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시인론
김주연 지음 / 열화당 / 1986년 3월
나는 이 책의 초판을 가지고 있는데, 초판 발행일은 1983년 8월 10일로 되어 있다. 1983년이라. 그 무렵의 나는 아마 중학교 1학년 무렵이었을 게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첫해에 열린 사생대회 겸 교내백일장에서 나는 사생대회에 나갈 것인지, 백일장에 갈 것인지 잠시 고민하다가 몇 가지 점들을 고려해 백일장으로 정했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우선 초등학교 때까지는 종종 사생대회에서 상도 받고 했지만 같은 초등학교 출신으로 워낙 출중한 그림 솜씨를 갖고 있던 친구가 같은 중학교에 진학한 것을 알기에 그 방면으론 경쟁이 안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같은 반이 된 적도 있었는데, 워낙 그림 솜씨가 빼어나서 나중에 당연히 미대에 진학하리라 생각했고, 본인도 그럴 마음인 것을 알았다. 데생 실력은 엇비슷했지만 색채에 대한 감각면에서 나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미술을 하기 위해선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을 어렸을 때 일찌감치 깨우친 탓도 있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사생대회에 나가려면 여러 준비물들을 꾸려가야 하는데 일단 그것이 귀찮았고, 백일장은 원고지와 볼펜만 준비하면 되었기에 편하게 마음 먹었던 거다.
아마 그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지 않았다면 훗날까지 어설프게 글을 쓰리란 결심 따위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중학생이 되어서 이전과 확실히 달라지는 점은 세계명작을 성인 버전으로 읽게 된다는 것일지 모르겠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아동용과 성인용 사이에 청소년을 위한 세계명작이 드문 탓도 있고, 중학생만 되더라도 어쩐지 청소년용 독서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서 일 거다. 그렇게 처음 릴케의 시를 읽고, 하이네를 읽는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렸을 때도 프랑스 시인들보다는 독일 시인들을 더 좋아했다(물론 지금은 그런 구분 자체가 모호해질 지경이 되었지만). 어쨌든 세계명작하면 으례 먼저 떠오르는 건 최소한 내게는 독일 문학이었던 듯 싶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이 "독일시인론"이기는 하지만 독일이란 국적명의 분류법은 적당한 분류는 아닌 듯 싶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독일어 시인론이거나 독일어 문학이라고 해야 맞는 말일 거다. 당장 라이너 마리아 릴케만 하더라도 출생지는 독일이 아니라 체코 프라하며, 대학도 프라하에서 다녔다. 하지만 누구나 그를 독일 시인으로 기억한다. 그만큼 독일어권 문학이란 넓은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책은 김주연 선생의 첫 책은 아니지만 책 날개는 젊은 날의 김주연 선생 사진이 있다. 지금으로 보자면 꽤나 큰 안경알에 목까지 올라오는 폴라티를 입고 있다. 아직 젊다. 어떤 평론가의 젊은 날의 모습을 본다는 건 시인의 젊은 날을 보는 것 못지 않은 아련함이 있다. 게다가 우리 사회에서 비평이란 언제나 창작에 비하면 빛을 보지 못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그건 어쩌면 우리 사회가 비평없는 사회인 탓도 클지 모르겠다. 이 책에 대해 간단히 말하자면 괴테로부터 첼란에 이르는 독일어 시인들(이외에도 쉴러, 휠덜린, 노발리스, 하이네, 뫼리케, 니체, 스테판 게오르게, 호프만스탈, 릴케, 헤세, 벤, 트라클, 크롤로브 등), 모두 15인의 시인들의 생애와 작품 세계, 주요 작품들, 연보를 살펴 볼 수 있게 꾸며져 있다. 한 명의 시인당 평균 25-30쪽 정도를 할애하고 있지만 요새 책이 아니라 글자체가 작으므로 본문 내용은 좀 많은 편이다. 사실 지난 1년 내가 감당하기 벅찬 책들을 본의 아니게 많이 읽어야 했다. 예전엔 누가 당신의 전공이 무어냐고 물으면 언제나 문학이라고 말했는데, 이제 나는 본래 전공이 무엇인지조차 가물가물해졌다. 하지만 마음속에 내가 이르고자 하는 본령은 언제나 문학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필연적으로 예속과 권력이 뒤섞이는" 언어 앞에서, 즉 문학의 무력감을 호소해왔다. 신화가 되고자 하는 언어에 대해 그는 전복적, 파괴적 실천으로서의 문학을 요구한다. 문학은 인간을 구원한다는 누구도 부여하지 않은 소명 속에서 문학적 유토피아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그러나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신화화되려는 문학(언어)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문학(언어)에 의해서만 가능하므로... 한 때 나는 학교 앞 호프 집에서 친구들을 앞에 놓고 우렁차게 "문학은 나의 힘"이라고 외치며 건배를 하곤 했다. 과연 문학은 나의 힘이었던가? 아니면 젊은 치기의 힘이 그런 건배를 가능하게 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번 겨울엔 오래 묵은 친구 같은 시집들을 꺼내 읽어봐야겠다. "운명과 현자에 의해 단련되어/ 내 젊은 감각은 내 죄를 통해/ 자연에 항거하는 폭군이 되었지./ 나는 자연의 어머니 같은 손으로부터/ 늘 그렇듯이 받아들인 것을 믿기 힘들 만큼 취했고,/ 하여 어떤 사랑도 내 마음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지." - F. 휠덜린의 "휘페리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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