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안토니 비버 지음, 안종설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6월
2년쯤 전에 '리처드 오버리'의 책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지식의 풍경, 2003)"이란 책을 읽고 리뷰를 쓴 적이 있었다. 2003년은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배를 좌우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전한지 만 6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는데,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는 원제목대로 "Russia's War"로 표기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기였을 것이다. 실제 무게 중심이 놓여 있는 부분 자체가 러시아(구 소련)를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안토니 비버'의 이 책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 세계 역사를 바꾼 스탈린그라드 전투 590일의 기록"은 독일을 무게 중심에 놓고 있다. 모두 600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이 기술하고 있는 것은 부제가 잘 설명하고 있듯 '세계 역사를 바꾼 스탈린그라드 전투 590일의 기록'이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과 결과를 모두 보여주는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 아니지만, 책을 읽다보면 저절로 당시 독일과 소련의 사회 분위기까지 미루어 짐작하거나 작가의 직접적인 진술, 사료들을 통해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저자 안토니 비버는 세계전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대격전이자, 한 도시를 가운데 놓고 독일 나치즘과 소련 볼셰비즘 세력 간에 벌어진 총력전을 한 권의 책으로 잘 구성해 놓고 있다. 저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군사적인 맥락에서만 접근하여서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는 통상적인 역사 서술의 기본 틀 속에서 냉전 해체 이후 러시아 문서 보관소를 통해 새롭게 발굴된 사료들과 당시 참전했던 독.소 양군의 병사들이 썼던 개인적인 편지와 일기, 전쟁 일지 등을 두루 섭렵하고 있다. 사실은 바로 그런 점이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여러 미덕들을 구성한다. 자칫, 전쟁에 대해 냉정한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경직되기 쉬운 역사 서술의 난제를, 당시 참전했던 병사들의 솔직한 글과 체험담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증언한다. 그래서 이 책은 600쪽에 달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한 권의 전쟁 소설을 읽는 것처럼 쉽고 재미나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독.소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첫 페이지를 살펴보자.
1941년 6월 21일 토요일, 구름 한 점 없는 완벽한 여름날 아침이 밝았다. 많은 베를린 시민들이 산수시 공원에서 주말을 즐기기 위해 포츠담 행 기차에 올랐고, 반 호수나 니콜라스 호수로 수영을 하러 간 사람들도 많았다. 길거리 카페에서는 얼마 전까지 유행하던 루돌프 헤스의 영국행에 대한 여러 가지 농담이 사라진 반면, 독일의 소련 침공이 임박했단 소문들이 떠돌았다. 전쟁이 더 이상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스탈린이 마지막 순간에 우크라이나를 독일에 넘겨줄 것이라는 쪽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다. <본문 17쪽>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원인을 대략 두 가지 정도(비록 대외적으로는 유대계 자본 혹은 유대인들이 전쟁을 사보타지한 것처럼 이야기하곤 했지만)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는 독일의 군사력과 경제력으로는 유럽의 서부와 동부에 동시에 전선을 형성할 수 없음에도 이중전선을 펼친 것, 다른 하나는 미국의 참전이 예상됨에도 전쟁을 조기 결전으로 이끌지 못한 점 등이 그것이었다. 이는 히틀러만의 생각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측 전쟁수뇌부의 일치된 판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서부 전선의 전격전 승리에 도취되었고, 영국을 섬으로 몰아넣었다는 자만심(혹은 영국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쳐 자신이 생각한 데로 영국과의 협상에 성공하지 못함에 따라) 동부전선에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게 되었다. 그것은 소련에 대한 서방의 일치된 견해(오해)도 크게 한 몫 거들었는데, 이들은 소련의 정치경제구조가 매우 열악하고, 피폐하여 문짝만 걷어차면 썩어빠진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듯 순식간에 붕괴할 것이라 생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시 소련의 상태를 고려해본다면, 비록 대외적으로는 거대한 육군국이긴 했으나 거의 4만여명에 달하는 장교(그냥 산술적으로만 계산해서 장교 1인이 병사100명을 훈련시키고 지휘한다고 생각해보라. 소련군의 전투지휘력은 형편없이 저하된 셈이다)들이 처형되거나 투옥되는 상황에서 소련군의 기본적인 작전 구사 능력이라도 있는지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본격적인 독소전쟁이 벌어지기 얼마전 소련군의 핀란드 침공 당시 소련군이 보여준 형편없는 군사력은 히틀러의 자신감에 불을 붙였다. 실제로 독소전쟁 초반부 소련군은 언급하기 끔찍할 정도의 대패를 거듭해 웬만한 국가의 인구, 사상자는 제외하고도 300만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독일의 포로가 되었다. 독일의 승리는 목전에 있는 듯 했다. 그러나 레닌그라드와 세바스토폴, 그리고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은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게 되고, 소련 공산정권의 심장인 모스크바를 수십 마일 남겨둔 채 동장군과 소련군의 저항에 발목을 잡히고 만다.
