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찌미술
정미희 / 미진사 / 1989년 7월
오늘날 조각가 "아르노 브레커(Arno Breker), 조셉 토락(Josef Thorak)", 화가 "데프레거(Defregger), 그뤼츠너(Gruetzner)"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분명히 지금으로부터 반세기쯤 전엔 한참 이름을 날리던 이들이 행한 예술 활동에 대해서 어느 미술사가도 주목하여 그들의 저술에 이들의 작업에 대한 비평을 남기는 일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들은 나치의 예술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게 복무한 예술가들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미희 편역의 "나찌미술"은 1989년 7월 초판본이다. 헌책방을 돌다 우연히 구한 책인데, 마침 이 방면으로 관심이 있던 차에 좋은 책을 얻은 셈이다. 이 책의 독일어 원제는 "Kunst im 3.Reich"이므로 직역하자면 "독일 제3제국의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원제명 그대로 이 책은 독일의 미술학자들이 그들의 예술사에 있어 가장 특이하고 비극적인 시대라 할 수 있는 나치 치하의 독일 미술 전반에 걸친 글들을 수록해두고 있다. 앞뒤로 편역자인 정미희의 '서문'과 '나찌시대의 퇴폐미술'이 추가되어 있으며, 게오르그 부쓰만의 '나치조각', 베르트홀트 힌츠의 '독일 파시즘 회화'를 비롯해 모두 10부로 구성되어 독일 제3제국의 미술 전반에 걸친 이해를 돕고 있다.
나치는 19세기 미술적 전통인 회화를 극복하는 장르로서 조각에 주목했다. 그것은 나치가 정치 동원의 대상으로 대중에 주목했던 특성에도 걸맞는 것이었다. 그들은 방법적인 측면에서 열려진 공간에 세워져 대중을 상대로 호소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건축과 조각의 효용성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가의 청사나 당사 그리고 대중집회를 위한 공공장소에 기념비적인 부조, 조각으로 장식했다. 앞서 말한 조각가들은 나치 미술의 총아들이었다. 이 가운데 특히 아르노 브레커는 아카데미즘과 살롱 미술의 센티멘탈리즘에 반기를 들었던 근대의 위대한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과 쌍벽을 이뤘던 아리스티드 마이욜의 제자이기도 했다.
남자 화장실에는 종종 이런 문구가 붙어 있다. "한 발짝만 앞으로!" 이런 표어가 붙어 있는 까닭은 소변으로 인해 화장실을 더럽히지 말자는 뜻을 내포한다. 건축 인테리어적인 측면에서 종종 이런 표어 대신에 좀더 강력하게 한 발짝 앞으로 유도하는 장치가 남성 소변기 앞에 바짝 올라서야 소변을 편하게 볼 수 있도록 턱으로 발판을 만들어두는 방법도 있다.
백화점이나 쇼핑 공간의 동선이 반드시 디스플레이된 상품들 앞을 통과하여야만 의도하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게 설계된 것처럼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걸어다니는 모든 공간은 그에 걸맞은 목표를 가지고 설계되기 마련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공공 문화 시설 가운데 상당수는 그것들이 처음 만들어지던 시대에 걸맞는 의도를 갖는다. 예를 들어 세종문화회관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이 공공문화시설의 좌석수는 유신정권의 거수기였던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의원수와 동수로 설계되었다. 일설에는 이곳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개최하려고 했었다는 것이다.
또, 예술의 전당에서 소위 대중문화공연이 쉽게 허용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공공문화공간은 대중이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위치에 자리하고 있으며, 외부에서 바라볼 때 내부의 건물들이 쉽게 드러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다시 말해 예술의 전당은 소위 고급예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삶을 누리는 이들에게만 허용된다는 것을 암암리에 내포한다. 굳이 나치미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런 사례들을 드는 까닭. 그것은 나치미술을 포함해 우리가 순수예술로 생각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실제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경우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은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 - "우리 고유의", "민족적인" - 를 선전하는 예술작품들을 위해 해마다 "대독일미술전(GDK)"을 개최했다. 제1회 대독일미술전이 개최되던 해에 동시에 개최된 또 하나의 전시회는 그들이 소멸시키고자 했던 예술작품들을 한데 모은 것이었다. 이른바 "퇴폐미술전"이 그것이었다. 관람객들은 "우리 고유의 민족적인" 전시와 더불어 나치가 '적의 모습' 이라고 규정했던 현대 미술을 함께 관람하며 이 둘을 비교하도록 했다.
