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죽은 사상인가 - 막스 갈로 외 / 당대 / 1997년 8월
과거가 더 이상 새로운 미래를 밝혀 주지 않으니, 정신은 어둠 속을 걸어간다.
- A. 토크빌
『진보는 죽은 사상인가』는 지난 1996년 8월 경 미국의 평론가인 윌리엄 파프가 던진 “진보는 이제 죽은 사상인가”라는 질문에 프랑스의 정치가, 철학자 및 학자들이 답한 것을 <르 몽드>에 게재하고 이를 다시 책으로 엮은 것이다. 애초의 질문자인 윌리엄 파프를 포함해 모두 21명의 필자들이 각각 짤막한 철학적 에세이 형태로 응답한 것으로 비록 짧은 글이긴 하지만 우리 시대의 ‘진보’라는 화두를 놓고 고민해볼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홍세화 선생이 번역을 맡아 그로부터 1년 뒤 도서출판 당대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이 책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을 구입해놓고도 사실 나는 그리 열심히 읽지 않았다. 우선 프랑스 지식인들의 난해한 글과 개념들에 익숙하지 않아서고, 다른 한 가지는 진보의 문제에 대한 고민 자체가 이제 그만이라고 하고 싶을 만큼 지겨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다시 정독하며 나는 “철들자 망녕”이라는 우리 속담이 떠올라 새삼 반성했다. 사람은 늙어 죽을 때까지 배울 것이 있고, 성숙의 과정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21명의 필자들 모두를 하나의 좌파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진보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좌파적인 고민으로 이어진다. 이들이 진보를 통해 던지는 질문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자본주의 체제의 바깥은 가능한가란 질문이며, 이는 지난 세기말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계속되는 나의 고민이기도 하다. 물론 100여 쪽 남짓한 이 한 권의 책이 진보의 고민에 대한 명확한 답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민의 깊이를 더해줄 수는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진보는 죽은 사상인가』에 대한 독후감이자 “진보는 죽은 사상인가”에 대한 내 고민의 흔적이기도 하다.
진보는 일직선상을 달리는가?
서구에서의 진보는 오랫동안 일직선상에서 사유되었다. 진보는 전진 혹은 후퇴, 정체라는 세 가지 개념 속에서만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진보주의적 낙관론은 인류는 과학적, 기술적 진보를 통해 끊임없이 전진한다는 이상론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은 그 이름과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다른 얼굴들을 가지고 있는가? 시장경제론자, 보수주의자 등 - 혹은 타협, 야합의)은 동서냉전의 승부에서 자본주의가 전세계적으로 승리했으며 이 결과로 동구에서도 자본주의는 놀라운 효율성을 발휘할 것이라 믿었다. 그것을 진보라 믿었기에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이를 "역사의 종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서냉전의 승리를 자축하기도 전에 균열은 동구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서구로부터 시작되었다.
자본주의의 혜택을 누려오던, 누리고 있다고 믿어지던 서구에서 자본주의의 혜택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랫동안 과학은 기술문명의 진보를 전담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1992년 노벨상 수상자를 비롯한 2백여 명의 과학자들이 하이델베르크에 모여 리우 환경 회의에 참가한 각국 정부대표들에게 한 장의 호소문을 발표한다. 이름하여 "하이델베르크 호소문"이다. 이들은 "과학 및 산업의 진보에 반대하는 비이성적 이데올로기의 출현"을 우려한다는 것이었다. 과연 리우 환경 회의는 과학의 진보를 방해하는 것이었을까? ("하이델베르크 호소문"은 생태주의자들을 포함한 여러 지식인들의 역 호소문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이들이 호소문 내용 속에서 두 차례나 산업의 긍정적인 역할을 강조했던 점 등으로 미루어 다국적 제약 회사들의 로비활동이 있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샀다. 하버마스는 현대 사회를 과학과 테크놀로지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 과학과 기술이 최고의 가치로 평가되고 이것이 정치의 영역까지 확장된 사회라고 말한다. 이제 과학자는 국가요인 수준의 경호를 받는 존재가 되었다.)
자크 아탈리는 "역사의 미로를 걷는 인간"이란 글을 통해 "21세기를 앞둔 시기, 나치즘과 공산주의가 어떤 사람들에겐 인간이 전진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겐, 그 두 이념의 패배가 진보의 확고한 전진을 보여주는 표시"였다고 말한다. 후쿠야마에게 이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확고한 승리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로 역사의 중지를 의미했다. 진보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은 낙관과 비관 사이를 오고가는 시계추처럼 보인다. 낙관과 비관 사이엔 역사는 우연인가, 필연인가라는 질문을 불러들인다. 과연 역사는 미리 정해진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되어있는 걸까. "행복한 결말"이, "비극적 파탄"이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인가. 진보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역사의 문제를 고민하게 한다.
