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역사
임용한 지음 / 혜안 / 2001년 4월
얼마 전 생긴 지 그리 오래지 않은 모 출판사에서 우리 현대사의 인물들을 만화투의 삽화들을 곁들여 이른바 대중적인 시각으로 고찰한 역사서를 살펴 본 적이 있다. 읽은 이들의 평은 대체로 좋았지만 읽은 뒤의 내 소감은 그리 좋지 않았다. 역사의 대중화 혹은 대중화 자체가 오해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대중화란 말 속에는 이미 대중을 얕잡아 보는 시선 혹은 희극적 재미 중심으로 추구하려는 의도가 도사리기 쉽다. 역사의 대중화가 추구해야 하는 진정한 의도는 대중들로 하여금 역사 속의 대중을 인식하게 하려는 지적인 시도이지, 대중으로 하여금 역사를 책이라는 문화적 콘텐츠에 담긴 상품으로 소비(모)해달라는 의도를 품지 않는다. (역사의 대중화와 역사의 희화화를 구분했으면 좋겠다는 거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임용한의 "전쟁과 역사 - 삼국편"을 역사 대중화의 괜찮은 본보기를 보인 책으로 생각한다. 아마도 내가 전쟁사에 대해 나름의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면 이 책을 구해 읽지는 않았을 것이고, 다른 독자들과 비슷하게 나 역시도 책을 고르는 기준 중 하나가 출판사와 저자의 유명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인데, 나에게는 "혜안"이란 출판사가 그리 익숙한 이름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서 출판사의 출판목록을 살펴보니 한국학에 대해 제법 축적된 출판목록을 쌓은 곳이었다. 그제야 세상은 넓고, 읽어야 할 책은 여전히 많기만 하다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은 뒤의 내 감상을 이야기하기 전에 내 소감이 어떠했을 지를 드러낼 만한 다른 이야기를 좀 하자면 나는 책날개에 나오는 저자 임용한의 인터넷 카페에 회원으로 가입할 생각까지 했었다. 불행히도 그 시도는 카페가 문을 닫아서 이루어질 수 없었지만 웬만해서는 책의 저자와 이런 방식으로 직접 관련 맺는 시도를 하지 않는데(예를 들면 저자 사인회에 찾아가 줄을 서서 사인 받는 행위 같은 거), 이 책을 읽은 뒤엔 저자 개인에게도 관심이 갈 정도였다. 그 뒤에 알아보니 알게 모르게 저자의 애독자들이 제법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같은 출판사에서 "조선국왕 이야기"란 책도 냈는데, "용의 눈물"과 같은 사극 바람을 따라 졸속으로 출판되었던 비슷한 시기의 다른 책들과 달리 이 책에 대한 평도 제법 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현재까지 내가 읽어본 이 저자의 책은 지금 언급하고 있는 "전쟁과 역사 - 삼국편" 하나이긴 하지만 말이다. 만약 지금의 내 글을 일종의 뽐뿌로 생각하신다면 그렇게 이해해도 좋다. 앞서도 말했지만 역사의 대중화란 역사 속의 대중, 대중이 역사 속의 자신을 발견하고, 인식하게 하려는 시도에 나 역시 충실하고 싶으니 말이다. 구태여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저자 임용한의 개인 약력이 날 약간 당황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알고 있기로 그는 현직 목사님이다. 기독교 대한 감리회 산본신흥교회 담임 목사가 우리 민족의 고대사, 그것도 전쟁사를 연구하는 사학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시쳇말로 "좀 깬다."는 느낌을 주었다. 예전에 지식산업사에서 나온 태평양전쟁사 관련 도서 중에 "핸더슨비행장"이라는 책이 있었다. 현재 이건산업이라는 창호 전문 회사의 상무로 재직하는 분이 솔로몬 군도 현지 법인 대표 일을 맡아보는 틈틈이 연구하여 낸 전쟁사였다.
이 분의 책에 대해 서평한 바도 있지만, 읽는 내내 공자의 말씀, "즐기는 사람을 능가할 공부는 없다"가 생각났다. 그 때 서평하며 역사기술자로서의 아마추어적인 표현과 한계를 곳곳에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아쉬운 점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역사를 신의 섭리(그것도 기독교적인)로 보려는 관점이 제법 진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목사님이 직접 우리 고대 전쟁사에 대한 대중적인 연구서를 냈으니 책을 택배로 배달받은 순간, 아찔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나는 기독교에 대해 일반적인 정도의 편견 이상은 없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뒤 그런 부분에 대한 나의 걱정은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목사이지만 동시에 역사학자였다.