이 책을 통해 나치 독일이 추구하고자 했던 진정한 독일 예술의 내용을 살펴보노라면 5공화국 집권 초반부에 있었던 "국풍(國風)80"의 이데올로기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겉으로는 하나의 결속된 공동체를 지향하는 국민의 염원을 담은 듯 보이나 그 내용은 그 어떤 단절도 치유할 수 없었다는 점에선 더더욱 그렇다. 나치와 5공은 도리어 대중의 모든 자유를 박탈하고, 단절시켰던 것이다. 독일 제3제국의 회화들은 유달리 농민화가 많았다(당시 독일 인구 분포상 농부는 10%대로 노동자 46%에 비하면 적은 수였다). 이는 근대화와 산업화가 가져온 전통사회와의 단절에 대해 대중이 느끼는 박탈감을 나치를 비롯한 당대의 정치세력들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 독일의 사회학자 F.퇴니스같은 이가 주장했던 “공동사회-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 전통, 관습, 종교에 의해 지배되며, 정서적 일체감을 이룬 사회)”가 산업화 / 도시화로 인해 합리적·계약적 성질의, 본질적으로는 사람들이 항상 분리되어 있는“이익사회-게젤샤프트(Gesellschaft)”로 변화해간다고 주장했다. F.퇴니스, E. 뒤르켐 등은 산업사회의 도시화(대중사회)된 대중문화, 대중매체가 개인을 원자화하고, 소외(고립 / 분산)시킨다고 생각해 대중사회를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당시 사회학적 관점에서의 대중사회에 대한 인식이 반자본주의적 낭만주의에 기반하고 있듯 이 무렵 출현한 파시즘 이데올로기는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이면서 대외적으로는 반자본주의적 낭만주의 혹은 복고주의적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이에 대해 순전히 개인적인 관측임을 전제하고 말해보자면...
정치적인 관점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으나 최대한 문화적으로 인식했을 때 파시즘은 산업화, 도시화에 의한 근대화 과정에서 공동사회의 해체에 따른 대중의 불안감, 물신화된 자본주의에 대한 박탈감, 농촌의 가부장적 남성 중심성에 대한 여성해방진영의 도전, 각성한 노동자들의 저항 등 급격한 사회 변화에 위기 의식을 느낀 지배계급이 보수화된 대중을 동원해 일으킨 반문화 쿠데타의 성격을 띄고 있다.
예를 들어 "나찌미술"의 여러 지향들 가운데 하나인 '나찌회화에 표현된 여인상'을 분석해보면, 히틀러의 비서이자 정권 말기에 가면서 제2인자로 급부상했던 마르틴 보어만은 "품위있고 강인하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남자들은 .... 번식을 강화해야만 한다"면서 일부일처제를 폐기하고, 다른 여인들을 허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들은 번식의 대상으로 민족을 증식시키는 대상으로서만 가치가 있었으며, 여성운동은 결핵균과 같은 존재로 단정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나치 독일의 회화 가운데 여성을 소재로 삼은 대부분의 누드화에서는 에로틱한 측면이 강조되었고, 실질적인 목적은 춘화에 가까왔다고 할 수 있다.
이와 흡사한 측면에서 나치는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이중성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사회주의의 상징인 망치와 낫을 과감하게 도입하여 '자신의 사슬을 분쇄하는 노동자'라는 구호를 사용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나치의 작센주 대표 무취만은 경영자들의 공식 모임에서 "여러분들이 말씀하신 반자본주의적인 사회주의 노동운동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공식적인 포스터에 나오는 구호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아시다시피 '자본주의와 함께 유태인을 타도하자!'라는 구호가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민족' 또는 '민족'이라고 하는 하나의 기치 아래 우리가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유쾌한 사회주의 노동자들의 구호를 그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사용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들에게서 동류의 감정을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했다.
나치 미술이 나치 이데올로기의 선전 수단이었다는 점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도 단지 선전이 아니라 기만책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예술을 논할 때 우리는 종종 "순수냐 참여냐"를 놓고 논쟁을 벌이곤 한다. 순수와 참여를 가르는 가장 큰 기준은 물론 예술의 자율성과 공리성 사이에 예술이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예술의 자율성과 공리성만을 놓고 순수와 참여를 구분할 때, 우리는 문제의 중요한 본질 가운데 하나를 놓치게 된다.
우선 순수 예술에도 "예술을 위한 예술"로서 절대적인 자율성의 입장에서 효용성으로서의 공리성을 배척하는 입장이 있고, 순수예술을 표방하기는 하나 기존의 질서나 체제에 대한 혐오를 담아 이에 대해 증오, 멸시, 저항을 숨기지 않는 경우(다다이스트, 나치독일 치하의 해외망명그룹)가 있다. 마찬가지로 참여 예술에도 보수와 진보의 구분이 있어야 한다. 먼저 기존 사회질서나 체제의 이상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는 보수적 참여파가 있고, 참여 예술에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지금껏 스스로를 순수라고 주장해온 예술가 집단들은 실제로는 앞서 말한 순수예술이 아니라 참여예술의 보수 진영에 속한 이들이 스스로를 순수예술로 가장해 진보적 참여예술가들을 윽박질러 왔음을 알 수 있다.
지난 89년과 오늘의 관점은 다소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이 지닌 재미와 의미는 별로 줄어든 것 같지 않다. 당시 나치미술을 주도했던 예술가들은 오늘날 더이상 호명되지 않는 존재들이나 불행히도 예술을 그들의 정치적 의도에 맞춰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세력들, 그것이 반드시 정치적인 집단이든 아니면 권력과 자본이라는 신성(神性)의 지위까지 올라버린 존재인지는 모르나 그 힘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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