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무예도보통지
김위현 옮김 / 민족문화사 / 1997년 11월
김위현 선생이 무예도보통지를 우리 말로 옮긴 것이 1984년의 일이고, 이를 내가 구입한 것은 1997년의 일이다. 어렸을 때 친구 집에 놀러가면 그 집의 고등학교 다니는 삼촌들이 보았음직한 무예서들이 한 두 권씩은 종종 발견된다. 예를 들어 당랑권, 이소룡의 절권도, 쌍절곤 류의 책들을 보면, 중국 복색을 한 무도인들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사진과 기법들이 담겨 있다. 어렸을 때 부모 손에 이끌려 태권도장에 가본 경험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 경우엔 유치원도 못 다녔으니까. 태권도장은 꿈도 못 꿔봤다. 다만, 고등학교 다닐 적에 강제로 전교생이 유도를 일주일에 한 시간씩 배워야 했으므로 그 때 처음으로 도복이란 걸 입어본 경험이 있다. 나름대로 재능이 있었는지 졸업할 무렵엔 검은 띠를 매는 1단 단증을 딸 수 있었다. 그때도 이론 수업이란 걸 병행했는데, 역시 어렸을 때 친구집에서 보았던 그런 무예서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유형이었다. "무예도보통지" 역시 기본적인 편제는 이런 무예지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이 책은 정조 시대 만들어진 "무예도보통지(武藝 圖譜 通志)"를 한글로 옮긴 것이다. 대개 우리 고전들이 그러하듯 이 책 역시 아무 의미없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사도세자가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 되면서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애처로운 신세가 된 어린 정조, 그는 왕권을 장악한 뒤에도 계속 권력에 대한 도전에 직면해야 할 것을 알았다. 그는 척족세력을 비롯해, 신권의 도전으로부터 왕권을 강화하기 위헤 군부를 개편하고, 규장각 검서관인 박제가, 이덕무와 정용영의 초관(장교)이었던 백동수 등에게 명하여 이 책을 편찬하게 했다. 흔히 중국 무예를 18기라 하고, 우리 무예는 24반 무예라고 하는데, 고려청자가 그러하듯 우리의 24반 무예 역시 중국식과 일본식 등 동양 3국의 무예를 두루 받아들여 우리 식으로 고친 것이다. 물론, 그 무예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그에 대한 문외한인 나로서는 언감생심 헤아릴 수 없지만 말이다. 그렇더라도 "무예도보통지"에 담긴 정조의 자주정신, 유비무환의 마음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최근 TV에서 방영되는 "불멸의 이순신"의 초반부에서 나름대로 많이 언급되기도 했지만, 임진왜란 당시 조선 정부를 놀라게 한 것은 서양에서 받아들여 일본화시킨 조총의 위력만은 아니었다. 조총이란 병기에 일종의 패닉 상태에 빠지는 등 초기 대응에 서툴긴 했으나 이에 대해서는 같은 화약병기인 총통과 상대적으로 기후의 영향을 적게 받는 편전 등으로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총과 더불어 조선정부를 경악시킨 것은 소위 "왜검"이라고 해서 일본 무사들의 검과 검법이었다(이미 숙종조에 이에 대한 연구는 있었다). "이순신"조차도 병영 내에 일본에서 포로로 잡은 기술자와 조선인 기술자를 통해 왜검을 제조하도록 시켰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순신 자신도 왜검을 몇 자루 가지고 있었다 한다. "무예도보통지"에서는 "이 칼은 매우 강하고 날카로와서 중국 칼도 이것만 못하다"라며 일본검의 우수함을 적고 있다. 단지 칼의 우수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왜검은 토유류, 운광류, 선유류, 유피류의 사류와 교전보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른 검법과 달리 그 검법이 매우 단순하다. 단지 막고 쳐들어 가는 것 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왜검이 일본의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무수한 전투 과정을 통해 비실용적인 것을 제거하고 전투에 걸맞는 동작만 추구한 결과로 보았다. 이렇듯 적국의 무예까지도 받아들여 기록하고, 전수하여 대처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 "무예도보통지"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영,정조에 이르러 간신히 숨을 돌리게 된 조선 왕실은 문치에 찌든 조선을 털어내고 새로운 유신을 준비하였다. 전제왕정 시기의 유신이 성공하지 못한 탓에 어쩌면 훗날 우리들은 "10월 유신"이란 반근대적인 정치체제와 막다른 길에서 맞닥뜨리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으나 서양의 귀족이라 해야 할 조선의 양반 계급이 지닌 절묘한 위치가 이를 뒷받침해줄 부르주아지(시민계급)의 육성을 허용치 않았고, 그들 자신이 문벌과 하층 양반으로 분화되었음에도 문벌과 가문(씨족)으로 연결된 탓에 이를 타도하지도 못했으므로, 결국 정조의 유신은 시작도 해보기 전에 단지 이 한 권의 무예지만 남긴 채 허망하게 문을 닫는다.
좋은 책이나 일반인을 위해 좀 더 역사적인 의미를 부각시키는 해제와 이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이 따라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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