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속의 거장
조희창 지음 / 황금가지 / 1998년 8월
어떤 남성들의 얼굴에선 여성스러운 면들이 배어 나온다. 이 책의 저자 조희창 선생에게서도 그런 이미지를 받을 수 있었다. 쌍꺼풀진 눈에 긴 인중, 도톰한 입술을 보고 있노라면 이 사람의 글에서도 그런 섬세함이 묻어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책 이야기를 하기 전, 저자의 인상에 대해 이야기 하는 까닭은 이 분과 한 두 차례 이 메일을 주고 받은 경험 때문이다. 일종의 예술가론을 다루는 개인 홈페이지를 가지고 있는 탓에(이런 홈페이지를 갖게 된 가장 중요한 까닭은 이 방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보자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이 책을 통해 많은 사실들을 새롭게 알게 되기도 하고,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만들어 논 관계망에 접속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치 SF적인 작품들 속에 나오는 텔레파시 혹은 싱크로나이제이션(synchronization)하는 것처럼 우리는 누군가가 펼쳐 논 의식의 한 망(網)에 우연치 않게 접속하게 된다. 이 분과 몇 차례 연락을 주고 받다가 한 번 놀러오라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게으른 소치로 지금까지 한 번도 찾아가 만나지 못했다.
사실 클래식 음악의 긴 역사에 걸맞게 이 방면에 대한 애호가들의 역사도 상당히 길다. 그런 관계로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최근 등장한 대중음악에 대한 접근방식과 달리 이전의 애호가들이 만들어 논 하나의 틀(고정관념)을 가지고 미리부터 엄숙하게 접근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는 경우 또한 적지 않다. 그렇다고 이 방법이 지나치게 고답적이므로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또한 클래식 음악, 이른바 고전음악의 세계이기도 하다. 앞서간 이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방법 혹은 앞서간 이들의 발자취가 켜켜이 쌓여 고전음악에 있어서도 문학작품이나 인문학의 세계에서 그러하듯 고전이란 것이 생긴다. 그런 점에서 조희창의 책 "전설 속의 거장 - 20세기를 매혹시킨 클래식의 천재들"은 그런 고전 세계의 엄숙함과 또 이제 막 그 세계에 입문하는 이들의 호기심 사이에 자리매김해도 좋은 가이드북이다.
종종 어려운 책을 만나게 될 때, 혹은 해석하기 어려운 텍스트를 앞에 두고 있을 때, 나는 버릇처럼 셔츠의 앞 단추를 하나 풀고, 소매의 단추들을 풀어 팔뚝 위로 슬며시 접어올리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는 팔을 고개 뒤로 보내 깍지를 끼고, 의자를 최대한 뒤로 젖힌 뒤 저자에게 말을 걸어보거나 아니면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물끄러미 책 속의 사람을 응시한다. 당신은 왜 거기에 있고, 나는 이곳에 있는가?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당신은 어느 시대에 태어났는지, 그 시대는 역사 속에서 과연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 당시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음식을 먹었고, 또 누구의 책이 베스트셀러였을지를 생각해본다. 가령, 푸르트벵글러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부유하고, 교육받은 독일 지식인 계급의 자식으로 태어나, 풍부한 인문학적 교양을 쌓았던 그가 훗날 어떻게 나치의 망령을 강하게 뿌리치지 못했는지를 상상해보게 되고, 가난한 피지배계급의 자식으로 태어난 아르투르 토스카니니가 어떻게 공부했으며, 그 불같은 성미는 타고난 것일까? 아니면 저 아래로부터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갈고 닦은 것일까를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왜 뭇소리니로부터 파시스트 찬가를 지휘하라는 강한 요구를 웃기는 소리라고 일축하고 망명길에 올랐는지를...
20세기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클래식의 전성 시대이자 황혼의 시대이기도 했다. 클래식을 서구의 고전 음악을 가리키는 말로 국한시킬 때, 클래식 음악은 20세기에 가장 많은 환호와 갈채를 받았고, 역사상 가장 많은 지역에서 연주되었으며, 가장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시대이기도 했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을 한 번 살펴보자. 우리는 종종 설 명절에 외국인들을 데려다 우리의 대중가요나 민요를 부르게 하고 상을 주는 이색적인 가요제를 보곤 한다. 물론, 걔중에는 우리나라 사람 못지않게 훌륭한 발음과 발성을 보여주는 이도 있지만 어딘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 성악가들 가운데는 이탈리아 정통 벨칸토 창법을 이탈리아 성악가들보다 더 잘 구사하는 이가 있고, 세계적인 오페라에서 당당하게 주역을 맡는다. 반 세기전만 하더라도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클래식 음악의 세계화란 점만 놓고 보자면 20세기는 커다란 공헌(?)을 했고, 지금까지도 EMI레이블로 출시된 음반 가운데 국내에서 가장 잘 팔리는 마리아 칼라스는 1977년 9월 16일 사망했지만 그로부터 무려 30년이 흐르고 있는 현재에도 여전히 곳곳에서 노래를 한다. 그것이 가능하게 만들어진 것이 또한 20세기의 산물이다.
우리는 이 기술력을 바탕으로 평생 음반녹음이라면 치를 떨었던 세르쥬 첼리비다케의 음반 세트를 그의 사후에 컬렉션할 수 있다. 만약 클래식 음악이 인문학적 교양의 수준에서 고전이라면 우리 사회에서(아니 전세계적으로 클래식 음반 매출만 놓고 보자면 심각한 불황이라고 한다) 클래식 음악이 푸대접 받는다고 해서 특별히 가슴 아파 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요즘의 세태로 보면 클래식 음악뿐만 아니라 고전, 인문학, 교양이라고 부를 만한 대개의 것들이 처한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특별히 이런 상황에 대해 가슴아프진 않다. 그것 역시 시대의 대세라면 가슴 아파한다고 해서 달라지진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다 울컥하는 마음이 든다. 하이페츠의 정교하되 쌀쌀맞은 연주에 비해, 울고 싶을 때 울게 만다는 그의 주정적 해석이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다. 또 샹송 프랑소와의 쇼팽을 듣는 기쁨을, 미켈란젤리의 빙판 위를 미끄러지는 듯한 터치를, 무더운 한밤 중 갑자기 쏟아져내리는 소나기같은 자클린 뒤프레의 보잉을 포기하는 건 힘이 든다.
슬프게도 이들은 이미 전설 속의 거장들이다. 그들이 20세기를 매혹시켰는지, 정말 천재인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흔적은 마치 윤오영 선생의 "방망이 깍던 노인"을 읽으며 느끼던 감동을 반복시켜준다. 누군가 블루스 연주자들은 자신들이 연주하는 블루스 못지않게 슬픈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왜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들 클래식 연주자들은 역시 그네들이 연주하는 클래식 음악의 그 품성에 걸맞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 물론 그것을 어떻게 느끼는가는 자유이다. 그렇다면 다가오는 봄에 이무지치의 "사계"만 골라 들어보고 말 것이 아니라 이 책의 인물들을 길잡이 삼아 천천히 클래식음악의 뒤뜰을 소요해보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 되리라. 틀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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