하는 작가의 위치에 올라선 인물이다. 솔직히 고백컨대 소설을 손에서 내려놓은지 꽤 오래전 일이라 폴 오스터 최근 작들은 읽지 못했다. 이 책 "굶기의 예술"을 구입한 까닭도 알고보면 폴 오스터에 대한 나의 궁금증 때문이라고 할 수 없다. 나는 그에 대해 도통 궁금하지 않았으므로... 다만 이 책을 구입한 까닭에 대해 좀더 부연하자면, 이 책에서 "파울 첼란"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파울 첼란에 대해서는 아직도 생각해봐야 할 무언가들이 많이 남아 있는 탓에 나는 폴 오스터란 작가가 나보다 누릴 정보의 양이 많다는 판단 아래 그의 시선을 빌어 파울 첼란을 읽어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폴 오스터의 이 책을 읽은 까닭치곤 얍삽하다.
아직까지도 폴 오스터에 대해 궁금해지지는 않고 있으나 그에 대해 약간의 흥미는 생겼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는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 앞에 선 인간"을 먼저 읽고 싶다. 이 책은 미주와 찾아보기를 포함해서 1120쪽에 이르는 책으로 읽다가 피곤해지면 목침 대용으로 이용할 수도 있을 만큼 두툼하다. 하지만 언젠가 폴 오스터를 읽어주고 싶어졌다. 그건 이 책의 날개에 적힌 다음과 같은 내용 때문이다.
'문학'이 가진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예를 들어 영화와 비교했을 때, 언제나 단 한 사람이 단 한 권의 책과 조우한다는 것이죠. 즉, 항상 일대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 작가이고, 당신이 그 독자이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어느 한 페이지 위에서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만나는 그곳이, 내 생각에는 인간의 의식들이 만날 수 있는 가장 친밀하고 은밀한 장소입니다. 자신이 모르는 이방인의 의식 속으로 잠입해, 우리 인간의 공통적 휴머니티를 발견하는 순간은 오로지 그 때뿐입니다. 그래서 문학은 절대로 죽을 수 없는 것이죠.
- 폴 오스터, 1996년 "월드가이드"지와의 인터뷰 중에서
물론 그가 한 모든 말에 내가 모두 동의하는 바는 아니나 그가 문학에 대해 보이는 저 태도만큼은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고 싶어질 만큼 마음에 든다.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홀로 영화와 만난다는 사실에서 그가 예시한 사례는 적절치 않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인간의 의식들이 만날 수 있는 가장 친밀하고 은밀한 장소"로서 책 혹은 문학이 그 어떤 장르, 매체보다 고독하고 그러므로 은밀하고, 친밀하다는 점에 동의한다.
예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서구의 문학적 전통은 물론 동양의 문학적 전통에서도 종종 시문학( 비극과 서사시)가 문학의 상위 장르로 간주되었다. 문학적 전통 안에서 소설 혹은 산문이 출현한 것은 근대의 일이다. 시인들 혹은 시인 지망생들이 떠벌이기 좋아하는 시문학의 우월성은 어찌보면 매우 같잖은 일인데, 그 까닭은 이 때 말하는 시문학은 지금 시인들, 시인 지망생들이 쓰고 있는 짤막한 서정시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짤막한 서정시가 출현한 것은 아무리 잘 보아주어도 소설에 비해 단지 1세기 정도 먼저인 낭만주의 시대의 전통이다.
우리가 흔히 문학하면 떠올리는 "소설과 시"는 그런 의미에서 모두 근대의 산물이다. 근대의 산물인 이들 장르가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다. 현실이 허구를 압도해버리는 상황이 도처에서 발생한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문학 혹은 글쓰기의 추세는 허구적인 글쓰기에서 비허구적인 글쓰기로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다. 알베르 까뮈, 장 뽈 싸르트르, 시몬 드 보봐르, 조지 오웰 등이 누리는 오늘날의 명성이 꼭 그들의 소설 때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빈센트 반 고흐가 오늘날 누리는 명성의 근저엔 그가 누구보다 뛰어난 산문가(그의 편지들을 읽어보라. 책으로도 나왔다)였고, 그의 편지가 그토록 많이 남겨진 덕이다.
폴 오스터의 산문집 "굶기의 예술"이 보여주는 것은 문학평론가 유종호 선생의 "글이란 성취도에 의해서 가늠되는 것이지 소속 장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란 말처럼 이 글이 정식 소설 작품이 아니란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이 은밀하고 친밀한 공간에서... 더 많은 이방인을 만나야 한다.
우리는 더 잘 배워야 한다,
우리가 무엇이며 무엇이 아닌지를.
우리는 바람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어지러운 무숙(無宿)으로 유혹하는
온갖 부유하는 기분이 아니다.
우리는 더 잘 분간해야만 한다.
우리 자신들과 타인들을.
우리가 아닌 것이 많이 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많이 있다.
우리가 되지 않아도 될 것이 많이 있다.
- 로라 라이딩, "바람의 이유" 중에서, 폴 오스터, "굵기의 예술"에서 재인용
그리고 우리는 예술가로 분류되는 인간형, 그들이 느끼는 허기와 궁기 속에 슬프게도 나 자신의 감춰진 여러 얼굴들 중 하나와 대면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닌 다른 많은 것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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