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면의 침묵 -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찍은 시대의 초상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지음, 김화영 옮김 / 열화당 / 2006년 9월
내가 처음 카메라를 온전한 내 소유로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도 4년쯤 흐른 뒤의 일이었다. 편집자는 사진과 디자인에 대한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핑계였지만 대학 다닐 때 사진학과 친구들이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캠퍼스 이곳저곳을 촬영하고, 가끔 지하 복도에서 자기들끼리 벗겨놓고 누드 사진을 찍는 걸 바라보면서 언젠가 나도 저와 똑같은 기종의 카메라를 장만해서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에 유행하던 카메라는 Canon EOS-5. 손에 딱 잡히는 그립감에 버튼을 누르면 상단부에서 내장된 카메라 플래시가 돌출하는 스타일이었다. 꽤 오랫동안 내 손아귀에서 거의 천여 통에 가까운 사진을 남겨주었다. 그리고 작년 이맘 쯤 내 손을 떠나 헐값에 카메라 상점으로 넘겼다. 어쩐지 다시는 필름 사진 작업을 하지 않을 것 같다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이유에서였다.
카메라를 온전한 내 소유로 가지기 위해 나는 나 자신을 설득해야만 했다. 아직 사는 것이 어렵던 시절이었다. 연애는 깨졌고, 새로 시작한 연애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해 삐걱대다 못해 결국 이별을 고했다. 사는 건 여전히 재미없고, 지루하다. 심드렁해진 날 달래기 위해 나는 정붙일 만한 장난감이 필요했다. 하지만 연립 원룸에 세 들어 사는 가난한 편집자에게 카메라는 여전히 고가의 물건이었다. 너무나 갖고 싶었지만 그 카메라가 필요한 이유를 나에게 납득시키는 것이 어려웠다. 그 때 핑계 김에 둘러댔던 이유가 편집자고, 취재 나갈 때마다 일일이 사진 기자를 대동하게 되면 비용도 늘어나고 하니 카메라는 내 돈으로 사고, 그에 따른 필름이나 현상, 인화 비용은 직장에서 대는 것으로 하여 꿈에 그리던 필름 카메라 캐논 EOS-5를 장만했다.
처음 카메라를 장만한 뒤, 가장 먼저 촬영한 사진은 종로서적 앞의 장신구 리어커 앞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는 어느 아가씨의 옆모습을 촬영한 흑백사진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현상점에 맡긴 뒤 떨리는 마음으로 찾아온 첫 사진을 보며 나는 깜짝 놀랐다. 놀랄 만큼 선명하게 촬영된 사진들을 보면서 뭔가 내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다는 창조의 희열(喜悅)을 느꼈다. 그 뒤 여러 가지 필름들을 실험하면서 내 나름의 취향에 맞는 보조 재료들을 찾느라 노력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물론 내가 촬영한 사진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것이었다. 나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하고 싶었고, 시위가 있는 날에도 카메라를 들고 현장으로 달려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직업적으로 나는 포트레이트(portrait) 사진을 주로 촬영해야 했다. 그간 내 카메라에 담긴 유명무명의 인사들도 숱하게 담을 수 있었다. 필름 값은 책임지지 않아도 되었으니 그것들은 온전히 나의 자산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사진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다. 내가 촬영했으니 내 것이오, 세상에 한 장밖에 없는 사진이니 창조한 것은 맞지만 과연 이 작품들이 남과 다른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은 세상의 모든 사진쟁이들이 태초부터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카메라를 손에 쥐고 작업을 하는 동안 세상도 많이 변해서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에서 대세는 디지털 카메라로 넘어갔고, 프로를 능가하는 질감과 구도의 사진을 촬영해내는 아마추어 사진 동호회와 동호회원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인사동 네거리에서 뒤뚱뒤뚱 걷던 아기가 넘어지면 아이 엄마보다 먼저 여기저기서 몰려든 카메라맨들의 셔터 소리가 울려 퍼진다는 우스개도 있다. 사람들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게 되면서 종종 그들에게 이런 표정을, 저런 몸짓을 보여 달라고 요구해야 할 때가 있다. 어차피 잡지에서 필요로 하는 사진을 촬영하는 것이란 이유로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볼 생각 같은 건 별로 해본 적이 없었다. 절반쯤은 직업적으로 사진을 하고, 또 어쩌다보니 사진전을 기획하기도 하고, 직접 사진해설 글을 쓸 기회도 얻곤 했지만 내 스스로 돌이켜보건대 나는 딱 절반만 사진을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업이라 부를 수 없는 민망한 촬영에 나서면서 앞서의 의문, 태초에 사진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시작된 질문, 같은 장소에서 같은 구도로 다른 사람이 촬영한 사진과 내 사진은 과연 다른 사진인가? 