"전쟁과 역사 - 삼국편"은 고구려와 중국의 민족 항쟁을 중심으로 삼국이 치열한 사투를 벌였던 한강 쟁탈전,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명운을 가른 수-당전쟁에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에 이르는 과정에서 왕건에 의한 후삼국 통일까지를 다룬다. 때마침 TV에서 왕건과 견훤의 쟁패를 다루는 사극을 방송해준 적도 있어서 그와 비교해가며 읽는 재미 역시 대단했고, 저자의 역사를 다루는 시선도, 표면적으로 드러난(正史) 사료에 대한 충실함을 빗겨가지 않는 선에서 그 이면에 담긴 의미를 조목조목 짚어간다.
만약 그 이면을 해석하는 방식이나 논리가 박약하다면 이 책의 품격은 크게 떨어졌을 텐데, 읽는 내내 그간 우리 역사 속의 전쟁들에 대해 궁금해 하던 것들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나는 헨리5세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궁사들을 중심으로 편성된 영국 원정군으로 어떻게 당시 최정예 군사집단에 속하는 프랑스의 기사들에게 승리했는지 설명할 수 있다. 당시 전투가 벌어진 아쟁쿠르 인근의 지형과 양군의 배치도를 알고 있으며 당시 영국군이 사용한 무기인 장궁의 사정거리와 파괴력에 대해서도 안다. 그리고 영국이 궁사를 양성하기 위해 어떻게 했으며 이 전투의 결과 영국과 프랑스 사회가 어떻게 변모하게 되었는지도 안다.
물론 이것은 책을 통해서이고, 서양의 역사학자들이 잘 보존되어온 사료들을 충실하게 연구해준 덕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서기 617년 당 고조 이연이 태원에서 난을 일으키고, 11월 장안에서 수 양제의 군대에 승리를 거두고, 626년 당 태종 이세민이 즉위한 뒤 고구려와 벌인 일전들, 양만춘과 안시성 전투의 그림을 머릿속에 그릴 수 없다. 수 양제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요동성을 함락시켰던 당 태종이 어째서 양만춘의 안시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는지, 연개소문이 지원군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성 내의 고구려 군과 성 밖의 고구려 지원군 사이에 어째서 합동 작전을 펼치기 어려웠는지 등등의 사실을 친절하고, 설득력 있게 전한다.
학교에서 양만춘과 안시성을 달달 외우기는 했지만, 역사가 이해하며 공부하는 학문이란 사실 대신에 달달 외우는 암기 과목으로 치부되어 그 동안 우리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고, 외울 것만 많은 재미없는 과목이 역사란 선입견을 갖게 만들었다. 이 책은 그런 선입견을 단박에 깨준다. 교과서에 실린 삼국 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최대 세력 판도를 그린 지도를 보면서 한강 유역이 중요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세력이 한반도를 지배한다는 것은 배웠지만 한강이 왜 중요한지, 그 물줄기들이 당시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백제 성왕은 어째서 목숨까지 잃어가며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애썼는지 이후 백제 위덕왕은 왜 맥을 못 추게 되었는지도 알 수 있다.
고대사 혹은 고대전쟁사를 전공한 이들에게 이 책은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고, 별로 전문적이지 않은 책일지도 모르겠다. 또 ‘전쟁사에 대해 굳이 알아야 돼?’ 하는 분에게도 별로 재미없는 책, 필요 없는 책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삼국 시대 당시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이해하고자 하는 분, 어째서 강성했던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지 못했는지 견훤이 왕건에게 투항한 뒤 우울증에 시달린 나머지 등창이 나서 죽었다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지 궁금한 분들은 꼭 읽었으면 좋겠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기분이 몹시 좋았다. 겉표지나 책의 모양새가 신통치 않아 보였기 때문에 오히려 속 내용에 더 흠뻑 젖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외국의 저명한 역사가들이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되 품격을 잃지 않은 대중적인 역사서를 내는 것을 보면서(다시 말해, 대중의 눈높이를 고려하되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지 않고 대중이 책을 읽은 뒤엔 그 수준을 살짝 높일 수 있도록 하는) 입맛을 다셔왔던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도 그런 역사학자를 만나는구나 하는 마음(물론 이전에도 훌륭한 분들이 많이 있어왔지만)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오랫동안 잊고 지내다가 이 책의 2권 고려편이 나왔음을 이제야 알게 되어 주문하려고 장바구니에 넣어놓고, 2편을 읽기 전에 부랴부랴 1편의 감상부터 적어 올린다.
ps. 가끔 사극을 보면서 다음 스토리는 어떻게 전개되느냐고 주변 사람들이 묻곤 한다. 드라마 잘 보자고 역사책 보는 이들은 없겠지만, 이 둘을 비교해가며 보는 재미 혹은 과거에 보았던 드라마들과 비교해가며 보는 재미도 괜찮다. 눈높이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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