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디트
에릭 홉스봄 지음, 이수영 옮김 / 민음사 / 2004년 11월
본래 에릭 홉스봄의 이 책 "밴디트 - 의적의 역사" 초판본은 지난 1969년에 출간되었고, 이번 판은 개정판으로 2000년에 출간되었다. 국내에도 이전에 구판본이 출간된 바 있는데 한동안 절판되었다. 나는 이 책의 개정판이 출간되기 전에 구판본을 구해 읽고 싶었는데, 구하지 못하다가 이번에 개정판이 출간되어 구입하게 되었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이 책의 개정판이 추진된 이유에 대해 세 가지 요인이 있다고 말한다. 그 첫 번째 이유로 1981년 이후 산적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흥미로운 저작들이 많이 출간되었고, 두 번째로는 세계 곳곳에서 국가 권력과 관리 체계가 급속도로 해체되고 있는 상황이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란다.(오호, 흥미로운 이야기다. 나는 도리어 국가 권력의 관리 체계가 강화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세 번째 이유로는 "흡스봄의 테제"가 오늘날에도 과연 유효한가라고 물었던 비평에 대한 대답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생각같아서는 구판본과 개정판본을 서로 대조해가면서 읽어본다면 홉스봄의 응답이 무엇인지 좀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그 기간동안 홉스봄의 견해가 어떻게 변화, 발전해왔는지 느껴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얼마전 박홍규 선생이 "의적, 정의를 훔치다(돌베게,2005)"를 펴내기도 했지만 산적 혹은 의적에 관해서는 홉스봄의 이 저작은이 있기 전까지 역사학자들이 학문적으로 접근한 사례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홉스봄은 새로운 길을 개척한 셈이다. 홉스봄 자신이 말하고 있는 두 번째 이유는 비록 문화 이데올로기적 차원을 다소 간과하고 있기는 하지만, 정치적 통제 혹은 질서 차원에서 국가 권력이 과거와 같은 통제력을 구사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선 올바른 지적이기도 하다. 오늘날 국가 헤게모니를 능가하는 새로운 차원의 헤게모니 질서가 등장하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첫 번째는 세계 자본일 것이고, 두 번째는 다국적 매스 미디어의 파워이다. 이제 국가권력은 국경을 바탕으로 한 통제력을 과거와 같이 구사할 수 없다. 그리고 그 틈새에서 과거와 형태적으로 흡사한 산적들, 예를 들어 사파티스타나 체첸 반군의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고, 그 이외에도 사이버 공간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산적들의 존재도 간과할 수 없게 되었다. 세 번째 이유에 대해서는 좀더 학문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일 게다.
혹시 이 책을 좀 재미난 무협지 차원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분이 있다면 - 사실 그래서 안 될 까닭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수호지의 양산박 영웅들이나 삼국지의 유비 일당도 따지고 보면 국가 체제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권력을 탈취하고자 했던 지역 토호들, 즉 산적들이었다. 따지고 보면 무협지란 것도 그런 내용 아닌가 - 다소 만류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책은 산적의 일대기를 그린 책이 아니라 산적의 존재를 정치적 프레임 안에서 역사적으로 고찰해보는 목적으로 쓰인 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표지에 등장하고 있는 멕스코의 유명한 산적이자 한 때 사파타의 동지이기도 했던 판초 비야가 등장하고 있다 해서 할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멕시코 산적들이 탄띠를 두르고 거친 평원을 달려가는 광경을 상상하는 것은 금물이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그런 상상을 하며 읽기엔 이 책은 너무 지루하다.
이 책의 재미는 그런 부분보다는 다음과 같은 부분에 있다.
사르데냐 출신 안토니오 그람시가 20세기 초 자기 고향 섬의 상황에 관해 썼듯이, "계급투쟁은 강탈과 협박, 삼림지 방화, 가축상해, 여자와 아이들의 납치, 시청 습격 등과 뒤섞인다." 농촌에서 자본주의가 완전히 성숙하는 시기까지 산적이 살아남게 되면 다른 무엇보다도 돈을 빌려주고 농부들을 더 넓은 시장으로 내몬 이들에 대한 증오가 표출된다. <본문 35쪽>
혹시라도 에릭 홉스봄의 사관에 동의하긴 어려운 역사학자라도 그가 특A급 역사학자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역사를 단순히 실증해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미친 영향을 전일적인 시선으로 조망해낼 수 있는 학문적 깊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산적들, 다른 말로 하자면 게릴라들이 이 시대에도 온존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책의 개정판을 다시 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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