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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가 죽인 책들
로버트 다운스 지음, 곽재성.정지운 옮김 / 예지(Wisdom) / 2004년 2월
얼마전(2006. 9. 13) 서울대가 개교 60주년을 맞아 1946년부터 지금까지 역사적 의미가 큰 ‘판금(販禁)’ 도서 20권을 선정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염재만의 『반노』,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김지하의 『황토』, 신동엽의 『신동엽전집』,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 김병익의 『지성과반지성』, 님 웨일즈의 『아리랑』, 송건호 외의 『해방전후사의 인식』,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박영창의 『무림파천황』,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풀빛의 『한국민중사』, 에리히 프롬의 『사회주의 인간론』,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광주 5월민중항쟁기록』,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루카치의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박태원 외의 『갑오농민전쟁』,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그것들이다.
이 책들에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는가를 묻는 것이 이 글의 본래 뜻은 아니지만 대체로 동의할 수 있는 선정이라 생각한다. 한때 국가와 사회에서 읽는 것을 금지시킨 이 책들은 이제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으나, 상당수는 오늘날 더 이상 읽히지 않거나 역사적 의미는 있어도 현재적 의미는 반감된 것이기도 하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란 책제목도 있지만, 인간에게는 금지된 것을 열망하는 판도라의 호기심과 프로메테우스의 의지가 잠재해 있다. 아담과 이브가 금지된 과실, 선악과를 통해 인간의 지혜를 획득한 것처럼 혹은 예수의 제자 도마가 보고서야 믿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대중의 관심을 금지된 것으로부터 돌리기에 가장 좋은 방식은 어쩌면 금지가 아니라 그것을 흔하게 만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과거 숨어서 부르던 혹은 최루탄에 눈물 바람이 되어 불러대던 금지곡들은 이제 7080세대를 위한 추억의 노래가 되어 방송되지만 예전보다 목소리는 한껏 잦아졌다.
로버트 다운스의 『교과서가 죽인 책들』은 앞서 말한 역사적 의미와 동시에 이제 정전의 반열에 올랐기에 도리어 지식으로서의 생생함이 감소된 책들이란 이중의 의미가 있다. 그런 점에서 옮긴이 서문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글은 이 책에 대한 독서 의욕을 자극하는 매우 유쾌한 도발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마르크스의 『자본론』,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이 책들의 공통점에 해당되는 것들을 모두 고르시오.
1) 유명하다
2) 역사상 중요한 책들이다.
3) 읽고서 감동받은 책들이다.
4) 읽어본 적 없다.
개인적으로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대학에서 문학공부를 위해,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전권을 구입하기 위해 몇 달치 용돈을 악착같이 모은 추억이 있는 책이기도 하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역시 예전에 문고판으로 가지고 있다가 사회에 나와서 제대로 잘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새로 구입한 책이고,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도 양장본으로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책들을 잘 읽어보았던가? 지금 이 순간 반문해보니 몇몇 구절을 인용하기 위해 혹은 다른 책들을 읽다가 본문을 확인하기 위해 뒤져 본 기억을 제외하고는 정독해 본 적이 없어서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교과서가 죽인 책들』이 다루고 있는 책들은 분명 중요한 책이긴 하지만 이 책에 수록된 모든 책들을 구해 읽을 필요는 없다. 어떤 것들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일부를 읽는 것만으로 족할 수도 있고, 어떤 것들은 이 책을 계기로 새롭게 접근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아마도 그것이 이 책의 저자가 의도한 바 일 것이다. 부수적으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을 이미 경험했던 이들도 로버트 다운스의 해석, 타인의 시선을 통해 그간 읽어온 책들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거나 보다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 비평에 대한 독서란 전문적으로 훈련된 타인의 시선을 통해 나의 시선을 교정하고, 바라보기의 새로운 지평을 발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 책이 지닌 미덕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책들에 얽힌 전후 배경에 대한 이해를 통해 세계사의 이면을 좌우했던 지식인과 지식의 힘을 간접적으로나마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교양을 어떤 이는 잘난 척하기에 필요한 것, 남들과 대화할 때 모른다고는 할 수 없으니 한 마디 거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란 식으로 폄하하곤 한다. 교양이란 것이 세상 사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세상살이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뭐 그리 많을 리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구태여 이런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또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원 자료들을 이미 읽은 사람들도 구태여 읽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혹은 타인과의 대화 중 간혹 언급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아는 체 하기 위해 뭔가를 읽어내는 일은 그 자신에게도 허망하지 않은가. 그러나 세상의 모든 신화들이 증명해주듯 인간이 품고 있는 앎에 대한 의지는 판도라의 불행과 프로메테우스의 불온, 아담과 이브의 타락, 도마의 의심이라는 죄악을 뛰어넘는 것이다. 우리는 판도라를 통해 희망을 발견하고,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노예에서 주인으로, 아담과 이브의 타락을 통해 지혜를, 도마의 의심을 통해 믿음을 얻는다. 그것이 지식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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