사실 전략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 시점에서 전쟁은 이미 독일의 패배로 기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앞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원인을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고스란히 반복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덧붙여 히틀러가 간과한 부분은 소련을 구성하고 있는 절반 이상의 러시아어 사용자들의 민족주의 감정,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스탈린은 연이은 전쟁의 패배에서 얻은 교훈을 통해 자신이 직접 전투 상황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대신, 전쟁에 의미를 부여하는 선전전에 주력한 반면, 히틀러는 점차 전투의 각 요소들을 자신이 직접 챙기려고 나서기 시작했던 것도 패전의 한 요인이다. 실제로 스탈린은 이 전쟁을 슬라브 민족을 말살하려는 게르만 민족의 침략 전쟁으로 승화시켰고(부분적으로는 진실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무능을 감추는 대신 러시아인들의 열렬한 애국심과 민족적 자긍심을 부추기는 데 성공했다.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스탈린그라드를 둘러싼 전투는 점차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의 개인적인 원한, 자존심 대결로 변질되는 듯 보였다.
이 대결에서 먼저 승리한 것은 스탈린이었다. 그는 팽팽하게 당겨진 줄을 교묘하게 당기고 놓음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초반 폴란드 침공 이래 연전연승해왔던 독일군 최정예인 제6군을 스탈린그라드에 묶어놓았고, 결국 이들을 포위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사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에 벌어진 동부전선의 전투들은 거의 언급할 필요도 없을 만큼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이후 동부 전선의 모든 양상을 뒤바꿔놓았다. 그에 비하면 우리가 제2차 세계대전의 판세를 바꾼 전투로 더 익숙하게 기억하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도리어 의미가 작다고 할 수 있다. 저자인 안토니 비버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전체 얼개를 튼튼하게 맞춰놓고, 거기에 세세한 묘사들을 버무려 놓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 전투, 이 전쟁 이후 소련은 미국과 함께 세계 질서를 좌우하는 위치에 올라섰고(개인적으로는 독일의 사회주의 혁명 실패 이후 자동적으로 사멸할 운명을 지닌 소련의 비극적 운명을 연장시키는데 일조했다고 판단한다), 스탈린은 명실공히 세계 공산주의의 지도자로 우뚝서게 된다.
전쟁의 결과 동유럽이 공산화되었으며, 전쟁을 수행하며 더욱 확고한 기반을 다지게 된 짜르 치하로부터 비롯된 소련의 관료제는 더욱 안정적으로 작동하게 된다. 물론, 소련의 붕괴 원인을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에서 찾는 것은 넌센스겠지만, 반세기 동안 세계 인민의 해방자를 자처하던 한 실험국가의 몰락과 붕괴 과정에서 최후의 승자가 러시아의 노동자, 농민들, 그들이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 옮긴이의 문장도 매끄럽고, 이런 류의 책들에서 흔히 보게 되는 일어식 표기나 잘못된 인명 표기들이 거의 없다는 것은 이 책의 장점 가운데 하나다. 다만, 좀 더 전문적인 군사용어들이나 표기의 어려움은 그렇다쳐도 본문 58쪽 두 번째 문단의 표기 "볼프산체"와 같은 - 히틀러가 전쟁기간 동안 애용했던 라스텐부르크의 지휘용 벙커를 말하는 것인데, 이 때 표기는 아예 "늑대굴"(요아힘 C.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에서는 그냥 독일식 지명으로 사용해도 될 것을 구태여 우리 말로 번역해 옮겨 어색하게 만들었는데, 히틀러의 "늑대굴"이란 표현은 오래전부터 익숙하게 쓰여왔기 때문에 굳이 늑대를 의미하는 독일식 발음을 쓸 필요가 없다 )이라고 하거나 '볼프산채'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 오기가 조금 눈에 띄는 것이 옥의 티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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