유일무이한 작품이라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사진에 대한 이론서들을 읽고, 유명 사진가들의 작품들을 찾아보면서 만난 사람이 앙리 카르티에-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이었다. 그의 생애사적인 역사나 작품 세계에 대해 이 자리에서 새롭게 나열하는 것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할 게다. 만화가는 자신의 선(線)과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평생을 노력한다. 서예가에겐 필법(筆法)이 그러하고, 작가에게는 문체(文體)가 그의 작품을 대변하는 지문(指紋)이 된다. 다른 말로 그것을 스타일(Style)이라 부른다. 스타일이란 본래 고대 수메르인들이 점토판이나 밀랍을 칠한 판에 꾹꾹 눌러 그들만의 쐐기(설형)문자를 새기던 뾰족한 필기도구인 철필(鐵筆)을 라틴어로 stilus로 부른데서 유래되었다. 인류가 사라지면 인류 최대의 발명품이라 주장하는 언어와 인쇄된 책들은 불과 몇 백 년이 못 되어 함께 사라질 운명이라고 하는데 고대 수메르인들이 스타일러스로 점토판에 새긴 문자판은 BC 3000년부터 현대까지 이어진다.
극소수의 예술가들만이 자신의 스타일을 가질 수 있으며,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그런 극소수의 인물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특히 『내면의 침묵 :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찍은 시대의 초상』은 매우 뛰어난 작품집 중 하나로 내가 소유하고 있는 국내외의 여러 사진집들 가운데서도 단연 으뜸으로 꼽을 만하다. 개인적으론 유진 스미드의 풍부한 콘트라스트와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는 동적인 구도의 사진들을 가장 좋아하는 편이다. 그에 비해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작품들은 움직임을 포착한 사진조차 정적(靜寂)에 휩싸인 것처럼 멈춰있다. 그의 이런 작품세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진들이 그가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초상사진(portrait)들에 담겨 있다. 이 책은 그 중에서도 엄선된 작품들만을 모아놓고 있는데,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사뮤엘 베케트를 비롯해서 피에르 보나르에 이르는 모든 인물들이 문학과 예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인물들이다. 이들의 내면이 담긴 사진 작품들을 보노라면 그들의 작품과 생애가 머릿속으로 그려지면서 사진에 담긴 그들의 외면과 내면이 짜깁기되면서 인간과 영혼이라는 무한한 심연(深淵)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책 속에 담긴 인물들이 모두 유명 인사들은 아니며, 때때로 사진의 대가가 남긴 작품 속 인물들의 초상사진에 핀트가 엇나가있음을 발견할 수도 있다. 내가 처음 촬영한 사진이 나에게 주었던 놀라움 중 하나는 내가 이렇게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다니 하는 것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객관적으로 촬영이 잘 된 사진이었다. 노출이나 심도, 초점 무엇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잘 찍힌 사진이었다. 그에 비해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작품들 중에는 흔히 초점이 맞지 않아 약간씩 날린 사진이라고 말하는 그런 류의 사진들도 있다. 과연 이 거장(巨匠)이 실수를 한 것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사진이 태초에 우리에게 던진 질문들과도 연관되는 것일 게다. 과연 사진은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어째서 비문명권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사라지거나 포획된다고 믿었던 것일까. 최소한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카메라에 사로잡힌 그들의 영혼(사진)은 최소한 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이 책은 사진집이라서 보는 것보다 읽는 것을 더 선호하는 이들에겐 고가의 읽을 것 없는 책에 불과할 수도 있다. 어떤 이들에겐 심연(深淵)도 지구라는 행성의 작은 연못에 불과하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우주인 인간의 영혼이 담긴 초상 사진을 넋 놓고 바라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놓치는 것은 아닐까 한다.
* 이 책은 독일 괴팅겐에서 인쇄하고 제본한 것이다. 세계 몇 대 출판 강국 중 하나로 손꼽히는 우리나라지만 그동안 보아오던 국내 사진 인쇄물들과 현격한 차이가 느껴질 만큼 뛰어난 인쇄 솜씨와 지질(紙質) 덕분에 원판 사진을 보는 것 못지않은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만약 재정적 능력이 있다면 책을 한 권 더 구입해서 잘 쪼갠 뒤에 한 장 한 장 액자를 만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속물스러운 충동 한 가지는 나도 라이카(leica)를 갖고 싶다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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