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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번역시집 1. 은박지에 새긴 사랑/ 호치민 외 지음, 김남주 옮김 / 푸른숲
김남주 번역시집 2.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하이네, 브레히트, 아라공, 마야코프스키 지음 | 김남주 옮김 / 푸른숲
체 게바라의 시집이라 할 수 있는 "먼 저편"을 읽고, 나는 이들 - 호치민, 네루다, 푸쉬킨, 로르카, 김남주 등 - 이 어쩐지 서로 매우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는 1980년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목에 현상금이 걸려 저자거리마다 내걸린 현상수배범들의 사진을 보며 언젠가 역사책에서나 보았음직한 동학농민군의 효수된 사진과 이미지가 흡사하단 말을 했었는데, 혁명가들은 별을 꿈꿨기에 서로 이토록 닮아 있는가? 시인 신경림은 김남주 시인의 번역 시선인 "은박지에 새긴 사랑"과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의 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김남주 시인을 시인이기에 앞서 투사로 아는 사람이 많다. 이를테면 투사였기 때문에 그만한 시적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는 생각이다. 반드시 폄하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여기에는 그가 다른 시인들이 거치는 일정한 시 수업을 거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이 들어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그러한 생각은 잘못임을 이 번역시집은 말해주고 있다. 여러 해에 걸쳐 좋아하는 호치민, 네루다, 브레히트, 하이네의 시 수백 편을 박아 쓰듯 우리 말로 옮긴 이 번역시집이야말로 그가 얼마나 열심히 시수업을 했는가에 대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문학(文學)이란 무엇인가? 한자어로 표기되는 예술장르 중에서 유일하게 학문의 영역에도 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은 오로지 문학뿐이란 사실을 사람들은 종종 망각한다. 문학은 인식의 문제와 깊은 연관을 맺는다. 우리는 제도 교육권 내에서 오랫동안 문학을 공부해왔지만, 실제 문학은 늘 멀리 있거나 감상자로서의 입장만 강요받는다. 이 책의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임형택은 "동양의 시들을 보면 시인의 시가 있는가 하면 시인 아닌 이의 시가 있다. 또 시로 잘 만든 시가 있는가 하면 안 짓고는 못 배겨서 읊어낸 시가 있다." 라고 말한다.
동녘의 희뿌연 빛이
이제 붉게 터오고
어둑어둑하던 하늘이
홀연히 밝아온다
따뜻한 기운이 온 우주를 감싸고
길 떠나는 사람에게
갑자기 솟구쳐 오르는 시심이여
<호치민 시, 김남주 옮김, "새벽 호송" 중에서>
문학을 특별한 어떤 이들의 것으로 한정해 버리는 제도로서의 등단제도는 전세계적으로 단 두 곳에만 있는 제도이다. 일본과 한국이 그 두 나라이다. 서구의 작가들의 인터뷰를 읽다보면 언제 어떻게 데뷔했는가라고 묻지도 않는다. 대신에 언제부터 스스로를 작가로 인식하기 시작했느냐고 묻는다. 본인이 작가라고 인식하고, 글을 써서 팔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작가이고, 시인이다.
일제 시대 근대 문학이 본격적으로 내면화되는 기간 동안 이념적으로 탈색된 서구 문학을 수용하도록 강제된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교육 받은 서구 문학은 일본 제국주의 시절의 서구 문학, 일본에 의해 검열당한 것들을 일차적으로 문학인 것으로 배우게 된다. 그렇게 문학을 익힌 이들은 다시 남북한 분단 과정에서 남북으로 서로 갈리어 남한에는 다시 이념적으로 어느 일방만 존재하는 반쪽 문학가들만 자리잡게 된다.
우리는 1930년대 우리 문학을 퇴폐와 낭만, 허무와 염세로만 기억하면서도 정작 우리 문학이 1960년 4.19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런 경향이 지속되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순수하지 못한 순수문학을 문학의 정수로 이해하면서 예술은 현실 정치와 무관한 어떤 것, 문학은 현실 사회와 무관한 어떤 것이고, 어떤 것이어야만 하는 것으로 세뇌당한다. 그런 의미에서 바이런은 연애시의 달인이고, 하이네도 똑같이 이해된다. 루쉰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철로 된 방"에 갇힌 사람들처럼 우리의 문학 교육, 예술 교육은 문학과 예술이 사회와 괴리된 어떤 것들을 말하는 것인줄 착각하게 만들었다.
