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본 윤동주 전집 - 윤동주 지음, 홍장학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7월
내가 처음 맘 먹고 읽은 시집이 누구 것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지 싶다. 윤동주를 읽고나서 김남조 시인의 시를 읽고, 소월을 읽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특별히 시를 좋아하는 집안이 아니라면 대개 첫 시집은 제 돈 주고 사서 읽는 것이 아니라 집안 어딘가에 굴러다니는 시집을 한 차례 읽어보는 것으로 시작되리라. 그러니까 내 손에 우연찮게 윤동주 시인의 시집이 잡힌 것은 그 무렵 우리 집의 누군가가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소장하고 있었다는 건데, 정음사판 윤동주 시집은 그후로도 쭈욱 내 서재에 보관되어 있다.
윤동주 시인은 1941년 연희전문 졸업 기념으로 엮고자 했던 것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인데, 일제 말기의 사회분위기와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시집으로 묶지 못하고, 3부를 엮어 한 권은 시인이 존경하는 이양하 교수에게 다른 한 부는 가까운 후배였던 정병욱에게 주었다. 졸업 후 일본 유학길에 오른 윤동주 시인은 쿄토 도시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1943년 7월 여름방학을 맞은 귀향길에 '요시찰 인물'로 1년여의 감시를 당하던 끝에 체포되어 끝내 옥사하고 만다.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둔 145년 2월 16일의 일이었다.
일제 강점기 숱한 지식인들이 지조를 꺽고 일제에 타협하거나 그 주구로 활동한 우리 문학의 슬픈 역사를 되짚어 볼 때, 윤동주 시인은 일제에 의해 변절의 유혹을 받기엔 너무 젊은 시인이었다. 시인 윤동주 혹은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평범한 젊은이 윤동주는 그런 까닭에 우리에게 너무나 가슴 아픈 시인이자, 청춘의 엔솔로지일 수 있다. 그가 무언가 책임질 연배에 속했다면 틀림없이 변절의 유혹이라도 당했겠지만, 그러기에 그는 너무 젊었고, 그 무엇도 책임질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굴절은 그의 생명을 앗아가버렸다.
윤동주의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이 다시금 우리 손에 전달되기까지는 친구이자 후배였던 정병욱의 공로가 크다. 그런 점에서 정병욱은 윤동주에게 있어 카프카의 친구 "막스 브로트"의 역할을 한 소중한 사람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948년 정음사에서 처음 정식으로 출간되었다. 해방 직후의 일이니 윤동주의 시들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도 어느새 반세기를 넘겼다. 움베르토 에코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란 책에서 작가 사후에 발간되는 유고집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를 쓰고 있다.
그러니 작가들이여, 당신 사후에 후손들이 당신의 원고를 이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당신의 원고가 이용되는 것을 경계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당신이 생전에 출간하기로 작정한 것만 남겨 놓고, 교정지를 포함해 여타의 것은 그날그날 태워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메모가 반드시 필요하고, 죽음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오기 때문에 출간을 원하지 않는 글이 남겨질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물론 에코는 적당한 과장과 풍자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니 꼭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작가가 생전에 자신의 전집을 완성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사후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선 유족과 비평가들의 몫으로 남는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일 게다. 에코의 이야기는 저 뒤로도 세 가지 위험 "첫째. 미발표원고가 발표됨으로 당신이 완전히 바보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 둘째. 작가 사후 벌어지는 심포지엄을 통해 작가에 대한 평가가 정례화 되는 것. 셋째. 사적인 편지가 공개되어 신비감을 상실하는 것 "등을 들어 미출간 원고가 발표되는 것이 끼칠 염려에 대해 익살을 떤다.
이 말들은 시집 자체가 유고시집이란 점에서 최소한 윤동주 시인에겐 부합되진 않지만, 작가 사후에 정본을 완성하는 작업, 유고 작품을 엮는 문제가 얼마나 민감하고 어려운 일인지 잘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지적이다. 얼마전 열린책들에서 "한국대표시인초간본총서"를 발간하여 나는 정음사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이외에도 초간본으로 재출간된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갖고 있으며 이번 문학과지성사판 "정본 윤동주 전집"을 포함하면 같은 시인의 같은 시집을 세 권 소장하게 된 셈이다. 어찌보면 문학을 전공하고, 연구하는 이가 아니라면 이들 가운데 한 종류만 가지고 있어도 될 일이다. 게다가 여러 출판사들에서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이리저리 엮고, 제목도 여러가지가 있다. 대개는 정음사판 윤동주 시집을 저본으로 삼고 있으나 정음사판 윤동주 시집에 수록된 것이 반드시 정본이라 하기엔 여러가지 미흡한 점이 있다. 우선 일제 강점기에 시인이 자기 검열을 통해 걸러낸 문구들이 문제가 될 것이고, 지난 99년 출간된 사진판과 대조했을 때 이 차이는 상당히 크다고 한다.
거기에 더불어서 무엇을 정본으로 할 것인가를 확정짓는 일은 윤동주를 문학사적으로 연구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 지난 2004년 7월과 8월에 연달아 두 권의 윤동주 전집이 출간되었는데, 하나는 윤동주의 모교인 연세대학교 출판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말하고 있는 문학과지성사판 윤동주 전집이다. 정본이 무엇인가를 확정짓는 일은 이렇게 어렵다. 지난 번 열린책들에서 나온 초간본총서 중 하나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역시 수록 순서와 서문 등에서 그대로 실었다는 것뿐이지 윤동주 시대의 말을 요즘말로 바꿔 수록했기 때문에 약간씩의 차이가 있다. 연세대판은 읽어보지 않았으니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낫다고 말하기도 어려우며 설령 읽었다고 해도 이 둘 사이의 우열을 가릴 능력도 없다. 결국 어느 것을 정본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어느 출판사의 몫이 아니라 연구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다만, 문학과지성사판 "윤동주 전집"은 "원전연구"가 같이 출간되었으니 이 둘을 함께 읽는 것이 도움이 될 듯 하고, 윤동주 시인의 믿을 만한 시집 한 권 소장하고 싶다면 권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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