역사는 아무 것도 만들지 않는다
알랭 핀키엘크로트는 1920년대 바르샤바의 젊은 이삭 바슈비 싱거(Isaac Bashevis Singer)를 불러내 물어본다. 젊은 이삭은 정육점 앞에 진열된 소시지를 보면서 문득 11년 동안 우유를 제공해주던 그브야툴(Kvyatule)이란 암소를 생각해낸다. 젖이 마르자 도살장에 끌려간 암소의 비석은 어디에 있는가? "마지막 고통에 대한 보상은 존재하는가? 도살당한 암소들을 위한, 닭들을 위한, 돼지들을 위한, 사람에게 밟힌 개구리들을 위한, 바다에서 낚시 바늘에 걸려 찢겨진 생선들을 위한, 피에틀라우라에 의해 고문당하고 볼셰비키에 의해 총살당한 유태인들을 위한, 베르덩에서 죽은 백만의 전사자들을 위한 천당은 존재하는가?"
물론 핀키엘크로트의 글은 내가 이 글을 읽고 받아들인 느낌과는 좀 다른 내용과 형식을 가진다. 나는 젊은 이삭의 질문 "역사는 고통에 대해 어떻게 보상하는가?" 혹은 "역사는 정의를 알기나 하는가?"란 질문으로 다가왔다. (핀키엘크로트는 이것을 당시의 크브야툴은 그래도 아직 짐승(암소)일 수는 있었던 시대를 살았지만 현대의 크브야툴들은 짐승만도 못한-광우병-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역사에 대해 반문하는 것은 때로 역사의 초역사성(이거 말이 되는 거야?) 덕에 도덕적 허무와 종교적 근본주의 사이를 왕래하게 만들기도 한다.
역사가 아무 것도 보상할 수 없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아무 것에도 의지할 수 없고, 역사가 모든 불의와 부조리에 대한 심판이 가능할 것이라 믿는 순간 역사는 종교의 일종이 된다. 마치 성서에 등장하는 욥의 질문 "나 이제 하느님께 아룁니다. 나를 죄인으로 다루지 마소서. 어찌하여 이런 시련을 내리십니까? 그 까닭이라도 알려 주소서. 당신께서 손수 만드신 것을 억압하고 멸시하시는 것이 기쁘십니까? 악인의 꾀가 마음에 드십니까?"과 같다. 성서에 등장하는 의인(義人)의 전형으로 꼽히는 욥은 사탄과 하느님의 게임으로 재산과 열 명의 자녀를 잃고, 건강마저 잃는다. 신을 저주하라는 아내의 말도 거부한다. 그런 그가 "왜 저입니까?"라고 감히 하느님에게 묻는다. 욥기에 따르면 하느님이 직접 나서 답 해주는데 그 길이가 38장부터 41장까지 무려 다섯 장에 이른다. 이렇게 긴 답변이지만 결론은 한 마디다. "신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신이 없다면 죄도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을 다니엘 벤사이드는 역사에 대입한다. "역사는 아무 것도 만들지 않는다."라며 그는 파스칼의 말 "우리가 내일을 위해 그리고 불확실을 위해 일할 때, 우리는 이성(理性)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를 인용한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의 하느님은 미합중국 건국 당시의 하느님과 같은 하느님일까? 워싱턴 포스트지의 밥 우드워드의 "공격계획"이란 책이 논란이 되었었다. 우드워드가 부시 대통령에게 "아버지와 전쟁 계획을 상의했느냐"는 질문에 부시 대통령은 "아버지는 그런 걸 상의할 대상이 아니다. 나는 더 높은 곳에 있는 아버지(하나님)에게 얘기한다"고 말해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를 CBS와의 대담에서 밝혔기 때문이다. 초기 미국의 건국자들은 초월적인 창조주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창조주가 자연계의 매사에 개입한다는 관념은 부정했던 이들이다. 부시 시대의 하느님은 "미국의 예외주의"의 하느님인가 보다.) 베르나르 쿠쉬네('국경없는 의사' 초대의장)는 "우리 안에는 두 가지 본성이 있다"며 다시 파스칼을 불러들인다. 그는 진보는 끝장났다는 생각에 대해 동의할 의사가 없다. 그는 "우리 아이들의 장래는 우리들보다 더 나쁠 것"이라는 견해에 반대하며 그 미래는 단지 우리와 "다를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너무나 소박하여 단일시장, 세계화의 플랜보다 실천하기는 어렵지만 포기하기 어려운 매력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 세계 모든 아이들을 우리들의 아이처럼 생각하는 믿음 없이는 행동에 진보가 있을 수 없다고 말이다. 인공위성, 무선전화, 유전 치료, 수상재배와 같은 기술적 진보가 살인의 충동, 기아, 인종주의, 종족 학살을 완벽하게 모면시켜 줄 수 없다며 삶을 개선하기 위해선 과학에 양심과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개인적 참여, 집단적 선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무기력과 이를 그럴싸하게 장식하는 냉소주의보다는 변화에 대한 의지, 그리고 사상에 대한 낭만주의가 바로 진보라고 말한다.
