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의 엽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3년 12월
새해라고 별다를 것이 있겠는가 생각하다가도, 매사 시작이 있어야 끝이 있고, 시작이 없으면 끝도 없는 법"有始有終, 無始無終"이라 생각하면 한 해의 劈頭에 사람들이 유난히 紛紛한 것도 다 뜻이 있는 법이라 생각하네. 乙酉年 歲時라 하는데, 歲時의 본래 뜻 자체가 一年 중의 그때그때를 일컫는 것임에 劈頭라 하여 대를 쪼개듯 시간을 쪼갤 수는 없는 법이지 않은가. 그리 생각하며 새해 첫 출근을 하였네. 책상 위에 한 권의 책이 단정하게 놓여 있는 걸 보고 마음이 잠시 번다해졌으나 포장을 뜯고 내용을 보니 새해의 決氣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들었네.
어쩌면 사형수는 물론이고 장기수들은 모두 인생을 포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은 누구보다도 약하고 서러운 자이기 때문에 그 표현이 치열하고 극성일지도 모른다. 괴롭고 서글픈 하루의 마지막을 알리는 취침나팔소리마저 자즈러지고나면 이 8호 감방에도 이윽고 무덤속 같은 정적이 찾아든다. 가끔 악몽에 시달리는 잠꼬대가 이 정적을 깨트리기도 하지만 내일아침 기상나팔소리가 같끝같이 이 정적을 쪼갤 때까지 여기 이 감방은 그대로 하나의 무덤이 된다. <본문 70쪽>
예전에 나는 人生의 方法論 같은 걸 만들어 스스로에게 삶의 姿勢를 어찌하도록 할 것인지 주문한 적이 있었네. 그 무렵의 나는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지탱하고 싶었을 걸세. 그 때 내 스스로가 다짐했던 삶의 자세는 "철저하게, 진지하게, 치열하게"였다네.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으로 넘어가던 무렵의 나는 그렇게 내 안의 무언가를 부숴내고, 세상을 갈아엎고 싶어 했었네. 그런데 신영복 선생의 저 글을 읽노라니 그 무렵의 내 極性맞음이 "실은 누구보다도 약하고 서러운 자이기 때문"이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만드네.
시인 김수영은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라고 노래했는데, 나는 내 방조차 바꾸지 못하고 어느덧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온다는 삼십세조차 훌쩍 넘기고 말았네. 如前하네. 如前히 나는 스스로를 窮僻하게 몰아세우고 있네. 이 힘겨운 세상을 나홀로 무사히 넘기는 듯 하여 죄스럽다 말하면서도 실은 누구보다도 염치없이 살고 있으이.
겨울이 또 다가오고 있지만 이곳의 저희들은 여전히 건강합니다. 다만 '如前한' 生活 속에 如前한 內容이 담기면 담긴 채 굳을까 걱정입니다. 고인 물, 整頓된 물, 그러나 썩기 쉬운 물. 명경같이 맑은 물, 얼굴이 보이는 물, 그러나 작은 돌에도 깨어지는 물입니다. <본문 108쪽>
스스로를 警戒하는 일을 省察이라 하지만 이는 신영복 선생의 말씀처럼 차분하게 정돈된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기 보다는 작은 돌조각 하나에도 깨어지는 물의 思惟 방식일세. 흔들리지 않는 인생이란 정적에 갇힌 무덤 속의 삶이라 생각하네.
저는 各自가 저마다의 삶의 터전에 깊숙히 발목 박고 서서 그 '곳'에 固有한 主觀을 더욱 강화해가는 노력이야말로 客觀의 地平을 열어주는 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곳'이, 바다로 열린 시냇물처럼, 全體와 튼튼히 連帶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思考의 洞窟을 벗어나는 길은 그 삶의 터전을 選擇하는 문제로 還元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孟子에 "矢人惟恐不傷人 函人惟恐傷人 巫匠亦然 故術不可不愼也"(활 만드는 사람은 사람이 상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방패를 만드는 사람은 사람이 상할까 두려워한다.)의 一節이 想起됩니다. 스스로 시대의 복판에 서기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시대와 역사의 대하로 향하는 어느 가난한 골목에 서기를 주저해서도 안되리라 믿습니다. <본문 139쪽>
나는 健全과 健康은 다른 것이라 생각하네. 신영복 선생은 "강의" 시경편에서 "시경의 독법은 사실성(寫實性)과 진정성(眞正性)에 있습니다. 공자는 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평하여 ‘사무사(思無邪)’라 하였습니다. "詩三白篇 一言以蔽之思無邪." ‘사무사(思無邪)‘는 ‘거짓 없음‘ 입니다. 사(思)는 조자(助字)로 해석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사실성이 시경의 정신입니다"라고 하였네. 건전과 건강의 사이엔 이런 "思無邪"에서의 차이가 있다 생각하네. 사실 마음 번다한 가운데 건전하기도 어려운데, 건강하기를 바라는 건 더욱 어려울 일일 걸세. 건전이란 것이 윤리적인 규범에 자신을 맞추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라 한다면, 건강이란 자신의 본성 자체대로 행함에도 그 행위가 "思無邪"한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네. 즉, 마음 가는 대로 행함에도 어긋남이 없는 것을 건강하다고 할 수 있는 걸세.
공자는 論語의 爲政篇에서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며 학문의 수양과정을 이렇게 말했네.
"吾十有五而 志于學, 三十而 立, 四十而 不惑, 五十而 知天命, 六十而 耳順, 七十而 從心所欲不踰矩"
從心이라, 大聖 공자조차도 나이 일흔에 이르러서야 "일흔 살이 되니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라고 하는데, 우리네 같은 한낱 匹夫, 匹婦는 그 지경에 이르긴 더욱 요원한 일일세. 허나 마음 가는 대로 살 수 없으면 현실이 시키는 대로 살 수밖에 없어지는 것이 삶이니, 더욱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걸세.
그런 의미에서 맹자의 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네. 일종의 "立場論"이라고도 할 수 있네만, 맹자의 저 말은 단순한 "易地思之"의 사유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세. "矢人(활을 만드는 장인)"은 그 입장, 역할 자체가 사람을 해하는 무기를 만드는 것이고, "函人(방패를 만드는 장인)"은 무기로부터 사람을 상하지 않게 만드는 입장일세. 사람을 해하는 무기를 만드는 위치에 서 있는 이가 제 아무리 思無邪라 할지라도 이를 곧이 곧대로 받을 수는 없을 걸세. 그가 만일 정말 훌륭한 인간이고 싶다면 제 입장을 타인에게 이해받고자 하기 전에 자신이 잘못 서 있는 그 입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먼저일 것이네.
자네가 보내준 신영복 선생의 "엽서"를 모두 살펴 읽지는 못했으나 오전 내 살펴보고 든 내 마음 한 자락일세. 을유년 새해에는 더욱 건강하고, 부디 스스로를 잘 보살피고 돌보는 한 해가 되길 바라네. 나 역시 자네의 염려를 받아 올 한해엔 곁가지 치는 법 없이 "思無邪" 하는 삶의 자세를 견지하도록 힘써 보겠네.
2005. 1. 3. 風蕭軒에서 風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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