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시체 - 세계시인선 8, 스페인·중남미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지음, 정선옥 옮김 / 솔출판사 / 1995년 7월
1936년 스페인 베가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로 한 사내가 끌려왔다. 초췌한 얼굴의 사내 입가엔 피가 맺혀 있었고, 원래는 좋은 옷감으로 만들었을 양복엔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는 한 올리브 나무 밑에 세워졌다. 장교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총을 들어올리고, 일제히 탄알을 재고, 발사했다. 사내는 작은 비명을 지르고 힘없이 쓰러졌다. 그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가 스페인의 대지를 적시며 흘러내렸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피였다.
로르카가 프랑코측 병사들의 총탄에 쓰러진 뒤 한동안 스페인에서 로르카의 이름은 공공연히 불려질 수 없는 이름이었다. 프랑코 정부의 압제에도 불구하고, 그라나다 사람들은 그가 숨진 올리브 나무 주변을 공원으로 만들었다. 그라나다로부터 서쪽으로 14km 가량 떨어진 푸엔테바케로스라는 마을엔 로르카의 생가가 있다고 한다. 스페인의 민주화 이후에 그의 생가는 로르카를 기리는 기념관이 되었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 스페인 그라나다 푸엔테바케로스에서 태어난 시인이자 극작가였다. 농부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로르카는 어머니에게 직접 피아노를 배웠다. 그의 가족은 그라나다로 이주한 뒤 그곳에 있는 예수회 학교를 다녔다. 그는 아버지의 강요로 그라나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그에게 법학은 따분한 학문이었다. 로르카는 법학 공부를 그만두고 문학과 음악, 회화에 몰두했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이 있었던 그는 동료들 사이에서 조숙한 작곡가이자 뛰어난 연주가로 '음악가'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1918년 로르카는 카스티야 지방을 여행하면서 영감을 얻어 이곳에서 받은 인상과 풍경을 산문집으로 펴내 주변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이듬해 로르카는 마드리드 대학에 진학하며 이곳에서 그의 예술에 영감을 주고 받을 동료들을 얻는다. 살바도르 달리, 루이스 부뉘엘, 라파엘 알베르티 등을 비롯해 그와 동세대의 예술가와 작가들을 사기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를 비롯한 저명인사들과도 친교를 나눴다. 그가 마드리드 대학에서 보낸 첫 2년 동안 그는 스페인 문단 전체에 자신의 시를 널리 알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 로르카의 시들은 거의 출판되지 않았다. 그 자신이 마치 중세 방랑시인의 후예인 양 “시는 입으로 읊어야 한다. 책 속의 시는 죽은 것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라나다의 로르카와 웨일즈의 딜런 토마스, 이 두 시인의 공통점은 향토적인 뿌리에 기반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시를 낭송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로르카의 시들은 여러 지역에서 중세 음유시인의 시처럼 낭송되었다. 그가 시를 낭송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겼던 까닭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그것은 아마도 그 자신이 음악에 대해 조예가 깊었고('시'란 문학작품인 동시에 노래이기도 하다), 역시 연극에 대해서도 대단한 열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시뿐만 아니라 그의 첫 희곡 "나비의 장난"을 마드리드의 에슬라바 극장에 올렸다. 그러나 첫 희곡 작품은 첫날 공연 뒤 막을 내리는 대실패를 겪었다.
1922년 로르카는 그라나다에서 열린 민속음악축제(fiesta de cante jondo)에서 스페인의 저명한 작곡가 마누엘 데 파야와 공동으로 작업하면서 새삼스레 자신의 음악적, 시적인 천재성을 실감한 듯 보인다. 이 시기에 그는 스페인의 민속음악과 집시음악의 전통 속에 자신의 시를 새롭게 대입시키게 된다. 이 무렵 발표한 시들이 그의 대표작들이라 할 수 있는 '칸테 혼도의 시 Poem del cante jondo' ,'집시 노래집 Romancero gitano' 등이다. 특히 1928년에 발표한 '집시노래집'에 실린 18편의 시들은 스페인 전통의 시형식인 발라드(Romance)를 새로운 이미지와 전통의 결합으로 그려내고 있다.