러시아의 푸쉬킨은 단 한 줄의 싯구로 기억된다. "삶이 그대를 속일 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소녀적 감수성의 멜랑꼴리가 이 시인의 전부인양 각인되었다. 그가 1818년 문학과 역사 토론을 목적으로 하는 "녹색등협회"에 가입하면서 농노제와 짜르 전제 정치에 반대하는 정치시를 쓴 까닭에 1820년부터 5년 동안 긴 유배 생활을 했다는 사실은 망각된다. 사극과 비극은 민중을 위해 쓰여져야 하며 그럼으로써 보편적 호소력을 지녀야 한다는 희곡 원칙을 담은 "보리스 고두노프"를 지은 이라는 사실은 애써 부각하지 말아야 할 그 무엇이 된다. 그에 비해 호치민은 '옛 시는 그저 자연의 아름다움만 좋아하여 산과 물과 안개와 꽃, 그리고 눈과 바람을 읆었다' 그러나 '현대시에는 반드시 강철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동지여 믿어다오 때는 오나니
마음을 사로잡는 행복의 별이 빛나고
러시아는 긴 꿈에서 깨어나
전제 정치의 폐허 위에
우리들의 이름을 기록하자
<푸쉬킨, "차다예프에게" 중에서>
스스로를 '시인'이기 보다는 '전사'로 칭하고자 했던 시인 김남주(金南柱), 그는 1946년 10월 16일 태어나 1994년 2월13일 세상을 등졌다. 광주제일고등학교 재학 중 획일적인 입시위주 교육에 반발하여 스스로 자퇴한 뒤 1969년 검정고시를 통해 전남대 영어영문학과 입학한 그는 박정희의 3선 개헌 반대 등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고, 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전국 최초의 반(反)유신 지하신문인 "함성"을 제작하였다. 결국 그는 이듬해 반공법 위반 혐위로 구속되고 대학에서 제적당하고 만다. 8개월간 감옥에 갇힌 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농사일을 하면서 1974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잿더미'와 '진혼가'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한다.
1978년 그는 서울에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에 가입하였으나 이듬해인 1979년 '남민전사건'으로 긴급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된다. 그의 첫 시집 "진혼가"는 그가 수감 중이던 1984년에 출간된다. 그는 '시베리아' 혹은 '냉동실', '납골당'으로 불리는 0.75평의 독방에서 자신을 '투쟁의 도구'로 생각하고, 브레히트의 시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의 화자처럼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의 심정으로 '건강을 해치는 것을 하나의 이적행위'로 간주하며 체력단련에도 힘쓰는 한편 사상단련을 위한 방편으로 시를 썼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광주 이감 후에 주로 많은 시를 쓰게 되었지요. 보통은 외고 있다가 면회 온 외부인사나 가족, 출감하는 학생과 민주인사들에게 구술해서 전해주거나 아니면 우유곽을 해체했을 때 나오는 은박지에다가 못으로 썼습니다. 은박지만을 얇게 떼어내서 부피를 최소화한 다음 뼁끼통 안에다 감추는 등 며칠 만에 한 번씩 들이닥치는 검방 때 들키지 않게 애를 썼지요."라며 감옥이라는 최악의 조건에서 시를 쓰고, 번역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시인들 - 호치민, 네루다, 푸쉬킨, 르이레에프, 오도예프스키, 로르카, 하이네, 브레히트, 아라공, 마야코프스키 - 을 세상에 알리고, 그 자신의 단련을 위해서. 게바라의 '탐독'이란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 - 네루다, 로르카, 마야코프스키 - 은 놀랍게도 김남주 시인의 번역 시선에 수록된 시인들의 명단과 일치한다.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번역원고를 들키면 빼앗길지도 모르고 도대체 펜과 종이조차 제대로 주어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온 정신을 집중하여 하이네를, 브레히트를, 네루다를 번역하고 있는 한 사람을 생각해보라. 아마 이것은 세계 번역사에 남을 참혹하게 위대한, 최악의 고통 속에서만 솟아오를 수 있는 영광의 한 페이지"일 것이라 말한다. 같은 글에서 염무웅은 김남주가 석방되기 얼마전인 88년 5월 23일자 편지를 소개한다.
