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유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4월
문학평론가 성민엽이 『한글세대와 시인』이란 글에서 한글세대와 일본어 세대를 구분했듯이 우리는 유하로부터 비롯되는 일군의 시인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굳이 그 출발점을 유하로부터 할 필요는 없겠지만 <21세기 전망동인> 등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신세대 시인들은 시적 특성이나 그외 기타 그들의 정신적 풍토를 보았을 때 기존의 시인들과는 많은 차이를 두고 있다. 우선 이들은 파괴된 고향을 살아온 세대이다. 유하의 세대는 5. 16이후의 급속한 경제 성장의 테두리에서 성장하여 도시적인 풍경에 더 익숙한 세대이다. 이런 경제성장의 틀 안에서 기성세대는 기성세대 나름의 도시화와 산업화의 물결을 맞이하여 자신들의 삶의 토대를 옮겨야 했고, 이런 거주지의 잦은 변화는 그들의 자식세대에게 파괴된 고향을 물려주게 된다. 유하를 비롯한 이후 세대에게 고향이라 부를만한 추억의 공간은 상대적으로 빈약하고 협소할 수밖에 없다.
이전 세대의 시인들은 기형적인 고도성장의 이면을 뚫어보는 도시비판적인 혹은 몸은 도시에 있더라도 詩는 농촌서정시를 쓰게 되는 이율배반적인 정서의 이완을 보여주게 된다. 그러나 일찍이 기형도가 간파했듯이 섣부른 자연에 대한 비유보다는 회색 도시의 정서에 더 가깝게 성장했던 유하의 세대는 도시적인 서정을 통해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욕망을 보여준다. 이전의 시인들이 농촌의 정서에 가까웠다면 유하 이후의 시인들은 도시의 정서에 더 가깝게 성장한 세대인 것이다.
이들에게 도시는 회귀하고픈 고향인 동시에 욕망의 배설구이며, 그렇기 때문에 결코 진정한 고향은 아니다. 유하의 시에서 보이는 도시비판적인 요소와 때로 도시적인 혹은 자본주의적인 향락에 깊이 함몰된 모습이 보이는 모순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발생된다. 그러나 유하는 자신의 시가 완전히 출구 없는 비판이나 욕망의 막힌 하수구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종의 안전판을 만들어두었다. 그의 두 번째 시집에서 보이는 그런 안전판은 바로 <하나대>이다.
그는 훼손된 세계에 대한 긍정적인 공간으로 <하나대>를 만듦으로 훼손된 공간에 대한 탄력과 복원력을 제공하려 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박철화는 이 <하나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
즉 시인에게는 두번째가 될 이 시집의 세계가 처음의 그것으로부터 그리 먼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동일한 세계의 구체적인 심화라고 말해야겠지만, 그의 시에는 병렬적으로 보이는 두 갈래의 구분을 가로질러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시적 태도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대와 압구정동 사이의 긴장>
그러나 압구정동과 하나대 사이는 유하식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인사동과 압구정동의 실제 거리만큼이나 떨어져 있다. 다시 말해 압구정동 연작시들과 하나대의 시들은 완전히 별개의 시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른 시적 태도 사이의 간극은 서로 메워지는 것이 불가능해보일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다. 유하에게도, 이 시집을 읽는 나에게도 롯데월드와 압구정동의 인위성(人爲性)은 태어날 때부터 보아온 듯 자연스러운 광경인 대신, 하나대의 자연(自然)스러움은 도리어 인공적인 공간이다.
유하의 희망은 단지 압구정동 위로 바람이 불고, 그 바람을 통해 압구정동이라는 도시와 욕망에도 순환이 가능한 공간을 꿈꿔보는 것에 그친다. 그러나 이미 서정기가 비판하고 있듯이 그에게 있어 이런 ‘바람불기’는 그리 수월해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욕망에 시인 자신이 깊이 침윤당해 있는 것처럼 압구정동은 자본주의의 굳건한 토대 위에 깊숙하게 그 뿌리를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땅 속 깊이 파일을 박은 콘크리트 구조물은 단순히 순환하는 흐름만으로는 근본적으로 환기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비온 뒤 잠시 남산 타워에서 내려다본 서울 하늘과 같다. 유하의 시가 허무한 까닭이다.
그 두개의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기에, 또는 최소한 효과적으로 오버랩시키기에 유하는 이미 압구정동의 문화에 너무나 중독되어 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뿅’가 있는 것이다. 그가 반성적 키치중독자라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모더니스트와 포스트모더니스트?>
위의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다 받아들이는 데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대체로 맞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유하가 두 개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두 개의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유하가 그것을 통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그를 현실주의자의 범주에 넣는 것은 무리가 있다. 압구정동 위에서 순환이 가능한 공간을 꿈꾼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유하에게 그 둘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하나의 시적 태도가 있다면 그것은 압구정동 위에 하나대를 복원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압구정동 위에 순환이 가능한 공간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즉 그는 막연히 하나대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대를 압구정동 위에 복원해냄으로써 막힌 공간, 순환하지 않는 도시 공간에 순환이 가능한, 그래서 인간이 다시 살아 숨쉬고 건강한 생명력을 지닐 수 있는 그런 공간을 하나대라는 도달할 수 없고, 경험한 적 없는 유토피아를 통해 꿈꾸는 것이다.
