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를 수 있는 권리
폴 라파르그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우리에게는 "가만히 멈추어 서서 바라볼 시간"이 필요하며 무슨 사건에 참여할 때는 어느 정도 긴장감도 느껴야 한다. 우리는 혼자 있을 시간이, 타인과 깊숙히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시간이, 집단의 일원으로서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 자신의 일을 몸소 창조적으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 외부에서 주어지는 즐거움을 주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고 그저 우리의 모든 근육과 감각을 사용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바라건데, 많은 사람이 동료들과 함께 정말 건전한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기획할 시간이 필요하다.
맑스의 둘째 사위 폴 라파르그는 나이 칠십 세에 이르러 아내 라우라와 함께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내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처음 읽은 것은 1997년의 일로 당시 이 책을 읽던 무렵의 내가 받은 충격은 결코 작지 않았다. 1880년 처음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사람들이 받았을 충격이 어느 정도 였을까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 무렵의 내가 받았을 충격만큼은 크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1880년 아일랜드에서 농민들이 2,600건의 폭동을 일으키고, 러시아에 아직 짜르가 존재하던(1880년 러시아에서는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을 노린 동궁 폭파 사건 발생), 이홍장이 북양해군을 창설할 무렵, "게으를 수 있는 권리"란 말은 과연 어느 정도의 현실 감각으로 받아들여졌을까. "좋은 이야기이긴 한데, 지금 당장 일자리가 없어서 굶어죽을 판인데"하며 세상물정 모르는 청맹과니의 허튼 소리 정도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역사 이래 노동은 “인간의 존재, 인간의 도덕, 그리고 인간의 자화상”이었다. 비록 라파르그가 익살맞게 설파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는 산상수훈 중에 다음과 같이 게으름을 설교했다.
"저 꽃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결코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입지는 못하였다." 수염도 제대로 깍지 않고 무슨 일을 할 때면 화를 내곤 했던 여호와는 숭배자들에게 이상적인 게으름의 최고의 본보기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는 딱 6일만 일하고 영원히 휴식을 취했던 것이다. <본문48쪽>
그러나 실제 역사 속의 기독교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익히 말해오듯 근면과 절약을 좌우명으로 삼아 자신의 직업을 신에게 부여받은 ‘천직(天職)’이라 생각하고, 신앙생활 하듯 자기 목적적으로 노동하도록 가르친다.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 되었다. 솔직히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이란 으례 그런 것이려니 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그게 자본주의의 맨 얼굴이 아니던가? 사실, "자본주의 체제"란 말이 요근래만큼 많이 사용된 적은 없었다. 마치 권위주의 정권 시대, "노동자(勞動者)"가 "근로자(勤勞者)"로밖에 표현(근로자란 말엔 이미 'hard worker'의 의미가 내포)될 수 없었던 것처럼, 사회주의 체제가 위협으로 상존하던 시대의 자본주의 국가의 매스 미디어들은 "자본주의"란 말 대신에 "자유민주주의"나 "자유진영" 등과 같은 용어들을 즐겨 사용했었다. 사회주의의 위협이 사라진 뒤부터 "자본주의"는 그 맨 얼굴을 좀 더 자신있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나 "신보수주의"란 말은 사기성이 농후한 말들이기도 하다. 뭐가 새로운 자유주의고, 보수주의란 말인가? 그것이 본래 자본주의의 얼굴이지 않았더냔 말이다.
옮긴이 서문에도 드러나지만 라파르그의 말을 좀 더 귀담아들었어야 할 이들은 사실 자본주의자들이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전 세계 노동자들에게 유토피아적 전망을 선사했던 러시아 혁명 역시 "노동자 국가"라는 수사에도 불구하고, "노동하지 않는 자는 인간일 수 없다"는 노동의 신화, 생산성의 신화에 사로잡히고 말았다(물론, 그에 대한 납득할 만한 역사적 변명은 존재하지만). 결국 1917년 이후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체제가 겉으로는 "노동해방"이라는 기치를 내걸었지만, 그 내면은 20세기 근대 국가들의 시대정신인 "산업주의"에 침윤당한 나머지 노동의 유토피아는 그저 슬로건에 그치고 말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제임스 트위첼 같은 이는 "20세기의 모든 ‘주의’ 중에서, 모든 정치적 시스템의 기반이 되고 있는 한 가지 ‘주의’보다 성공한 것은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났다. 바로 물질주의다. ‘물질’과 소유에 대한 사랑, 거래와 비축, 구매와 판매, 나아가 물건에 관한 대화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현대의 정치적 시스템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국가는 물론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도 관철된 산업주의와 생산성 중심주의는 노동자 동원을 위한 노동의 신화를 가속시켰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해방의 노동”으로 찬미되면서, 자본주의와의 체제 경쟁에 자발적으로 뛰어들었고, 그 결과는 역사가 보여준 대로다.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자본주의의 전면적인 승리로 귀결된 20세기 초엽의 역사적 실험 뒤끝에 온 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가 오늘날 어떤 의미를 지닐까? 그것이 노동중독에 대한 약간의 반성에 그치고 말면 미래에도 실패는 반복될 것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들은 그것을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라파르그가 제시한 해결책 "이들은 아직도 기계가 바로 인류의 구원자로, 천박한 일과 돈 때문에 하는 노역에서 인류를 구원하고 여가와 자유를 마련해 줄 신이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로 귀결될 수는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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