“검은 말들/ 검은 편자/ 검은 망토 위에 번들거리는/ 잉크와 밀랍 얼룩/ 두개골이 납으로 되어/ 그들은 울지 않네/ 칠피 가죽으로 된 영혼을 달고/ 그들은 길을 따라 내려가네”
그는 "집시노래집"을 쓰면서 희곡도 집필했다. 1927년엔 살바도르 달리가 무대를 꾸미고 그가 집필한 운문극 "마리아나 피네다 Mariana pineda"를 통해 연극 무대에선 최초의 성공을 거두었다. "집시노래집"은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으나 그 자신은 만족하지 못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시세계 단순한 집시기질과 그에 대한 과장으로 이루어진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 그는 걸작을 만들어냈으나 정작 자신은 고비를 맞이한 것으로 여겼고, 1929년부터 30년까지 미국과 쿠바를 여행하며 보냈다.
어떤 나라의 시인들도 그렇겠지만, 특히 스페인의 시인들은 스페인이란 나라, 지역의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특성을 지닌다. 그들의 시는 불처럼 뜨거우면서도 얼음처럼 차갑고, 때로 하늘의 구름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엔 몸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하게 꿈틀거린다. 영적인 불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육체적인 불을 가장 강렬하게 느끼도록 하는 시인들은 대개 스페인의 시인들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것은 스페인이란 나라의 특수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특히 로르카의 시는 매우 남성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냉정한 느낌과는 다른 남성적인 힘을 보여준다.
나폴레옹은 피레네 산맥 이남 지역은 유럽이 아니라고 말했다. 고야 시대에 있었던 나폴레옹 원정군의 스페인 침공이 그들에게 그런 인상을 주었겠지만, 실제 스페인은 아랍문화와 매우 친숙한 지역이다. 15세기에 있었던 '레콩키스타' 이전까지 스페인에는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공존하고 있었으며 이베리아 반도 남단인 안달루시아, 그라나다 지방에서는 최후까지 무어인들이 그들의 이슬람 왕국을 통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독특한 공존은 레콩키스타 이후에도 스페인을 유럽 속의 독특한 문화적인 섬으로 남겨놓게 된다. 이런 스페인만의 문화는 강력한 가톨릭 신앙과 대토지 소유제 등 경제적, 문화적 전근대성을 유지시켰고, 정교는 종종 분리되지 못했다.
그런 스페인의 전근대성에 균열을 일으킨 것은 좌파 인민전선 정부가 수립되면서였다. 인민전선 정부는 정교를 분리하고, 농지개혁 등의 정책을 내걸고 중산계급과 노동자, 농민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가톨릭 교회와 대지주, 대자본의 지지를 얻은 군부와 왕당파, 우익 진영은 프랑코 휘하의 모로코 주둔군을 선두로 군사반란을 일으킨다. 1936년 2월 19일 스페인 시민전쟁이 발발한다. 이 내전은 단순히 스페인 내부의 전쟁이 아니라 독일,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 파시즘 국가들이 프랑코측을 소련은 인민전선 정부를 지지하며 좌우 양대 진영의 대리전 양상을 띈다. 영국과 프랑스는 내정 불간섭이란 명목으로 인민전선 정부에 대한 무기 수출을 거부하였고, 인민전선 정부는 제대로 무장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프랑코군과 맞서 싸워야 했다. 소련 정부만 스페인에 대해 무기를 수출했고(단, 스탈린은 스페인의 막대한 금괴를 대금으로 챙겼다.), 코민테른의 결의에 따라 국제의용군이 결성되어 전세계의 수많은 무정부주의자, 좌파 청년들이 그들의 이념에 복무하기 위해 조국을 떠나 스페인의 전쟁터로 몰려들었다(일설에는 이때 참전한 일본의 무정부주의자 3명 중 한 명은 조선인이었다고도 한다... 정확치는 않지만).