자연이 ‘비어있음’의 공간이라면, 도시는 하나의 ‘채움’의 자리이다. 인간의 욕망은 허(虛)를 보존하는 쪽보다는 허를 채우는 쪽으로 움직인다. 그 ‘채움’의 욕망때문에 드러나는 결과가 ‘막힘’이다. 차가 막히고 사람이 막히고 하수구가 막힌다. 그 막힘의 결과가 ‘넘침’이다. 인간이 채움의 욕망을 제어하지 않는 이상 대홍수는 계속 일어날 것이다. 넘친다는 것은 지구의 절멸을 의미한다.
- 중략 -
그것에 반해 ‘자연의 공간’ 허의 공간은 막힘이 없는 순환이 가능한 공간을 꿈꾼다. ‘순환성’이야말로 ‘살아있음’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는 차가 막히고 사람이 막힌 공간, 호흡할 수조차 없는 그리고 그것들을 배설할 수도 없이 썩는 냄새가 천하를 진동시키는 세상(압구정동으로 상징되는)에서 순환이 가능한 공간을 꿈꾼다. 그가 역설적인 어법으로 이미 상실된 혹은 상실되는 와중에 있는 하나대의 복원을 꿈꾸지 않고, 압구정동 위에서 순환이 가능한 공간을 꿈꾸는 이유는 그 자신이 이미 자본주의에 익숙한 세대이며, 자본주의가 베푸는 단물의 맛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노자(老子)류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외치지 않는다. 그에게는 도시가 고향이며 그곳에서 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상실과 모성의 이미지로 충만해있는 ‘하나대’를 그리워하고 복원시킬 것을 소망하지만 압구정동을 하나대로 되돌리려는 무의미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 어머니 이제, 가실비 젖은 짚벼늘처럼
온 삭신 흙 속으로 꺼져가려 합니다
꺼져가는 어머니 안간힘으로 일으켜세우기라도 하려는 듯
숲이란 숲 왼갖 새들이 울대가 터져라
어둠이 터져라 일제히 악다구니로 울어쌉니다
귀먹먹한 새 울음에 툭 솔방울 하나 구르다 멈추는 그곳,
깊이깊이 정글어버린 한 마을이 있습니다
<정글어가는 하나대를 바라보며>
꺼져가는 어머니를 위해 새들이 울어대는 그곳에 하나대는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어쩐지 역부족이라는 느낌이다. 그리고 ‘작고 약한 것’들은 죽음조차 보이지 않는다. 인간적인 것은 압구정동에서도 하나대에서 조차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굴뚝새 저 혼자 남아 굴뚝의 텅 빈 숨결처럼
하나대를 스쳐간 자리, 쫓아가보니
살아온 말들이 헛일이었다고
쏴아아아 소나무들의 눈물바람 고인다
<굴뚝새가 사는 마을>
이렇듯 사람이 사람답게 서로 살을 맞대고 부비대며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은 계속해서 훼손당하고 결국 그 공간에 상처를 입히는 인간조차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없는 까닭. 그것은 체제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어째서 그는 자신이 그토록 애타게 노래 부르던 막힘이 없는 공간, 비어있음의 공간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일까. 그는 아무리 노자연(老子然)해봐도 육체와 정신만 늙어갈 뿐 날다람쥐처럼 움직이는 욕망은 늙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압구정동으로 상징되는 현실이 변하지 않으면 그는 어디도 갈 수 없다. 류철균이 짐짓 예리한 포즈로 질문하고 있듯이 “왜 인생을 속속들이 쏟아 부어 정면대결하지 않는가.”라고 묻는 건 잔인하게 보인다. 그 자신을 속속들이 쏟아 부을 곳을 찾아내지 못하는,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이미 스스로를 노자(老者)로 인식하고 있는 시인에게 정면 대결하라고 요구하는 건 무리다. 그에겐 애시당초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걸만한 일이라곤 없었고, 이미 그럴 기력도 없다. 그렇다고 시인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지 않은가 말이다.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이 때의 바람이란 하나대의 바람(wind)일까, 유하의 바람(want)일까.
(* 어느덧 14년 전 이맘 때 대학 신입생이던 92년 첫 학기, 첫 기말 리포트... 이 때만 해도 시인 유하는 우리들에게 대단한 파란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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