진보는 행복이 아니다. 투쟁하면서만 전진할 수 있다. 선보다 악에 대항하기 위해 더 쉽게 뭉친다.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그처럼 행동한다. <본문 73쪽>
카산드라 콤플렉스 - 예언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다
지식인들은 종종 카산드라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트로이왕인 프리아모스의 딸이었던 카산드라는 신탁을 전해주는 무녀였다. 카산드라는 트로이의 함락을 예견하였고, 함락 이후엔 아가멤논의 암살을 예언했지만 아가멤논도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았다. 지식인들은 많은 것을 예언하고, 이에 대한 방비책을(때로 무능하긴 하지만) 내놓는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카산드라의 예언은 정확하지만 결과적으로 무익한 것이다. 지식인들의 냉소는 때로 피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열패감에 사로잡혀 현실을 다만 탐미하는 쾌락주의, 지식의 세계에 갇힌 채 매혹으로의 정진만을 추구한다. 막스 갈로는 장 조레스의 "그 길가는 온통 묘지들로 둘러 싸여 있다. 그렇지만 그 길은 정의를 향해 뻗어 있다"는 말을 빌어 과연 오늘날엔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반문한다.
마르크스는 니체의 "역사는 반복된다"란 말에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란 말을 덧붙인다. "아직도? 마르크스?"란 질문에 대해 "아직도! 마르크스!"라고 대답하면 변화된 시대를 읽지 못하는 낡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어느 시대건 진지하게 세상을 고민하는 이들은 늘 적었음을 상기해보면 진보는 "인간관계의 인간화(humanisation)"에 있어 자본처럼 축적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발터 벤야민은 "좋았던 과거로부터 시작하느니 잘못된 현재에서 출발하는 것이 낫다"는 논지의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늘 잘못된 현재(야만)가 우리 인류의 극복할 수 없는 한계란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가? 이 질문의 답을 하기는 매우 어렵다.
유토피아의 부재 - 진보의 추락
진보의 추락은 인간(혹은 좌파)이 계몽과 해방의 주체로서의 자격을 상실했음을 의미하는 증거로 예시되곤 한다. 사회주의의 몰락이 곧바로 자본주의의 승리로 연결될 수 있는가? 이것은 기만이다. 막스 갈로는 "수백만의 생명이 혼란스러운 세계 질서의 용광로 속에 내던져져" 있는, "한쪽 끝엔 극도의 낭비가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엔 결핍"이, 굶주림, 인종주의, 근본주의가 강화되는 현실에서 이런 세계에 대한 거부가 잘못된 것인가? 라며 되묻는다. 그는 변혁에 대한 냉소와 야만행위는 반복될 것이란 무기력, 유토피아는 불가능할 것이란 예언으로부터 탈출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기 위해선 두 개의 가설 "우선, 현실은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현실을 개선시키기 위한 합의된 개입이 가능하다"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성적 사고(계몽)을 포기하자니 비합리주의로 향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진보의 추락은 해방의 기획에서 집단화된 주체의 몰락을 가져왔고, 개인에 대한 찬양과 열광으로 이어졌다. 사람을 가리키는 말은 매우 많다. 사람, 인간, 민중, 군중, 대중, 인민, 서민 등등... 때로는 정치적으로, 학문의 엄밀성을 위해 용어는 구분되고, 구분될 때마다 각각의 용어들은 별도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사람 혹은 여러 사람들을 일컫는 말 가운데 가장 나중에 온 말은 무엇일까? 민중? 하긴 우리가 민중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가장 나중에 발견되었으며, 가장 나중까지 논란의 여지로 남을 인간은 "개인"일 듯싶다. “사람, 인간, 민중” 등과 대비되는 “개인”은 집단 대 개인이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최근 역사학계의 새로운 조류로 주목받기 시작한 "일상사"에서(이와 관련한 책으로 작년에 청년사에서 출간된 "일상사란 무엇인가"와 개마고원에서 출간된 "나치시대의 일상사" 등이 있다) 다루는 인간 또한 개인이라 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의 만행이 히틀러와 같은 소수 권력자들뿐 아니라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의 일상에 내재된 '악'에 의해 가능했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때의 일상 역시 개인에 해당한다.