어찌되었든 로르카는 인민전선과 공화국 정부의 출범을 맞이하며 연극 부문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당시 공화국 정부는 교육 받지 못한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고전 희곡 가운데 명작들을 연극으로 접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당시 학생극단 '바라카' 등이 정부의 보조를 받아 활동했다. 로르카 역시 바라카의 설립자, 지도자, 연출가, 음악가로 활동하며 여러 작품을 무대에 올리며 폭넓은 경험을 쌓았다. 로르카가 인민전선 정부를 적극 지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프랑코를 비롯한 파시스트들의 증오를 사게 된 것도 이때문이었다. 이 때의 경험들을 토대로 그의 민속극 3부작이 쓰여지게 된다. 한편 1935년 로르카는 절친한 친구였던 투우사 메히아스가 쇠뿔에 받혀 죽는 사건을 경험하며 "이그나시오 산체스 메히아스를 애도하며 Llanto por Ignacio Sanchez Mejias"를 썼다. 이 작품은 그의 시는 물론 전세계적으로도 가장 뛰어난 애도시로 평가받는다. 이 시에서는 “오후 다섯시에”(A las cinco de la trade)라는 후렴이 계속하여 반복된다.
“오후 다섯 시에/ 정각 오후 다섯 시에/ 한 소년이 참회자의 흰옷을 샀네/ 오후 다섯 시에/한 바구니의 석회는 이미 준비되었다네/ 오후 다섯 시에/ 나머지는 죽음 그리고 죽음뿐이네/오후 다섯 시에”
1936년 7월 내전이 발발하자 신변의 불안을 느낀 로르카는 마드리드를 떠나 고향 그라나다로 간다. 그러나 늘 그를 둘러싸고 있던 죽음의 징조는 로르까를 비껴가지 않았다. 그라나다에서 지내던 어느날 밤 그는 재판도 받지 않은 채 스페인 극우파들의 손에 의해 총살당한다.
1939년 1월 26일 바르셀로나가 프랑코군에게 점령되자, 영국과 프랑스는 한 달 위인 2월 27일 프랑코 정권을 정식으로 승인한다. 3월 28일 프랑코군이 마드리드에 입성하며 인민전선 정부는 붕괴되고, 스페인은 학살당한 이들의 핏속에 잠긴다. 로르카의 시에서는 유난히 원초적인 욕망과 잔혹함이 부각되곤 한다. 어쩌면 그의 시는 스페인 시민전쟁을 예감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스페인이 배출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한 사람인 로르카는 지금 한 그루의 올리브 나무처럼 바람 속에 서 있다.
"페테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안달루시아 사람이었다. 그에게 접근하는 모든 사람은 누구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첫눈에 보이는 그의 부드러운 몸가짐, 쾌활함, 그을린 살결, 청동의 목소리, 그가 꺼내는 이야기의 순수하면서도 섬세한 유머, 다정한 편지들, 모든 것에 있어서의 다양성, 피아니스트이자 화가의 재주, 시낭송의 천재. 이 모두가 전형적인 안달루시아의 것이자 안달루시아 자체였다."
불문학자 김화영씨의 책 "행복의 충격"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어떤 영혼들은...
1920년 2월 8일
어떤 영혼들은
푸른 별들을 갖고 있다,
시간의 갈피에
끼워 놓은 아침들을,
그리고 꿈과
노스탤지어의 옛 도란거림
이 있는
정결한 구석들을.
또 다른 영혼들은
열정의 환영들
로 괴로워한다. 따뜻하고 - 먹어버린
과일들. 그림자의
흐름과도 같이
멀리서
오는
타 버린 목소리의
메아리. 슬픔이 없는
기억들.
키스의 부스러기들.
내 영혼은
오래 익어 왔다 ; 그건 시든다,
불가사의로 어두운 채.
환각에 침식당한
어린 돌들은
내 생각의
물 위에 떨어진다.
모든 돌은 말한다 :
"신은 멀리 계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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