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한이라는 섬에 갇힌 '난민'들
론리플래닛(Lonely Planet)이란 책은 해외여행 천만 시대를 넘어선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유명한 전세계를 상대로 한 여행가이드 책이다. 상당한 가격이긴 하지만 가장 정확하고, 유용한 정보들로 가득해서 그 지역을 여행하고 싶은 이들에겐 최고의 안내서 역할을 한다. 듣기로는 1991년 걸프전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상륙한 미군 병사들의 손에도 작전지도 대신 이 책이 들려 있었다는 말이 있다. 전세계 17개 언어, 700여 종이 발간되고 있는 론리플래닛 중에는 영문으로 발간된 한국편과 서울편이 있는데, 서울편은 6판까지 나왔고, 서울편은 4판까지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웬 “론리플래닛”인가, 이유경의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을 읽으며 갑자기 어릴 적 내 꿈이 떠올라 씁쓸해진 때문이다.
어릴 적 내 꿈은 부산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그렇다고 내가 부산 출신이란 말은 아니다), 서울역에서 우동 한 그릇을 사먹은 뒤 밤새 신의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 등을 거쳐 모스크바에 가고, 그곳에서 다시 바르샤바, 베를린, 파리에서 런던에 이르는 시베리아횡단 여행을 하는 것이었다. 사실 내가 이런 꿈을 꾸게 된 것은 식민지시절 조선반도 출신의 한 유학생이 실제로 그 같은 경로를 밟아 독일까지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언제인가부터 우리의 상상력은 반도, 그것도 휴전선으로 남북이 갈린 뒤부터는 남한이라는 섬에 갇히게 되었다. 이명세 감독의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같은데 한국은 섬이기 때문에 범죄자는 밀항을 하지 않고는 어디선가는 잡히게 되어있다는 대사를 봤던 것 같다.
이유경은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남한 섬’에서는 알려주는 이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그 현장에 가서 “직접 보고, 듣고 그리고 내 손으로 직접 쓰고 싶었다. 나는 생각했다. ‘나가자…나간다…나가리라…꼭 나가리라.’”는 결심 끝에 30년간 뿌리 내려온 한국 사회를 떠나 해외로 나갔다. 사실 몇 해 전엔가는 나도 그와 흡사한 유혹에 시달린 바 있다. 잠깐이긴 했지만 인도네시아 아체 현장을 취재했던 프리랜서 기자가 실종되었다고 ‘9시 뉴스’에서 방송된 적이 있는데, 비록 나중에 오보로 밝혀지긴 했지만 실종되었다는 그 친구가 바로 내 친구였다. 그 녀석 역시 이 책의 저자 이유경과 흡사하게 들뜬 어조로 ‘간섭하지 않는 천사의 도시, 방콕’을 찬미하면서, 내게도 방콕 행을 권유했었다.
구태여 한국의 비좁은 거리와 ‘빨리빨리’의 살인적인 노동 강도 속에서 헤맬 필요 없이 가끔 가다 날리는 한 편의 기사로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유혹은 듣기에도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아마 내가 결혼한 처지만 아니었더라도 ‘바람구두’ 질끈 동여매고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방랑자의 삶을 선택했을지 모른다. 내게는 방랑의 욕망 못지않게 강인한 착근(着根)의 갈망이 있다. 어딘가에 뿌리내리고 싶다는 갈망과 떠돌이 삶에 대한 욕망은 언제나 나를 작두 위의 무당처럼 위협하며 위태로운 균형을 이룬다. 어떤 점에서든 나는 이미 남한이라는 섬에 갇힌 '난민'을 자처하고 있다.