개인 - 해방의 주체인가? 기만의 대상인가?
앙리 르페브르는 일상을 '혁명 시도가 실패하는 원인이며 결과' 로 봤다. 일상이란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된다. 그렇기에 일상은 우울한 것이다. 그러나 르페브르의 말처럼 모든 혁명은 일상에서 비롯되었고, 결국 실패하는 원인도 일상에서 비롯된다. 일상에서 시작되지 않는 변화는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하며 일상에 매몰되는 변화 역시 아무 것도 성취해내지 못한다. 일상의 무기력증은 일상을 변화시킨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반복적으로 체득하게 한다. 일상성의 의미 속에 무기력하게 지배당하는 개인과 그와 같은 소비적 일상을 거부하는 개인, 이 개인이 주체적인 자아를 회복하는 것을 르페브르는 "일상성의 혁명"이라 불렀다.
필립 브르통은 개인주의에 대해 기 드보르(Guy Debord)의 “흥행은 고립된 자들을 집결시킨다. 그러나 고립된 채로 모을 뿐이다.”를 인용하여 설명한다. “자동차에서 텔레비전에 이르기까지 흥행체제에 의해 선택된 이 모든 재화들은 또한 고독한 군중들의 고립조건을 부단하게 강화시키는, 체제의 무기”들은 통신사회를 유토피아의 대안으로 보이도록 만든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라는 오래된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사회의 진정한 억압성을 위장한다. 통신하기 위해 통신하는 것, 통신하기 위해 통신에 접속해야 하는 통신사회에서 더욱 강조되는 개인은 고립을 부추기고,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개인을 망각하게 한다. 진보란 말 속에 종종 오해받곤 하는 “기술의 진보”란 말은 사회관계, 인간관계의 진보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과학과 기술이 주도하는 현대사회의 발전에서 노동운동은 더 이상 사회변혁의 주도적 동인이 아니지만, 이것이 계급갈등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새로운 형태로 출현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장 조레스의 후예들은 어디에 있는가?
장 조레스는 "우리들의 모든 불행과 우리들이 저질렀거나 또는 겪었던 불의를 관통하여 진실로 남아 있는 것은 인간성에 폭넓은 신뢰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느낌, 그리고 이루 형용하기 어려운 거룩한 운명에 대한 예감이 없다면 그것은 스스로 인간을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장 조레스가 말한 진보는 과연 그에 적절한 후예를 얻었는가? 평등주의의 이상을 비판한 전체주의는 인종주의를 과학적으로 건설하고, 자본가 계급의 소멸을 주장한 공산주의는 휴머니즘의 얼굴을 한 공포정치를 불러왔다. 이 둘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했고, 개인을 대신해 집단을 선택했다. 불확실한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현재를 희생시켰다. 이제 이 둘은 소멸되었다. 그렇다면 진보의 모든 이데올로기는 소멸되어도 좋은가.
자본주의의 바깥은 존재할 수 있는가? 역사는 두 가지 모델을 보여준다. 하나는 소련공산주의, 다른 하나는 제3세계 민족의 발전경험이다. 보리스 까갈리츠끼는 좌파는 이 모델들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내야 할 책무가 있다고 말하면서 “그 모델들이 얼마나 ‘사회주의적’이었는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이 두 모델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출현해 모두 패배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제3세계 국가들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면 동유럽은 이로 다시 돌아왔다. 소련모델과 제3세계의 민족주의운동 모두는 민주주의를 배척하는 희생을 치르고 속성 개발모델을 채택했다. 결국 인권과 자유에 대한 경시가 그들이 패배한 결정적 이유였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1989년에 갑자기 자유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사실 그 중 많은 수는 자유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다) 자유롭지 못한 사회는 잠재적인 변혁의 가능성을 동원할 수 없고, 또 자본주의의 공격적인 선전과 소비자를 현혹하는 감언에 성공적으로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리스 까갈리츠끼, 「1989년, 그리고 동구국가의 미래」, 『창작과비평』1999. 겨울호(통권106호), 84쪽>
21세기 현재 우리는 동구의 몰락,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가 단지 공산주의 체제위기의 부산물이었을 뿐, 자본주의의 승리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까갈리츠키는 좌파의 부활은 궁극적으로 좌파가 민주적이고, 혁신적인 주도세력이 되는데 얼마만큼 성공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이는 진보 혹은 좌파의 새로운 해방의 기획이 자본주의 세계 질서체제를 철폐하고 정의로운 세계질서로 대체하는 전지구적인 변화와 함께 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 진보는 좋았던 과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낡은 미래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은 잘못된 현재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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