방금 저는 외국어를 통해서 세계를 바르게 인식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 바른 인식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서 인간관계와 사물과의 관계를 유물변증법적으로, 계급적인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학의 방면에서 특히 저는 그러했습니다. 하이네, 아라공, 브레히트, 마야코프스키, 네루다의 시 작품을 통해서 저는 소위 시법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현실을 물질적인 관점에서 그것도 계급적인 관점에서 묘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문학의 생명은 감동에 있다. 그런데 그 감동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진실에서 온다. 진실은 그러면 어디에서 오는가? 적어도 계급사회에서 그것은 계급적인 관점에서 인간과 사물을 읽었을 때이다"라고 말입니다. 문학의 예술성이 언어에 힘입은 바 절대하다 할 정도는 아니라도 대단하기는 하지만 그 언어 자체도 계급적인 각인이 찍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문학의 예술성에도 위의 제 생각이 일차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안 되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부분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탓에 굳이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부연하자면 그가 외국어를 통해 세계를 바르게 인식했다고 말하는 것은 당시 독재정권의 정보통제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1988년 88 서울올림픽의 화려한 잔치가 끝나고, 전두환 정권은 그해 12월 김남주를 형집행정지로 9년 3개월만에 석방한다. 이전 반공법 위반혐의로 8개월간 구속되었던 것까지 함께 환산하면 그는 무려 10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이듬해 남민전 동지였던 박광숙과 결혼한 그는 1994년 췌장암으로 사망하여 망월동 5.18묘역에 안장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 책의 번역상태를 좋다고만 할 수는 없을 지도 모르겠다. 그 흔한 사전 한 권, 참고서적 한 권 없이 옥중에서 오로지 자신의 정신 하나만 놓고, 스스로를 단련하듯 은박지에 못으로 꾹꾹 눌러가며 번역한 시집을 놓고 팔자좋게 오역이나 번역의 매끄러움을 논하는 것은 분명 죄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번역한 시집만큼 훌륭한 번역시집의 전범 역시 드물다.
이 책은 번역자 김남주의 사후에 재발간된 탓으로 옮긴이의 말을 대신하여 박광숙 선생의 글이 실려 있다.
그는 옥중에서 발간한 해방시집 1권에서 '글은 어떤 사람에게는 화를 돋우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흥을 돋우게 한다네. 어떤 사람에게는 쓰지만 약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달지만 병을 주기도 한다네, 모르면 몰라도 아마 내가 좋아서 번역한 시나 내가 쓴 시는 세상을 거꾸로 살고 있고 그렇게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조금은 쓸모다 있는 약이 될지도 모르지' 하고 서문에 썼습니다. 7년 전에 썼던 이 말이 지금에도 유효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전망과 대안'이 없는 시대라고 하지만 이 뒤엉키고 헝클어진 사회에서 진실과 순결을 노래한 시인들의 시는 어느날엔가, 그 언제인가는 천상의 선약이 되어 이지러진 세상을 치유하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요.
<김남주 시인 추모 1주기에 부쳐 박광숙>
김남주 시인이 번역한 시들은 모두 두 권의 책으로 엮였다.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일 뿐더러 국내에 한 권의 번역시집도 출간되지 않은 시인인 경우도 있다. 이름은 너무나 유명하지만 정작 그들의 시를 읽을 수는 없었던 "마야코프스키, 루이 아라공, 호치민" 이 있는가 하면, "네루다, 푸쉬킨, 하이네, 브레히트, 로르카" 와 같이 번역 시집이 있지만 일부만 알려져 있거나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시인의 경우도 있다. 이 시집에는 김남주를 통해 처음 이름을 접하게 되는 "르이레에프, 오도예프스키"의 시도 수록되어 있다.
출판에서 시집, 그중에서도 외국 시인의 작품 번역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은 어찌보면 피할 수 없는 대세이긴 하지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이 책을 구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시집은 또한 김남주 시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단초가 될 수 있다. 굳이 더이상 감동이 필요없는 세상에 우리들이 살고 있더라도 여기 하나의 뜨거운 가슴, 진실과 순결로 벅차오르는 감동이 살아있는 책을 피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냉소로 차갑게 식어버린 당신의 눈에서 깊이 박힌 겨울여왕의 차가운 유리조각 하나를 빼내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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