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최전선
김호기 외 52인 지음 / 한길사 / 2002년 5월
만약 어느 잡지에서 이런 류의 책을 서평하려고 한다면 어떤 서평자를 선정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까. 모르긴 몰라도 잡지쟁이들은 무척이나 곤욕스러울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필자는 52인이나 되고, 그 분야 역시 문화, 예술, 기술, 물리학, 생명, 철학과 사상, 국내외정치적 현안들에 이르는 광범위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대학 수가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이쯤되면 나름대로 연구 성과도 있고, 글께나 쓰시는 분들은 두루 망라된 셈이다.(물론 이 책에 저자로 포함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분들이 명망이 없거나 실력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기획서들의 필자들은 대개 소장 학자층부터 장년층에 이르는 분들이 대다수를 이루기 마련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어렸을 때 삼촌이 취업준비용으로 읽는 - 아마도 취업시험 과목 중에 일반상식을 묻는 시험이 있었던 모양 - "일반상식"이란 책자가 있었는데, 매년 새로운 정보를 담아 개정판을 내곤 했다. 예를 들어 "트루만 독트린"이나 "브레튼 우즈 체제" 같은 표제어를 놓고 거기에 맞춰 간략하게 개설해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정치, 경제, 사회 등등 다양한 방면의 시사 상식들이 적혀 있었는데, 그것들을 꽤나 재미있게 읽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지식의 최전선 - 세상을 변화시키는 더 새롭고 더 창조적인 발상들" 이란 책은 이런 "시사상식", "일반상식"이란 책의 심화판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종종 케이블 TV에서 오래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들을 재방송해주는 일들이 있다. 그 당시엔 너무나 세련되었던 탤런트들의 복장이나 헤어 스타일이 현 시점에서 보면 참 촌스럽기 그지 없다는 인상을 받게 되곤 한다. 마찬가지로 이런 "시사상식" 책들 역시 시간이 좀 지난 뒤에 다시 읽으면 그와 흡사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시대를 앞선 혹은 첨단의 지식이란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한동안 우리 지식계를 휩쓸다시피 했던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경우 오늘날엔 더이상 논의의 중심이 아니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들도 거의 없는 것처럼 논의의 핵심인양 이야기된 것들이 나중에 지내놓고 보니 별거 아니었던 일들도 많다. 첨단 디지털 문명을 살아가는 시대에도 인간은 원시시대의 인간처럼 가끔 별것도 아닌 돌부리에 채어 넘어진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무렵, 여러 매체에서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교양 :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과 비교하곤 했는데, 여러 분야의 지식들을 망라하고 있다는 공통점과 한 명의 필자 대 다수의 필자가 참여했다는 차이점 못지 않은 큰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앞선 책의 경우엔 주로 서구적 관점에서 다뤄진 교양인데 반해 이 책 "지식의 최전선"의 경우엔 우리 국내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현재 논의되고 있으며 고민되고 있는 사안들을 다룬다는 점이다. 그 점은 이 책만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미덕이며, 서구의 다른 어떤 책과 비교될 수 없는 이 책만의 장점이기도 하다. 어째서 그러한가. 첫째. 당장 우리 사회의 현안들이 무엇인지 살피는데 도움이 될 것이고, 이 책의 저자들이 우리 국내외 현안들(학문적이든 실천적이든)에 대해 일정한 책임질 수밖에 없는 이들이므로 우리의 앞날을 예측해보는데 도움이 될 것이고, 셋째. 이 책에는 당장 이 책 한 권만 읽어서는 이해하기 어렵거나 좀더 심화된 체험과 정보를 원하는 이들에게 유용한 소스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어느 부분을 펼치더라도, 실례를 들어보면... "현대미술의 쟁점, 문화혼성의 시대, 새로운 정체성 찾기"란 박신의(미술평론가)의 글에는 '문화의 혼성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부터 시작해서 '전지구화되는 문화와 뒤섞임'을 살핀 뒤 이 글에서 사용된 주요 개념들을 풀이해주고, 인물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장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외에 "더 읽어야 할 책"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박신의 편에서는 장 피에르 바르니에의 "문화의 세계화" 등과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릴라 간디의 "포스트 식민주의란 무엇인가" 등을 함께 소개한다. (모두 국내에 번역된 책들이다). 그 이외에도 가볼만한 사이트도 함께 소개하는 등 입체적인 소스를 제공하고 있다. 종종 외국의 참고문헌들을 보며 속상했던 경험이 있는 이들이라면 자신이 궁금해 할 만한 부분들을 이 책 한 권을 지도책으로 삼아 가지치기 해 나가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가격이 다소 비싸긴 하지만 제 값을 한다는 점에선 비싸다고 타박할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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