아시아의 낯선 희망이 지닌 미덕과 한계
저자 이유경은 그 같은 위태로운 균형을 어떻게 깨고 나갈 수 있었을까. 사실 이 책을 처음 손에 잡았던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지만 정작 책을 읽는 동안 들었던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 - 끊이지 않는 분쟁, 그 현장을 가다』가 지닌 미덕도 어쩌면 거기에 있을지 모르겠다. 끊이지 않는 분쟁 현장을 직접 발로 뛰고, 사람들과 부대낀 결과물을 엮어놓은 책이기 때문에 이 책에 대해 처음 받는 인상은 아마도 뭔가 국제정치의 비정한 역사를 알아야만 할 듯 하고, 어딘가에서 흘러내리는 끈적끈적한 피비린내가 나지 않을까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런 부분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책을 읽는 내내 들었던 느낌은 마치 젊고 발랄한 여대생이 신나게 세계여행을 다니다가 자기도 모르게 현지 사람들의 그늘을 알게 되고, 그들을 이해하게 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들에 대해 공부하고, 그 경험을 적어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올 한 해 동안 우리는 사회과부도가 아닌 언론을 통해 최소한 몇 개국의 위치는 새롭게 알게 되었다. 우선 아프가니스탄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알게 되었을 것이고, '버마'와 '미얀마'가 다른 나라가 아닌 같은 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소말리아가 어디에 붙은 나라인지도 알게 되었다. 아시아니 한류니 하는 말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한반도와 휴전선에 갇힌 작은 섬이 아니라 세계와 연결된 중요한 나라 중 하나가 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조금 실감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인질 사태가 일어나고서야 버마민주화시위가 있고서야 비로소 이들 나라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무지하고, 관심이 없는지 알게 되었다. 이들 나라에 대해 알고 싶어서 몇 권의 책을 찾아 읽었으나 국내 저자들의 책은 거의 구할 수 없었고, 그나마 이 나라들이 현재 처해있는 상황들에 대해 나름 만족할 수 있을 만한 책은 더더군다나 구하기 어려웠다.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 - 끊이지 않는 분쟁, 그 현장을 가다』는 타이와 버마, 인디아, 실론, 네팔과 카슈미르 지역을 중심으로 직접 그곳에서 생활하며 경험하고 느낀 이야기들을 적어놓고 있는 책이다. 그러다보니 교과서나 론리플래닛처럼 각장별로 역사와 문화, 경제, 사회구조 등을 차분히 풀어놓는 내용은 아니다. 어느 장의 어느 곳을 펼쳐야 현지에 갔을 때 어떤 숙소를 구하고, 어느 집을 가야 맛있는 현지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저자가 분쟁의 원인으로 지목하고는 있지만 정작 자신이 “첫째, 자원이나 전략적 요충지 같은 ‘먹잇감’을 두고 여러 제국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경우, 둘째, 그 옛날 식민주의자들이 책상머리에 둘러앉아 지도 위에다 멋대로 국경선을 그러놓고 내빼는 바람에 인종과 종교 문화권이 뒤죽박죽 얽혀 충돌하는 경우, 셋째, 이 모든 토대들이 뒤섞인 바닥에 다양한 국가와 인종과 종교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키면서 역사와 정치가 비틀어질 대로 비틀어진 뒤 끝에 나타는 경우”를 조목조목 따지고 인과관계를 상세한 사회경제지표를 들먹이며 설명해주는 책도 아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과연 함께 살아간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 책이 지닌 진짜 미덕은 힘센 놈들의 기사를 받아 우리말로 옮겨주면서 자신도 모르게 저들의 관점까지 우리에게 주입시키는 혹은 정치적 객관과 중립을 가장하면서 실제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모호하게 뒤섞어 버리는 주류 언론의 관점을 통쾌하게 해체하는 데 있다. <랑군, 지금 ‘쌀’을 찾고 있다> 편에서 저자는 “돌 맞을 각오로 입을 열자면, 나는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그리고 전 세계가 찬탄해 마지않는 아웅산 수치의 비폭력 평화운동노선의 정체를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다. 무장투쟁 절대론자는 ‘절대’ 아닌데, 그렇다고 비폭력 운동이 무조건 옳다거나 절대 선이라거나 열매를 보아 온 운동이라고도 생각지 않는다.”거나 “미국이 이라크의 사담을 무너뜨렸듯이 버마 정권도(무력으로) 무너뜨렸으면 좋겠다”는 국경 지대의 거물급 지휘관의 발언, “미국은 물적으로 도덕적으로 지원하고 힘을 보태주는 우군”이라는 한 게릴라의 사견을 직접 들을 수 있다는데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여러 가지 점에서 재미있다. 때때로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기 어려운 순간들도 있고, 이보다는 좀더 깊숙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우리의 이웃이지만 정작 우리들은 잘 알지 못하는 아시아, 국내에 이미 100만의 이주노동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 보다는 이방인 미녀들의 수다에만 넋이 빠져있는 우리들을 좀더 내밀한 이웃들과의 대화 속에 빠져들 수 있도록 부추기는 책이기 때문이다. 앞서 동아시아의 역사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 태부족이란 말을 했지만 찾아보면 이들에 대해 읽을 만한 책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들이 과연 이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그런데 지도 한 장 정도는 넣어주는 편집부의 센스가 다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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